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철학
1. 니체의 동정
동정은 마음을 함께한다는 뜻.
만약 상대와 함께 괴로워한다면 그 동정은 누구를 위한 마음인가? 니체는 그것이 타인을 위한 마음이 아니라나를 위한 마음이라 말한다.
동물 학대에 대한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동물이 겪는 고통에 공감하여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학대받는 동물을 바라보며 느끼는 '나(ego)의 고통'이 싫은 것.
동정은 나의 고통. 동정이 커지면 세상이 괴로워진다. 삶의 의욕과 힘을 빼앗아간다. 끊임없이 슬퍼하고, 우울하며, 분노하게 될 테니..
니체는 동정하지 말라 말한다. 누군가를 동정한다면 상대를 괴로운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
위대한 사랑만이 동정을 뛰어넘을 수 있다. 누군가를 고통에서 구원해 주고 싶다면 상대를 사랑해야 한다. 마치 자식에게 회초리를 때리는 엄마처럼.
엄마는 동정에 굴복하지 않고 '잘못됨'을 알려주기 위해 매를 든다. 만약 동정했다면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안주하게 된다.
회초리를 맞는 자식보다 아픈 건 엄마의 마음이다.
2. 힘에의 의지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의지란 '삶에의 의지'.
모든 것에 의욕이 없어도 인간은 그냥 산다. 개별 행위의 목적, 예를 들어 배고픔을 해소하려는 마음은 존재하지만 '왜 배고픔을 해소시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없다.
그냥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삶에의 의지.
하지만 니체는 우리가 이미 삶을 가졌는데, 삶에의 의지를 바랄 리 없다 말한다.
인간은 '힘에의 의지'를 갈망하며 상승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힘을 '권력'으로 받아들이고서는 니체는 나치즘이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힘에 대한 정의에 신중해야 한다.
니체에게 힘이란 광범위한 개념.
생명, 성장, 상승, 지배 ···
극복하려 하지 않는 사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힘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며 추한 인간(니체의 글에서 자주 표현되는 말)이다.
극복하려는 사람은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힘에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자 아름다운(나다운) 인간이다.
힘의 느낌은 추한 것과 함께 사라지며, 아름다움과 상승한다.
3. 초인, 위버멘쉬 (Übermensch)
초인은 스스로를 경멸하며 그것을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는다. 그러나 말종 인간은 더 이상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으면, 나아감(힘에의 의지)과 발전은 없다. 고로 추해진 인간이다.
'낙타 - 사자 - 아이(초인)' 비유가 있다.
낙타는 반항하지 않고 창조하지도 않는다.
사자는 반항하지만 창조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창조한다.
절대적인 '삶의 목표'를 좇고, 절대적인 '가치와 의미'를 좇기보다는 (= 반항 x)
자신이 정한 삶의 목표를 성정하고, 자신이 모든 것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 반항 o)
무엇으로부터 반항해야 하는가?
"너는 해야 한다" 로부터.
아기는 늘 말한다. "나는 원한다"
자유로운 정신이 된 초인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다. 비로소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가 되며 창조 이후 최초의 움직임이 된다.
4. 신은 죽었다
차라투스트라 왈,
선·악 이원론은 잘못되었다.
전통 이원론은
대지 - 악 - 현상 - 생성(변화) vs
천상 - 선 - 실재 - 불변
기독교 교리는 하늘이 진리의 세계이며 대지는 고통 가득한 허위의 세계라 주장한다.
이러한 세계관을 비판하는 차라투스트라.
대지가 곧 인간이 살아가는 근거이자 토대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불변하는 피안을 좇으면 안 된다.
만약 변하는 모든 진리 사이에서 하나를 특정하고 그것만을 불변할 진리로 강요한다면 형이상학적 폭력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몰락(니체 표현)해야 한다.
(= 기존의 도덕 관습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
대지를 긍정하기 위한 몰락이 필요하다.
힘에의 의지는 남을 이기고자 하는 본성이지만
그것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우리(전통 이원론).
그것은
약자가 도덕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자기 노력에 대한 계기를 없애버린다.
대지(현실)를 부정하지 말고, 힘에의 의지에 충실해야 한다. 내 본성에 솔직하고 가치를 창조하여 대지에서 극복하라.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니
변화하는 진리 사이에서 진리에의 의지, 즉 진리를 창조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러한 태도를 가진 비천하지 않는 자를 위버멘쉬라 부른다.
신에 의지한 채 노예 도덕에 기대어 살아가는 비천한 자가 되지 말고
위버멘쉬가 되어라.
5. 영원회귀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된 진리란 없으며
영혼 또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시기에 따라 변화한다.
영원 회귀는
영원한 변화.
하지만 이는 일부를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영원 반복이라기 보다
영원 '지속'이라고 여기자. (더 긍정 뉘앙스)
영원 회귀를 강하게 긍정하고
지속되는 삶에 나의 용감한 의지를 개입시킬 것.
원의 형태로 몸이 꼬인 뱀이 사람의 목구멍에 박힌 그림이 있다.
영원회귀의 허무주의에 질식당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뱀에 질식당하지 말고, 나의 의지로 물어뜯어
반복이 아닌 새로움을 생성(창조) 하며 살아갈 것.
새로운 창조란.. 아마 의지를 느끼고 주도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