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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Feb 22. 2024

잠들기 전, 하면 안 되는 생각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이 생각이 드는 순간, 쉽게 잠이 드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온몸 구석구석에 쌓인 하루 간 피로는 휘몰아치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자리를 내주고 모습을 감춘다. 푹신한 침대에 축 처져있던 신경은 각성되고, 기대했던 취침 시간은 요원해진다. ‘오늘 정말 피곤하다. 누우면 바로 자 버릴 것 같다’고 자신해도, 느닷없는 생각의 습격을 받게 되면, 괴로움에 뒤척이다 제때의 잠을 놓친다. 이것은 의지에 따른 현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습격이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다 자기 전 불쑥 등장해 나를 괴롭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의사와 무관한지라 억울하기까지 하다.

 생각이란 것은 보통 “하는” 것보단 “드는” 경우가 더 많다. 생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지만, 생각은 노력이나 의지의 개입 없이 가만히 있다가 불쑥 머릿속에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찾아오는 생각은 일상에서 감각한 나의 모호한 느낌에 기반한다. 모호하게 감각한 느낌을 뇌에서 재해석하고 무의식에 저장하는 것이다. 무의식에 저장된 것은 생각의 형태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기습한다. 생각의 단초만 주어지면 생각의 꼬리는 뫼비우스 띠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고, 생각의 흐름은 어느새 나에게 와 있다. 그 기류를 거스르긴 힘들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잠들기 전 미래를 비관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브레이크 없는 차에 탄 운전자와 비슷한 처지가 된다. 질주하는 차에 손쓸 방도가 없는 운전자처럼, 쏟아지는 생각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조약돌 같은 작은 생각 하나가 의식의 저변에 균열을 일으켜 잠자고 있던 모든 생각을 일깨우고, 그것은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내게 돌격해 온다. 수면을 준비하던 모든 신경은 각성되고 신체 리듬은 단박에 뒤바뀐다. 이 상황에도 꿋꿋이 자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무의미한 저항에 불과하다. 잘 수도 없을뿐더러 신체 리듬의 주도권은 이미 빼앗겼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내고, 그것은 뛰기 싫은 나를 억지로 잡아 뛰게 만든다. 이것에 대해, 저것에 대해 생각하라며 길을 내주고 골머리를 싸게 만든다. 이럴 때는 의식의 채널을 완전히 뒤바꾸는 다른 활동을 하던가 (이왕이면 독서와 같은), 아니면 생각이 불러일으킨 격렬한 소요 속에서 치열하게 사색해야 한다. 뭐가 더 낫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두 경우 다 에너지가 바닥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고민은, 말 그대로 막연한 것이라서 골똘히 생각해 봐야 뚜렷한 결론도 안 나오고, 할수록 머리만 아파지는 경우가 많다. 애당초 고민 자체가 두리뭉실한데 어떻게 뚜렷한 결론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래서 미래에 대한 고민은 대체로 막연한 걱정에 가까우며 어떤 긍정적인 것도 생산해내지 않고 아까운 정력만 소모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을 낮에는 안다. 낮에는 뚜렷한 지각이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찾아와도 이 일련의 내장된 메커니즘을 되뇌어 그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는 언제나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고, 조금만 더 치열하게 살자’는 예정된 결론을 확인하고 넘어갈 뿐이다. 뒤끝 없는 깔끔한 전개다. 그렇지만 밤에는 그렇지 않다. 밤의 세계는 감정과 충동이 이성을 무력화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디오니소스가 다스리는 세계다. 합리성은 힘을 잃고, '아는 것이 힘이다'는 경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중구난방의 무의식이 꿈틀대고, 질서 정연한 낮과는 상반된 질서가 펼쳐진다.

 어떤 생각의 스파크로 의식의 두꺼비집이 틱, 하고 올라갈 때, 의식의 채널은 완전히 전환되고 평소 보이지 않던 어두운 생각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취침시간은 예정 없이 연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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