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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의 하루

by 자유인

12월 3일 오후 10시 25분, 윤석열은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계엄령? 머리가 멍했다. 뭉크의 초현실주의 그림 <절규>의 해골바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초현실은 현실의 결과였고, 모든 언론에서는 무장한 군인이 국회의사당을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야당 당대표와 의원들은 담을 넘어 국회로 진입을 시도했고, 다른 당의 몇몇 의원들은 계엄군과 대치하며 고성을 지르며 실랑이를 벌였다. 방탄복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은 삽시간에 서울 시내를 활보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그에 저항하는 시민들과 시끄러운 충돌을 벌였다. 이 모든 일은 정신 차릴 새 없이 한순간에 벌어졌다.

지지율 20퍼센트 윤석열은 뭘 믿고 계엄령을 선포했을까. 윤석열은 이재명과 접전을 벌이며 아슬하게 높은 득표율(0.75%)을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의 절반은 윤석열, 나머지 절반은 이재명을 지지한 것이다. 윤석열은 무속의 힘인지 손바닥에 왕(王)을 쓰고도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집권 후, 낮은 경제 성장률, 고물가·고환율, 균형재정 적자와 꾸준히 하락하는 코스닥 지수 등 거의 모든 경제 부문 지표는 윤석열 손에 낙점한 경제 성적표를 쥐어줬다. 세계 다른 선진국들이 경제 성장의 조짐을 보이고, 주식 시장 호황을 맞고 있는 것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R&D예산 삭감과 급격한 의대 정원 확충은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일상의 영역에서 피해를 키웠다. 김대남, 명태균, 김건희의 유출된 녹취록에는 윤석열 부부의 냄새나는 정치질이 고스란히 담겨 민주질서의 근간이 흔들이고 있는 것이 폭로되었다. 야당 당대표를 비롯해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의 정치 생명을 끊기 위해 사법권을 칼로 삼아 휘두르고, 국민의힘 당정에 개입했으며,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자신의 가족을 조사하는 모든 입법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윤석열의 빛나는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하루 종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결과, 윤석열은 임기가 시작된 지 몇 개월 채 되지 않아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더니 20퍼센트로 추락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거기에서 헤어 나온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일베 논리에 세뇌당한 젊은 층 남자, 박정희 초상화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노인네, 십자가를 몸에 두르고 광장을 배회하는 광신도 정도가 윤석열 지지층의 구성원이었다. 윤석열은 이런 든든한 지원군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 자신이 사회 구석구석 음지에서 활동하는 20퍼센트만을 위한 영웅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집권 이후, 자신은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국민만을 바라보고 오로지 국가 이익을 위해 복무했다. 그런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진정성을 알아주지 못하는 국민은 분명 반국가세력에 세뇌당한 것이다. 윤석열은 낮은 지지율의 배후에 민주당의 비열한 정치 공작, 가짜뉴스를 퍼뜨린 모든 좌파 매체, 종북세력이 있다고 믿었다. 순진한 국민들이 이들에게 선동되어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대국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국민들의 왜곡된 의식을 바로잡고, 공산 전체주의 세력을 척결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최후의 권한, 비상 계엄령을 발동해야 한다. 총칼을 휘둘러서라도 한국에 서식하는 온갖 잡사상을 박멸하고, 국가 전체를 다시 개조해야 한다. 무너진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윤석열의 계엄령 의도가 대강 이랬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렇지만 창대했던 시작은 2시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국회 재석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계엄령 선포 무효를 가결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민주당에 대해 언급했다. 민주당은 정부 정책에 협조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발목을 잡으니, 국가발전에 해가 되고 반국가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민주당은 정부 관료에 대해 끊임없이 탄핵 소추를 하고, 정부 사업의 예산 확보에 지나치게 제동을 건다는 것이다. 윤석열 말대로 실제로 민주당은 지나치게 윤석열 발목을 잡은 감이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비상계엄령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범위 내에서 합법적 절차에 따라 가지고 있는 권한을 행사했을 뿐이다. 마치 윤석열 본인도 대통령의 권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20번이나 넘게 발동한 것처럼. 그렇지만 그에 대해 야당과 협치를 안 한다는 비판만 있었지 어느 누구도 그것이 불법, 반국가적 행보라고는 하지 않았다.

윤석열이 말하는 반국가세력은 민주당을 포함해 윤석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으로 풀이된다. 그렇지만 자신의 콘크리트 지지층 20퍼센트를 제외하고, 무당층을 제외하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윤석열에 반대하는 사람은 국민 절반이 넘는다. 국회의원 의석만 봐도 국회의원 전체 300석 중 민주당이 차지하는 의석은 180석 이상으로 절반이 훌쩍 넘는다. 반국가세력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던 야심은 그 시작부터가 이미 국민 다수를 반국가세력으로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다.

윤석열에게는 독재자와 종교인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가 궁극적이고도 유일하다는 확고한 신념(종교인)과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무력으로 다스려야 직성이 풀리는 폭력적 기질(독재자)이 함께 있는 것이다. 정교분리가 원칙인 사회에, 정교일치의 피가 흐르는 통치자가 출현했을 때의 비극이 오늘날의 사태다. 그렇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윤석열은 그닥 지능이 높지 않다.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계엄령을 발동하는데, 치밀한 사전 계획 없이 일을 진행시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이번 사태를 보니, 무계획을 최고의 계획으로 여긴 듯하다. 주요 여당 정치인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그 계획조차 알리지 않았다. 단지 군 수뇌부 몇몇과 비밀리에 모의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성급하게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만 발동하면 다들 무서워서 집에 처박혀 벌벌 떨 줄 알았던 것 같다. 당연히 결과는 허망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가 이렇게 된 지금, 현재 윤석열이 몸담고 있는 보수정당, 보수연합은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윤석열은 민주당이 수십 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스파이가 아닐까? 보수정당을 궤멸시키기 위해서? 그런 우스갯소리가 여기서 나온다.

한국의 짧은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비상계엄령은 언제나 독재로 가기 위한 초입부였다. 북한군 침략과 같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 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적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한 뒤 장기 독재를 하는 아주 익숙한 시나리오. 나는 이 짧고 격렬했던 몇 시간의 소동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가 독재로 회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한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국 정치 중심에 가닿기 위한 독재의 피가 끊기지 않고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것에 두려움, 다스리기 힘든 분노를 느꼈다.

윤석열은 2시간 반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을 동원해 인생의 마지막 축제를 벌였다. 감독과 각본은 윤석열과 몇몇 군 수뇌부, 출연진은 무장한 계엄군, 국회의원과 서울 시민들, 카메라는 취재진과 기자, 유튜버들이 자원했다. 관객은 수천 만의 국민들이었다. 국민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공포 호러물을 보듯 두려움에 떨며 관람했다. 본 영화의 길이는 2시간 반. 관람료는 민주주의 후퇴와 한국 사회의 높아진 불확실성이었다.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광폭한 축제는 윤석열의 정치적 자살이자 다음 대통령을 예비하는 서막식이었다. 축제가 시작함과 동시에 윤석열은 정치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이 축제의 끝은 탄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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