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대처법& 삶의 마음가짐
사이비 종교 전도사, 도 전도사.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나요?
그들을 길거리에서 마주친 적 있나요? 설령 그들이 말을 걸었더라도, 당신은 아마 그들을 매우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고 지나쳤을 거예요. 그리고 주변 지인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에 넘어가 '정성'을 들이고 돈을 지불했다면, 멍청하게 그걸 속냐고 질책할 테죠.
그런 질책이 가능한 이유는 당신이 아직 '초고수'를 안 만나봐서 그렇습니다. 초고수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흔한 패션을 기억할 거예요. 체크무늬 셔츠에 허름한 청바지를 입고 후줄근한 가방을 멘, 소위 '띨빵'해 보이는 패션입니다. 초고수 또한 그 패션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아요. 하지만 그 이상한 패션이 묻힐 정도로 인상이 강합니다. 눈빛이 살아있고 깊은 통찰이 담겨 있으며, 상당한 기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들은 기존의 '도를 아십니까'들만의 대화법을 사용하지 않아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거나, 기운이 안 좋아 보인다거나, 그것들을 해소하기 위해 조상님에게 예우를 갖춰야 한다며 돈을 유도하는 쪽으로 대화를 성급히 유도하지 않아요. 초보처럼 가스라이팅식 대화를 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상대방과 심도 있는 '대화다운 대화'를 시도합니다. 상대방이 "이 사람이 나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 한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말이죠.
초고수의 능력은 '감각적인 직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관(= 촉)으로 사람의 관상과 아우라, 사주팔자까지 볼 줄 압니다. 이 능력으로 신기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시도하면서 신뢰를 쌓습니다. 평범한 일반인라면 이 사람이 사이비 전도사라는 걸 의심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비범한 직관에 빨려 들어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 평범한 일반인에 속했어요. 초고수의 비범함에 빨려 들어갔죠. 하지만 아무리 '초고수'라도 사이비 전도사를 판별하는 '척도'가 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이 어떻게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지, 사이비 전도사를 판별하는 척도는 무엇인지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다 읽으시고, 언젠가 그들의 꾀에 넘어갔다가 주변 사람들의 질책에 "아니 이건 진짜 속을 만 했다니까!!"라는 변명을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
비가 오는 날이었어요. 카페에서 공부를 하다가 볼일이 있어 짐을 두고 잠깐 나왔어요. 근데 길에서 어떤 여학생과 중장년의 여성분이 어떤 장소의 위치를 여쭈우시더라고요. 그곳은 바로 근처에 있는 이 지역의 랜드마크였기 때문에 쉽게 가르쳐드렸습니다.
“지도를 확인해 봤는데, 이쪽 방향으로 2~300m만 가시면 CU 편의점이 있을 거예요. 그곳에서 곧장 우회전하시면 바로 보이실 거예요.”
당시 제 용모는 매우 단정했습니다. 저희가 있는 곳은 대구였지만 표준어 억양으로 조곤히 귀에 쏙 박히게 잘 설명해 드렸어요. 중장년의 여성분은 저의 단정한 말투에, 서울에서 온 사람이냐 물으시더군요. 일 때문에 종종 서울에 올라간다고 답했습니다. 그분은 저의 친절에 보답이라도 하듯, 당시 저의 단정한 외모와 말투에 대해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 얼굴을 보고 저를 꿰뚫기 시작하셨습니다. 막연한 연설이 아니라, 저를 위한 꿰뚫음으로 느껴졌어요. 친절을 베풀어 준 청년이 눈앞에 있고, 그 청년에게 자신의 눈에 보이는 평범하지 않은 것들을 조금이라도 알려주고자 하는 느낌이었달까요.
저의 눈썹에 담긴 고집, 눈빛에 담긴 통찰, 그리고 종합적인 아우라로 느낄 수 있는 생활양식 등 저의 많은 것을 정확히 꿰뚫으셨어요. 저 또한 관상을 5% 정도.. 볼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의 통찰력에 권위가 느껴지더군요. 해당 분야를 깊이 공부하신 분이라 판단했습니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분의 말투에서 조급함도 느껴졌어요. 저에 대해 이야기를 더 해주고 싶은데 길에 뻘쭘히 서서 얘기를 나누는 상황이다 보니 저를 오래 잡아두진 못할 것이라 생각하신 것 같아 보였어요. 하시던 말씀을 빨리 하려고 하시는 게 보였습니다. 조급하면서도 저를 분석하는 것에 익숙해지셨는데 저의 사주까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사주까지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자세히 파악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저도 이 정도의 감각과 직관을 가진 비범한 사람이 봐주는 제 사주가 궁금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도 사주를 볼 줄 아시기 때문에 제 사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충분히 들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도 다양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에 이 분께서 봐주시는 사주팔자 분석도 궁금했습니다.
“제가 마침 바로 앞 카페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와 있는 참이었습니다. 제 자리에서 편하게 보셔도 돼요.”
그분과 함께 있던 여학생도 그분의 통찰력을 알았던 것일까요. 그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상황을 흥미로워했습니다.
역시는 역시였어요. 사주도 잘 보시더군요. 저의 평소 생활양식, 삶이 흘러가는 분위기, 고유의 특성, 부모님의 특성, 해마다 다르게 들어오는 운수, 직업 적성, 그리고 요즘의 고민들과 앞으로 예측되는 불운수까지. 현재를 넘어서 확률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해서도 약간의 언질을 주셨습니다. 저는 사주를 여러 번 봤었고 무당에게 신점을 본 적도 있어요. 그들과 크게 차별점이 드러나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그분이 실력자임을 의미했죠.
그분이 여쭈우셨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건 없어요?"
없었습니다. 이런 비범한 사람에게 왜 그 이상을 묻지 않냐고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그분이 생각보다 저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저는 너무 구체적인 사주팔자 분석은 탐탁지 않아하기 때문입니다. 2년 전에 무당에게 신점을 보았을 때도 그렇고, 지금 이 분이 제 사주팔자를 봐주시는 상황에서도 그렇고, 저의 '운'에 관하여 공통적인 예상을 들었습니다. 2024~2025년이 그리 운이 잘 들어오는 해는 아니라고요. 실제로 제가 한 해의 분위기를 느낌적으로 느껴보기에도 비교적으로 올해에는 큰 운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더 구체적인 사항을 물어보는 것은 저의 부정적인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죠. 저는 부정적인 말을 굳이 듣고 싶지 않았어요. 알게 되면 의식하게 되니까요.
만약 그들이 초월적인 감각으로 느끼기에 저에게 심각한 일이 발생할 것 같다 싶었음 제가 묻기도 전에 충고해 주었을 겁니다. 그 정도가 아닌 사소한 정도의 부정적인 말이라면 사양할래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우리가 정말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순 없는 것처럼, 사람의 뇌엔 부정의 개념이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그 부정적인 키워드를 의식할 수밖에 없고, 사람의 삶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싶지 않았어요.
추가로, 구체적인 사주팔자 분석에는 흥미도 없습니다. 사주팔자가 제 삶의 필연적인 과정을 알려주는 절대적인 개념도 아닐뿐더러, 높은 확률로 그렇다고 한들 저에겐 위에서 설명된 마인드처럼, 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생각 먹기에 달려 있다)의 믿음이 논리적으로 잡혀 있기 때문이었죠.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마음가짐은 스스로의 삶에 분명한 영향을 미칩니다. 앞으로 일정한 확률로 일어날 일에 대해 목매는 것보다는 제가 당장에 직시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최선을 다하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이 '그분'의 눈에는 약간 안타까워 보였나 봅니다. 부정적인 것들을 떨치는 노력을 할 수 있는데도 굳이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부정적인 기운'을 너그러이 안고 가려는 태도를 보였으니까요. 여기에서 부정적인 기운은 명리학에서의 '*사주 살(殺)'을 의미합니다. 역마살, 도화살, 백호살, 화개살 등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겁니다. 긍정적인 개념의 살도 존재하고 부정적인 개념의 살도 존재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여러 살들 중에서 일부의 살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저에게도 안 좋은 살이 하나 있는데, 그분은 제가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훨씬 삶을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라 보시는 것 같습니다.
*살: 사람이나 생물·물건 등을 해치는 모진 기운. 그 예로 역마살, 도화살, 백호살, 화개살, 겁살 등이 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어요.
"대구의 팔공산 갓바위 가보셨나요? 그곳에 미륵보살이 있는데.. 꼭 한번 직접 가셔서 이름 태우고 오셔요. 안 좋은 살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을 거예요."
저에게 일체유심조의 믿음이 있는 것처럼, 그분에게도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주살과 같이 사람이 컨트롤할 수 없는 초월적인 개념이라도 믿음, 즉 종교의 힘으로 극복할 수는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저도 철학에 관심을 많은 사람으로서 평소에 영적인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철학 공부를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아직 종교, 조상의 카테고리까지는 사고를 확장한 단계가 아니라서 그분의 말씀이 덜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에요. 요즘의 저에겐 하나의 지조가 있습니다. 늘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느끼고, 진심으로 말하고, 진심으로 행동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저는 아직 종교와 조상의 개념까지 사고가 확장된 수준은 아닙니다.. 제가 지금 당장의 믿음과 소망을 보살에게 전한다 한들, 그것에는 저의 진심이 덜 담길 게 분명합니다. 진심이 아닌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라 여겨요. 때가 되면, 철학과 영적인 분야에 더 사고가 확장되어 그것을 이해하는 때가 되면, 그때 제가 한번 선생님께서 조언해 주신 걸 실천으로 옮겨보겠습니다."
이 말 또한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진심으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선호해요. 보살과 종교에 관해서는 아직 의미 부여가 덜 되었거든요. 하지만 이 답변 역시 그분을 답답하게 할 뿐이었죠. 저의 초연한 모습에 그분은 더 답답해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전하는 것도 때가 있어요. 내가 전하고 싶다고 전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죠. 대구의 앞산에도 작은 절이 있는데 그곳에 1년에 두어 번 민간인이 들어가 절을 하고 올 수 있는 시기가 있어요. 그곳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주면 좋을 거예요."
"그곳에는 1년에 두어 번밖에 가지 못하지만, 그 대신 앞산 앞에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 있어요. 그곳은 절 같이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의 공간은 아니에요. 그저 보살들의 큰 사진이 벽에 많이 붙어 있는 평범한 곳이죠. 일반인들이 팔공산의 갓바위나 앞산의 절에서 전하다 못한 마음을 마저 전하러 자주 방문하러 가는 곳이에요 ···"
아.. 저는 사실 여기서부터 조금씩 사이비 전도사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단순히 그분께서 종교에 대해 진심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사이비의 냄새를 맡은 게 아닙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이야기 밖에 있는 3자로서 상대의 속셈이 처음부터 뻔히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전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지금 읽고 계신 글도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고작 몇 문단에 요약해서 적힌 글이기도 하고요.
그분과 저의 대화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여기고 일찍이부터 그분을 사이비라고 판단한 사람은 '믿음'이라는 개념이 비현실적인 개념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저도 예전에는 믿음이라는 추상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은 개념을 참.. 싫어했었는데요. 하지만 양자역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져보니, 진짜로 세상이 결국은 의식과 믿음 아래에서밖에 정의될 수 없더라고요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샜는데요. 대화 주제만으로는 그분을 사이비 전도사라 정의 내리는 게 어쩌면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는 이분과의 대화가 너무 심도 있고 철학적으로 의미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제발.. 사이비 전도사가 아니길 바라며 한편으로는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심을 시작하기만 했다면 그 의심의 끝을 파악하는 건 저에게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보이스 피싱 사기이든 사이비 전도 사기이든 사기를 판별하는 척도는 존재하기 때문이죠. 저는 그 척도를 기준으로, 제발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분을 만난 순간부터 의심을 시작한 지금까지의 전반적인 타임라인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분은 묘하게 사기 판별 척도를 피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기꾼들의 공통적인 목적은 결국 '돈'이기 때문에,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결국 그 척도(돈에 대해 이야기하는)를 거쳐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역시나 '초고수'였습니다. 대화가 1시간은 족히 지난 시점에서야 살살씩 척도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한 빌드업에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기 판별 척도는 정말 간단합니다. 특히 사이비 종교는 이 쉬운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사적인 곳에 금전적인 비용이 드는가?"
본인이 사기를 안 당하고 싶다면 위의 말만 평생 기억하고 살면 됩니다. 초고수도 사기꾼인 이상,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 이 척도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초고수는 그 마지막을 정말 티 안 나고 자연스럽게 지나가기 위해 1시간이 넘도록 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뒤늦게라도 제가 초고수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봐버렸을 뿐이죠.
하수~ 중수 사이비 전도사들은 기껏해야 10분 안에 척도에 걸립니다. 누가 들어도 사이비인 걸 뻔히 알 만한 이야기들을 빠르게 꺼내죠. "커피 한 잔만 베풀어 주시겠어요?", "소정의 비용으로 조상에게 정성을 들여야만 해요." "···". 하지만 초고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관상, 사주팔자, 사주 살, 팔공산의 갓바위, 앞산의 절 등의 사적이지 않고 근본 있는 소재로 이야기를 오랫동안 끌고 갔습니다. 저로 하여금 "이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를 얻어내려 한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대화 분위기를 유도한 것이죠. 초고수가 너무나도 일상적인 대화를 유도한 탓에, 저도 한동안은 그 큰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초고수가 언급한 장소는 총 3가지가 있습니다.
A. 팔공산
B. 앞산
C. 앞산 앞의 어떤 곳
사주 살, 팔공산, 그리고 앞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초고수의 발언량이 늘어나는 걸 보고 이 사람은 조상과 신에 대해 진심이구나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이비 전도사들의 대화 주 소재인 '조상' 키워드가 드러나서 솔직히 0.1% 정도는 흠칫했었습니다. 하지만 팔공산의 갓바위, 앞산의 작은 절. 결코 사적인 이익과 연관되지 않은 키워드만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화가 1시간을 넘겼을 시점에, 그제야 처음으로 사적인 장소가 드러납니다. '앞산 앞의 어떤 곳'. 사적인 곳이면서 금전적이 비용(비용이 든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겠죠)이 들어가는 곳이죠.
제가 이때부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너무 좋은 대화를 했는데 결국 이 분이 초고수 전도사라는 걸 깨닫고 나서 많이 실망했거든요. 궁금한 게 생겨서 도무지 표정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직관과 통찰을 가진 분이, 도대체 왜 사이비 전도사의 일을 하고 계신 걸까.")
그분도 뛰어난 직관으로 저의 변한 심정을 단번에 눈치채셨습니다. 그때부터는 조금 더 직설적이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오늘 가야 의미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만남이 가벼운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뭐 이런 류의 말씀이었습니다. 무안하고 실망스러운 감정이 들었지만 지금까지의 심도 있던 대화를 떠올리며 끝까지 예의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제 진심은 변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와닿진 않는 상태라, 만일 오늘이 운명적인 기회의 날이었다고 해도 저는 이 운명적인 기회를 놓친 사람으로서 살아가겠습니다. 운명적인 기회를 놓친 것 또한 저의 능력이고 한계일 것이니까요.."
"좋은 말씀 정말 감사했습니다."
운명적인 만남은 참 인정합니다. 어떻게 하필 나를 알아보셨을까. 만만해 보이는 자태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만만해 보이진 않았지만 영적인 대화에 공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얼굴만 보고 알아차리신 걸까.
"정말 안 갈 거죠?"
"이만 가봅니다."
초고수도 사람이긴 사람인가 보다. 그토록 오래 본성을 숨기며 큰 그림을 그리느라 기가 많이 빠진 듯, 갑자기 얼굴이 엄청 피곤해 보였다. 내가 순순히 따라가지 않아 답답했던 감정을 많이 숨기고 계셨는 듯하다. 어쩌면 짜증이 날 법도.
결국 그들은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돌이켜 봤습니다. 제가 그분을 의심하기 전에도 그들이 사이비 종교 전도사인 단서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종교 전도사인 걸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인지하지 못할 단서이나, 알고 나면 쉽게 보일 단서들일 테죠.
그들이 '그들'이라는 단서를 흘린 순간
(1) 쫄따구(여학생)가 선생(그분)을 높이는 추임새를 넣음
: 카페로 들어가자고 내가 그분께 제안하여 앞으로의 긴 대화가 성사되었을 때, 쫄따구가 기분이 좋아서 뒤에서 작게 나보고 '진짜 계 타신 거예요~'고 표현했다. 그분이랑 대화하게 된 게 자신들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영광이라는 걸 가스라이팅하며 이 대화가 가치 있다고 느끼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심리다.
(2) 나의 부정적인 정보에 더 집중함
: 관상, 사주팔자, 손금 등 여러 단서를 통해 나의 정보에 대해 파악하는데, 유독 부정적인 정보에 초점을 맞추는 듯했다. 이것은 긍정적인 것을 말해 주며 좋겠다고 말해주는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말해주며 부정적인 것의 영향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의 중요성을 어필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그 노력으로 '정성'을 올리는 걸 자연스럽게 제안하기 위한 큰 그림인 셈이다. 만약 초고수가 사이비 종교 전도사가 아니라 나에게 진심이었다면, 나의 긍정적인 면에 더 집중했을 것이다. 그것이 참스승의 지혜다.
(3) 쫄따구가 스승(초고수)을 도우려 함
: 초고수와 이야기를 하다 마지막에 결국 정성을 들일 것이냐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됐다 (아무리 초고수여도 사기 판별 척도를 건너뛸 수는 없다). 하지만 순순히 응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자 초고수도 가만히 침착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감히 쫄따구가 먼저 초조함을 드러냈다. 쫄따구가 스승을 도와주기 위해 나에게 첨언을 했다. 근데 그것이 당연히 매우 어설펐다. 하수~ 중수 사이비 종교 전도사들이 할 법한 유치한 말이었다. 하지만 초고수의 권위 때문에 쫄따구의 어설픔이 약간 묻힌 탓에 내가 바로 의심하진 못했다. 나는 어설픈 쫄따구에게 종교가 있냐고 진심으로 물었었다. 어설픈 쫄따구는 내가 그들을 의심하는 줄 알고 스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은 불교도 믿고, 스승의 말도 믿는다며 전적으로 스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더 어설펐다. 이렇게 어설픈 쫄따구를 관찰하며 단서를 찾아야 한다.
(4) 안타까워 답답해하지 않고 진짜 답답해서 답답해함
: 초고수가 나의 부정적인 살과 운에 대해 이야기해도 내가 초연한 태도를 보이자 초고수는 답답해했다. 그 답답함에서 두 가지의 답답함이 보였다. 내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쉬운 방향을 택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답답해하는 마음과, 왜인진 모르겠으나 (그땐 초고수인 줄 몰랐음) 진짜 '그냥' 답답해서 답답해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당시에 초고수가 답답해하는 이유를 몰랐으니 '그냥'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면 내가 순순히 제안에 응하지 않아서 답답해한 것이겠다. 후자의 답답함은 나를 진심으로 위하지 않을 때 느낄 수 있는 답답함이다. 참스승이라면 나를 위하지만, 사기꾼은 나를 위하지 않는다. 명심하자.
(5) 나에게 다가온 첫 이유를 까먹음
: 정말 길을 묻기 위해 나에게 접근했다면, 긴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발을 향해야 했다. 그러나 나와 긴 대화가 있고 난 뒤, 그들의 발은 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것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그들이 '그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초고수에 의해 사기를 당하는 맥락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길거리 스몰 토크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자연스러워 그들이 '그들'인 줄도 인지하지 못하는 채 이상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고, 나의 관상과 초고수의 촉이 근거가 된 초고수의 통찰에 나 자신이 정확히 꿰뚫리게 되며, 점점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조언에 따라 조상에게 예우를 갖추는 기회를 맞이하러 그들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도 길거리에서 초고수를 만나 자신에 대해 꿰뚫리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겁도 먹지 마세요. 제 주변에서 사이비 종교 전도사에게 홀리어 금전적인 비용을 들여 정성을 들이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그들과 동행한 이유가 일치했습니다.
"무서워서."
정성을 들이는 행위 자체가 안 의심스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무섭고 두려웠다고 하더군요.
제가 뭐가 되는 건 아니지만..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부정적인 사주 살과 부정적인 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눈에 명확히 보이는 개념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으로 상대하면 됩니다. 그것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가 들 수 있는 무기는 '믿음'입니다. 안 좋은 기운이 내 삶을 방해할 거라는 운이 있다면, 나는 내 삶이 온전히 내가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그 안 좋은 운을 상대하면 됩니다.
운과 사주 살이라는 게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의 개념은 아니지만, 마음가짐에 따라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짧지 않았던 본인의 삶을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안 좋은 일이 있었고 그것이 부정적인 사주 살과 부정적인 운에 의한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그냥'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와도 전혀 지장이 없었고요. 앞으로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안 좋은 일들을 경험하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것에다가 '부정적인 운', '부정적인 사주 살'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버리지 마세요. 괜히 더 의식하게 될 거예요. 불행은 내 삶에 자연스러운 겁니다. 불행이 아예 없는 삶이 오히려 부자연스럽죠. 그 자연스러운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맙시다.
긍정적인 것에 의미 부여하고, 긍정적인 것을 생각하고, 긍정적인 것을 느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느껴지는 것에 따라 행동하면 됩니다. 그것이 제가 여러분들께 말하고 싶은 긍정적인 삶을 사는 방식입니다. 부디 좋은 삶을 꾸려나가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생각과 마음에 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 0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