감정 일기
누군가 나에게 찾아와 멘탈이 불안정하고 힘든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물으면 나는 여러 가지의 방법들을 알려주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만의’ 노하우는 아니었다. 그저 본질만 이해하면 뻔한 말들이었다. 원래 정석같이 좋은 방법들은 뻔하다. 정석이니까 널리 알려졌고, 널리 알려져 뻔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진부하더라도 나는 매번 그 말들을 해줬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니까. 나는 그들의 마음에 더 잘 와닿게 이야기를 전해 줄 자신이 있었다. 내 진심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알려준 방법들이 뻔한 이유는 그것이 정석이기 때문도 있지만, 어쩌면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힘들어서' 남에게 의존하고 싶을 정도로 멘탈이 크게 흔들린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그저 혼자 해결했다. 며칠 생각하면 해결 가능한 고민들이었다. 심각하게 멘탈이 흔들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만의 노하우'랄 것도 없었다. 흔들리는 멘탈은 살면서 자연스럽게 겪을 고충이며, 때가 되면 결국 흐려지게 되는 것들이라 단조롭게 여겼다.
"물 많이 마시고, 식사 규칙적으로 하고, 잠 잘 자고, 산책 즐겨하고, 스쿼트 하세요."
웬만한 힘듦은 위의 단순한 노력이 많이 해결해 줄 수 있다. 실제로 이야기해 줄 때는 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원리를 설명해 줬다. 뻔한 말이라도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큰 힘이 되고 동기를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감사했고, 보람을 느꼈다. 설령 누군가 가벼워 보이는 고민을 가져와도 나는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자기만의 사정이 있을 테고, 성격과 가치관, 그리고 환경이 다를 테니까. 그 차이를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했다. 그들이 힘들 때 나를 떠올리고 연락한 것도 나에 대한 소중한 신뢰의 의미다.
근데 요즘 들어서는 그들이 아닌 내게도 버거운 고민과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감사함과 보람과는 다른 부정적인 생각들이 자꾸 떠올랐다. 이전까지는 머리에서 맴돈 적 없던 낯선 생각들이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힘들 때 나를 찾아와 준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최대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해 주며, 함께 머리를 맞대어 줬다. 그런데 만약 ‘내가’ 힘들면, 이번에는 ‘내가’ 깊은 고민이 생기면,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을 때면, 그때가 되면 나는 누구에게로 가야 하는가. 누구에게로 갈 수 있는가?”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는 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줬다. 여태껏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내 고집에 맞추어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에 따른 책임은 내가 지어야만이 마땅했다. 가장 친하고 관계가 깊은 친구들에게도 늘 강하고 약하지 않은 모습만 보여줬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약한 모습은 자연스럽지 못할 셈이었다. 그렇다고 고민 상담을 해줬던 익명의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어설프다.
너무 강한 모습만을 보이려 애쓴 것의 부작용일까. 내가 정말로 약해졌을 때 가야 할 길을 쉽게 찾지 못했다. 과거에도 힘든 순간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혼자 잘 생각하고, 혼자 잘 해결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유난히 이런 생각(“누구에게로 가야 하는가.”)을 하는 이유가 뭘까. 내 멘탈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신호일까. 그래서 적적한 새벽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건가.
날씨가 춥기까지 하다.
과학의 끝으로 가도, 철학의 끝으로 가도, 종교의 끝으로 가도, 세상사의 끝으로 가도 모든 것의 끝에는 인간의 의식이 있다. 모든 결과에 대한 원인은 ‘의식’, 즉 나의 생각이다. 최근에 어떤 생각을 했길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가. 감정의 원인은 무조건적 생각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걱정을 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순간이다.
내가 바라보고 갔던 삶의 이정표가 덜 구체적이었다는 걸 깨닫고 길을 잃을까 걱정했다.
내가 원하는 미래의 내 모습과 현재의 내 모습 차이에 실망했다.
이루고자 하는 많은 것들이 막막하게 느껴져서 좌절했다.
생각이 많으면서도 너무 생각 없이 살아서 자책했다.
삶의 지표가 추상적이라면 더 전략적이고 구체적으로 만들면 된다. 내가 원하는 미래의 내 모습과 현재의 내 모습 차이가 크면 미래의 모습을 기대하며 차근차근 이루어나가면 된다.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많다고 느껴지면 내가 가진 많은 시간들을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미래를 상상하면 된다. 생각 없이 살았으면 더 생각하고 살면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 모조리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런 사고방식이면 내가 아니라 공자도 부정적인 아우라에 휩쓸렸을 것 같다.
부정은 부정을 끌어당기고, 긍정은 긍정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게 말이야 쉽지, 참 어려운 일이다. 여태까지는 쉬웠는데 요즘은 왜 이리 어려울까. 일을 오랫동안 쉬었기 때문에 성취감이 없어서 도파민이 부족한가? 스쿼트를 안 해서 근육이 줄어 남성호르몬이 내려가 삶의 열정이 떨어지는 건가? 사람을 잘 안 만나서 옥시토신이 결여돼 덜 행복해진 걸까? 자극적인 숏츠 콘텐츠를 많이 봐서 도파민에 중독된 걸까? 여러 이유를 의심했다. 어쩌면 다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의심한 것들 중 합리적인 의심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하나씩 헤쳐나가기로 결심했다.
1. 부족해진 성취감을 다시 채우기 위해 쉬고 있던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성취감을 채우는 기초 단계로 찬물샤워가 있는데, 난 따뜻한 물 샤워는 포기 못하게따)
2. 남성호르몬을 높이려고 헬스장을 등록했다. 실천율을 높이기 위해 집 앞 도보 2분 거리의 헬스장에 등록했다.
3. 실제로 사람을 만나니까 피폐해진 내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1번이 사람과 많은 교류를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4. 하루에 숏폼(릴스, 숏츠)을 접하는 빈도를 많이 줄이려 한다. 성적인 콘텐츠나 성관계도 긴 텀을 두고.
위의 사고 과정을 정리하면 ‘내 상태를 의심’ → ‘객관화’ → ‘반성’ → ‘실천’의 이상적인 순서다. 이상적인 좋은 사고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글을 업로드하는 시점은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날로부터 3주가 지난 시점이다. 그만큼 단번에 해결하지 못하고 오래 쥐고 있던 문제다. 그 과정에서 이성적인 사고를 빨리 해내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쳐 맹하게 있기도 했고, 현타를 느끼며 극심하게 차분히 가만히만 있기도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도 없는 자연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다.
비록 여러 감정적 힘듦을 겪었지만 이제 다시 좋아지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 이유들 중 하나는 ‘내 부정적인 기운이 상대방에게 전이될까 봐’다. 말로 하는 게 아닌 글을 써서 이야기하는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기운을 옮길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작성하면서도 가능한 덜 부정적인 분위기로 작성하려 노력했다. 섬세한 배려가 숨어 있었음을 알아주길 바라요 ;)
누구나 힘든 시기는 있다. 돌이켜보면 극복하는 시기도 분명히 공존했다. 힘든 순간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고, 결국 극복해내는 미래의 순간을 기대하며 오늘을 착실히 살아가자.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사람 모두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너의 감정적 슬럼프
누군가는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