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일기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서 여느 때처럼 바로 글을 쓰러 왔다.
나는 진짜 자부할 정도로 감정 컨트롤 고수였고, 감정 변동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열정이 넘치는 운동을 같이 하거나, 더 노골적인 모습이 나오는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내면이 고요해 보인다 말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내면이 울긋불긋하다. 어쩌면 내면이 늘 고요했던 과거의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걸까. 왜 요즘은 가끔 감정 조절이 어려울까? 환경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오늘도 화가 났고, 침착하는 데 20분씩이나 걸렸다. 조금 침착해진 후 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더 침착해지고 싶다. 더 생각 정리를 하고 싶다.
요즘의 내가 감정 조절이 어렵다는 걸 더 정확히 표현하면, 요즘의 나는 감정 조절이 '빨리'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조절이 되지만, 빨리 되지 않는다. 꽤 오래 짜증 난 상태로 있는 나 자산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격분된 감정을 빠르게 조절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절대적인 하나의 이유보다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이유를 생각해 봤다. 두 가지 이유를 의심 중이다.
첫 번째 이유는, 비교적으로 줄어든 자기 세뇌량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그런 척을 하라'는 말을 매우 신뢰한다. 단순한 동기 부여 이상의 과학적 논리가 담긴 말이기에 많이 적용한다. 성인이 되고 난 직후부터 자주 자기 세뇌한 말 중 하나가 "나는 화가 적은 사람이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너그럽고, 화가 적고, 작고 큰 사건들에 감정이 크게 동요되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런 사람인 '척' 노력을 많이 했다. 화가 적은 사람이 할 법한 생각과 행동을 따라 했다. 그리곤 그 언행이 나에게 스며들길 바랐다.
자기 세뇌를 오래 지속한 결과, 나는 비교적으로 화가 적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너그러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화가 줄어든 덕분에 삶 자체가 평온하게 흘러갔다. 느낌적으로 삶 자체가 평온하게 흘러간 기간은 3년 정도였던 것 같다.
근데 3년이 지나고 난 지금, 이전까지 잘 스며들어 있던 '화가 적고 너그러운 사람의 정체성'이 조금씩 말라가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 정체성을 다시 인위적으로 불어넣어야 할 쿨타임이 돌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서 이 스킬을 다시 사용해야지..
두 번째 이유는, 짜증이 날 확률이 적은 환경에 익숙해져서 심적으로 나약해진 탓인 것 같다. 내 삶은 대체로 독립적이면서 자유롭다. 내 삶의 방향성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고, 혼자 무언가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내 생활환경을 조성할 때도, 나에게 짜증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을 제거했다.
나는 이게 똑똑하게 환경을 조성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조금 의심하고 있다. 짜증이 적은 환경 덕분에 삶 자체가 평온하게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편하기만 한 환경에 익숙해져서 작은 사건에도 타격을 입게 되는 것 같다. 때로는 내 삶의 곳곳에 약간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끼어 있어야, 부정적인 자극들로부터 무디어질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부정적인 자극들을 피하려만 한 삶을 살아가다 보니, 짜증이 나는 감정의 역치가 낮아진 듯하다. 작은 자극에도 예민해지고 있다.
평온하기만 한 삶이 순간적으로는 만족스러웠지만, 부정적인 자극에 쉽게 피해를 입고 감정 회복 탄력성이 약해지는 기분이다. 음.. 이건 좀 싫다. 미래를 예상해 봤을 때 더 편한 삶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더 살아 봤자 불편하게 살 날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약해지면 안 된다. 부정적인 감정에 무뎌져야 한다. 지금의 독립적인 생활양식을 어느 정도 무너뜨려야겠다.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과 더 많이 교류하고 부정적인 자극 자체에 익숙해져야겠다.
생각이 짧은 주변 사람 때문에 짜증 나서 대화를 피하고,
나만의 세상이 온전히 보장되는 환경에 중독되지 말고,
부정적인 영향을 뿜는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경계하지 말자.
편하기만 한 삶을 의심하자. 그리고 부정적인 자극에 적당히 직면하고, 적당히 느끼고, 적당히 극복해 보자. 후퇴만 하지는 말자. 레벨업해야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자기 세뇌. 모든 감정의 원인은 생각이다. 생각의 원인은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다.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화가 적고 너그러운 사람'의 정체성을 주입시키자.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유 있는 사람은 화가 적고 너그럽다. 그들은 결코 빌런을 보고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그저 너그러이 귀엽게 받아들이거나, 때로는 가진 걸 잃을 줄도 아는 용기가 있다.
감정이 '빨리' 해소되든 안 되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결코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 약간 감정이 태도로 드러났다. 매우 안 좋다. 그것만은 절대 피하자.
(2024. 02.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