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언니가 되었지만...
드디어 태어난 동생을 만나러 동생과 엄마가 머물고 있던 이모네 집으로 가면서 나는 굉장히 신이 났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제일 먼저 달려가 벨을 눌렀다.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사촌오빠의 작은 방 침대에 아기가 눕혀져 있었다. 동생과의 만남의 순간은 세월로 인해 많이 흐릿해졌지만 여전히 기억나는 것은 동생이 이미 머리카락이 거의 다 난 상태여서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것, 얼굴이 울긋불긋한 상태였다는 것, 무엇보다 생각보다 너무나 거대한 아기였다는 것이다.
나의 예측을 크게 벗어난 아기에게 당황한 한편으로 나는 나의 놀이친구가 되어줄 이 아기가 어서 일어나길 바랐지만, 아기의 닫힌 눈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급기야 어른들 몰래 볼을 꼬집고 늘어뜨리다보니 아기는 칭얼대기 시작했고 나는 깜짝 놀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방으로 도망갔다. 가물한 기억 속에서 동생을 목욕시키던 외할머니의 모습, 목욕을 하다말고 방바닥에 오줌을 싸던 동생의 모습이 생각난다. 지금 떠올려보면 왠지 몽글몽글해서 서글프게 느껴지는 과거의 기억들.
그렇게 나의 언니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6년의 시간동안은 나름 외동딸의 특수성이라도 일부 누렸지만, 이제는 그저 첫째로서 의젓하게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하는 언니가 된 것이다. 어린 동생과 함께 외가에 머물던 때 우리는 나름으로 행복했던 것 같다. 입만 열면 침을 질질 흘리던 아기는 항상 턱받이 손수건을 매달고 보행기를 타고 좁은 거실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고,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어느날엔가 동생만 부모님의 집에 데리고 간다고 하여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방에서 울고 있는데, 현관에서 동생이 떼를 쓰고 우는 바람에 그냥 외가에 함께 남게 되었던 날, 잠자리 이불을 펴고 있는 외할아버지 옆에서 그 이불 위에서 방방 뛰던 우리들. 흐릿한 기억들은 바래진 사진처럼 그렇게 남아있다.
부모님과 한 집에 살고나서부터, 우리의 불행한 어린 시절들이 느릿느릿 지나갔던 그 나날들은 어쩐지 흐릿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잊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힘들었던 것보다 조금이라도 좋았던 것만 기억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억으로 산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느끼는 것 같다. 우리는 자주 함께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고 또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우리의 좋을 한 때를 소망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함께 하고 있듯이 당연스럽게 미래에도 우리 자매가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 친구들에게서도 동생이나 손위 형제와의 친밀도가 그리 높은 경우를 보지 못했고, 우리처럼 자매가 항상 붙어다니고 영혼의 단짝 수준으로 가깝게 지내는 것은 흔치 않은 것 같다. 사실 나는 동생이 아직도 마냥 어리게 보일 때가 많고 동생을 거의 업어키워왔다고 자부하기에 심지어 자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가깝고 서로의 존재를 필수불가결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힘들었던 날들을 함께 버텨왔고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우리는 세상의 온갖 어려움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어려운 마음과도 싸우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다리를 포개고 누워 핸드폰을 두드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나는 참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동생이 소중하다. 내가 언니라는 사실이 소중하다. 내가 누구인가를 말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정체성, 그것이 언니라는 정체성이기에 나는 그것을 적어내려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