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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ug 25. 2022

헤어질 결심 (2022)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예감

이제 와서 '헤어질 결심'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게 조금은 웃긴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오는 영화라, 또 비가 오는 날이라, 말러가 생각나는 날이라, 그래서 오늘은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사랑에 참 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 이야기에도 약해요. 사랑이었다고 믿는 모든 이들이 애틋하고 슬프죠. 얼마 전까지는 지난 사랑들을 제대로 놓아주지 못했어요. 전부 내가 죽는 날까지 지속될, 비록 헤어졌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닌 일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절대로 헤어질 수 없는 것. 죽는 날까지, 한 명이 죽어서도, 우리 둘 다 죽는 그날까지 절대로 끝을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죠. 사랑에 약한 만큼 헤어짐에는 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질 결심을 했다면 그게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웠을까.

지나치게 사랑하고 헤어지는 걸 무서워하는 제게 '헤어질 결심'이라는 제목이 얼마나 혼돈이었겠어요. 서래에게도 그랬겠죠. 많은 순간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 이입합니다. 종종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기에 그들, 배우들의 외모가 지나치게 예쁘거나 잘생겨서 부끄러울 때지만, 실은 그 또한 영화미학이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탕웨이를 생각하니 부끄러워져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

서래는요, 저는 확신해요. 해준과 함께 요리를 했던 때, 장난치며 사진을 떼던 일, 절에 놀러 간 일, 그 얼마 안 되는 순간들로 평생을 살 것이었거든요. 비극 아닌가요? 비슷한 경험이 있는 저는, 그리고 아마 여러분도 알 거예요. 얼마 안 되는 기억들을 곱씹으며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고통, 지난한 날들 속에서 내가 여전히 웃는 건 그 시간들인데 그게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 나는 너로 인해 이토록 괴로운데 너도 나 때문에 괴로울까? 넌, 넌 나를 전부 잊고 다시 네 일상으로 돌아갔겠지.

병든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하지만 해준도 마냥 행복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아니, 행복보다는 불행했죠. 서래와 헤어진 후 그의 일상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럼에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서래는 사랑으로 불타고 있고, 해준은 차갑게 식어버린 걸요. 서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에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지만, 우아한 해준은 모든 게 정상이기에 무엇도 포기할 수 없어요.

이 영화가 얼마나 미학적으로 완벽한지는 굳이 제가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영화학도들의 성서랄까요. 하하. 이런 영화들을 볼 때면 영화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정교하고 성실해야 하는지 깨닫게 돼요. 예술가의 가장 큰 미덕은 성실함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죠.

이주임으로 유태오 배우가 출연한 것만 해도 저는 감독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났다고 생각했거든요. 서래와 비슷하지 않아요?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는, 어떤 경계에 있는 그런 느낌. 이상하게 대척점에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말러의 음악은 말보다는 들어보는 게 훨씬 좋은데, 특히 정명훈 지휘자가 지휘한 NHK의 버전이 좋아요. 정명훈 지휘자와 서울시향의 음반도 좋지만, 저는 NHK 버전이 더 좋았어요. 영화를 다 보고 시간이 아주 약간 흐른 뒤 말러의 음악을 들으면 꼭 거대한 사랑이 밀려오는 기분이 들어요. 마치 바다처럼, 그리고 모래처럼 스러지는 사랑이 참 거대해요.

죽어서라도 기억되고 싶은 사랑, 뭔지 알아요. 서래가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고 하잖아요.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니 미결 사건이 되었죠. 죽으면 언젠가는 잊혀요. 그리고 이건 또 개인적이지만, 한 때 저도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싶어서 죽는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 생각의 끝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파할까, 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미결 사건은 두 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해준이 살아있는 한 그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를 너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해준은 죽지 않을 거예요. 지난 사랑 때문에 죽을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게 바로 서래가 그를 사랑한 이유죠. 대신 해준은 영원히 서래를 잊지 못할 거예요. 사는 내내 사라진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겠지만 그건 결국 결심으로만 끝나겠죠. 서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라진 건 헤어진 게 아녜요. 헤어지는 게 헤어지는 거지, 사라지는 건 기억되는 거고, 그건 결심일 뿐이죠. 이렇게나 모두를 아프게 하는 결심이 또 있을까요?

이곳에 저를 아는 사람은 없어요. 많은 사람이 보는 곳도 아니죠. 그래서 자유롭게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 같아요. 전 정안처럼 살고 싶지만, 서래처럼 사랑받고 싶어요. 해준에게요. 반듯하고 착실한 약간은 재미없는 그런 남자에게요. 그리고 재미없게 사랑하고 싶어요. 헤어질 결심은 안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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