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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Nov 13. 2023

스스로를 파괴했던 언어습관

  나는 긍정의 언어보다는 부정의 언어, 낙관의 언어보다는 비관의 언어, 생명의 언어보다는 파괴의 언어에 익숙하다. 자신을 부정하고 미래를 비관하며 삶의 고귀함을 회의하는 게 나에겐 무척 자연스럽다. 그래서 생각이 부정적인 방향을 향해 있는 경우가 많다. 삶이 번거롭거나 미래가 비관적으로 그려지면 “가볍게”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게 가장 본질적인 해결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육신에 집약되어 있으니,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나에겐 하나의 구원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삶에 대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느낄 때마다 그게 비록 사소할지라도, 육신의 쇠사슬을 벗어나는 극단의 행동, 그 이후를 상상했다. 죽음을 앞당겨 생각함으로써 삶을 초월하는 영원한 평화를 꿈꿨던 것이다.

  부정으로 가득한 정신세계는 단순히 머릿속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구체적인 단어 하나하나로 엮여 그대로 말로 나왔다. 그중 단연 최악은 ‘내 삶의 끝은 자살일 것 같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술이 거하게 취했을 때만 내뱉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는 이것도 익숙해졌는지 맨 정신에도 자연스럽게 나왔고, 사용 빈도가 높은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자극적인 음식에 절여지면 음식의 자극성에 둔감해지는 것처럼, 극단적인 표현을 남용하면 표현의 극단성에 둔감해진다. 그래서 나는 파멸의 언어를 남용하면서, 부정적인 사고 회로가 더 우울한 방향으로 협소해지고 굳어졌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사고가 삶을 얼마나 위태롭고 불행하게 만드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킴으로써 이를 정당화했다. 세상에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가치관이 존재할 뿐, 틀린 것은 없다는 태도였다. 물론 나는 아직도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태도, 즉 불가지론을 견지하고 있다. 다만 이제는, 파멸과 불행을 낳는 가치관이 “다름”이라는 명분으로 존립 근거를 내세우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회의하는 것뿐이다. 어쨌든 나는 가치의 상대화를 통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전체를 관통하는 단일한 진리는 없다. 오로지 개개의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는 상대적 진리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도덕, 윤리, 가치관은 시대 상황과 사회 분위기에 따라 좌우된다. 도덕, 윤리, 가치관은 철저하게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끊임없이 변형되고 조작된다. 자살에 대한 도덕적 힐난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학습된 윤리일 뿐이다. 앞으로 세계 인구의 가파른 증가가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된다면, 국가 단위로 자살긍정론이 유포될 것이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다양한 논리가 뒷받침될 것이다. 순진한 열정의 대중은 그에 홀딱 넘어갈 것이고, 그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가 허용되고, 권장될 것이다. 여기에 생명 윤리나 인권 따위의 개념은 없다. 그저 필요에 따라 도덕이 변형된 것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장단을 맞췄을 뿐이다. 그런 세상이 오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지금만큼 안타깝게 여겨지진 않을 것이다. 도덕이 선행하고 사회가 그에 맞춰 돌아가는 게 아니다. <동물농장>의 돼지 권력자들이 그런 것처럼, 도덕과 원칙은 임의적으로 필요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는 말은 필요 없다. 사실이 그렇고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애당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가장 낫다, 고 니체는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유명한 말, 지금 독약을 마시고 죽는 내가 불행할지, 남은 생을 마무리할 당신들이 불행할지, 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면서 우울증을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메웠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음을 앞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4시,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 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앞으로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시작으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결론에 금세 이르렀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는 건 아니지만,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면, 빠지기가 무섭게 다다랐던 결론은 언제나 자살이었다. 그리고는 죽음의 초월성을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몸통을 외로 돌렸다. 늦은 새벽이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문득, 지금 문을 열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생각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리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렇게 가다가는, 문밖을 나가 극단의 행동을 하는 날이 언젠가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껏 수시로 죽음을 향유했다. 근원의 육신을 버리는 죽음의 초월성, 영겁의 시간 끝에 우주로 되돌아가는 자연의 신성함을 음미했다. 그럴 때마다 죽는다는 것의 신비로움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무한으로 긍정했다. 그러면서도 실제 자살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우울감을 크게 느끼지 않고, 지인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가랑비에 옷 젖듯,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자살이 현실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날에 이르렀다.

  진지하게 나의 상태에 대해 면면히 들여다보았다. 몸을 일으켜 침대 모서리에 걸쳐 앉았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자살의 코너로 내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발자국 남지 않은 위태로운 상태가 현 상황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나는 진정으로 죽고 싶은가? 곱씹은 결과,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도망치고 싶었다. 앞으로의 삶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도피의 욕구가 치솟았다. 그 결과 습관처럼 죽음을 앞당겨 생각하고, 자살에 대한 긍정의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삶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면 그것을 어떻게 키울지를 생각해야지, 왜 죽을 생각에만 사로잡혔을까. 문득, 지난 몇 년간 사고의 부정 회로가 낯설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온갖 매캐한 유독 가스가 머릿속에 뿌옇게 가득찬 것만 같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쳐보기도 전에 도망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았다. 생명의 욕구가 솟구쳤다.

  몇 년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삶. 다시 회복하려면 집요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내 의지로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갑자기 ‘말하는 대로’라는 말이 떠오른다. 말하는 대로 살다 보니, 인생이 이렇게 흘러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말하는 대로 흘러가니, 말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던 어른들의 말이 떠오른다. 그들은 항상 말이 가지는 위험성을 경고했는데, 이제야 그걸 몸소 깨닫는다.

  망가진 언어습관부터 교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간 형성된 부정적인 사고 회로를 곧바로 바꿀 순 없다. 그렇지만 내뱉는 말은 의지만 있다면 곧바로 바꿀 수 있다. 번뜩이는 은빛 언어를 칼로 삼아 너무 오랫동안 자해했다. 삶의 끝은 자살이니 뭐니 하는 지긋지긋한 자멸의 언어는 이제 근절하고 싶다. 대신 그 자리에 생명의 언어, 긍정의 말로 가득 채우고 싶다. 이제라도 언어를 지혜롭게 활용해 망가진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학적인 언어습관은 뿌리째 뽑아버리고 조금은 오글거릴지라도, 메마른 식물에 햇볕을 쬔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생명의 언어, 긍정의 말을 나에게 건네야겠다.

  다시 침대에 도로 눕는다. 피폐해진 영혼에 언어의 생명수를 조심스레 부워본다.

  말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가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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