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늦은 밤,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를 완독했다. 외국에서는 [해변의 카프카]가 7~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한 권으로 출간되었지만(일본, 폴란드 등), 방대한 양에 지레 겁을 먹고 읽지 않을 독자를 염두해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는 두 권으로 나눠 출간했다. 나는 요즘 소설을 집었다 하면 하루키 작품을 고른다. 작년 가을 [노르웨이 숲]으로 출발한 여정은 [1Q84], [기사단장 죽이기]를 거쳐 [해변의 카프카]까지 다다랐다. 80년대를 풍미했던 하루키 신드롬이 후세대의 나에게까지 온 것일까. 하루키 신드롬은 단순히 과거에 반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까지 독자들의 마음속에 박동하고 그 생명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는 하루키 작품의 어떤 포인트에 매료되었을까. 키워드를 먼저 말해보면, “규칙적인 일상”, “방황”, “설명될 수 없는 인생의 모호함”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우선 하루키는 대체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규율하는, 자기만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예컨대 주인공은 매일 아침, 공을 들여 스트레칭을 하고 근육을 풀어준다. 정해진 루틴에 따라 세수, 면도, 양치질을 꼼꼼히 하고 샤워를 한다. 주로 샐러드나 샌드위치, 일본 가정식을 요리해 간단히 끼니를 때운다. 정기적으로 유산소, 근력 운동을 하고 땀을 흠뻑 흘린다. 몸의 외관적 항상성은 이렇게 유지된다. 옷매무새를 깔끔하게 하고, 쉬는 날이면 주름진 옷을 다림질해 새 옷처럼 편다. 해야 할 일을 하거나 학교에 가 수업을 듣는다. 주인공은 보통 책과 음악을 좋아해 시간이 나면 틈틈이 책을 읽고 음악, 특히 클래식과 재즈를 듣는다. 맥주나 위스키 역시 일상적으로 즐긴다. 저녁에는 늦지 않은 시간에 침상에 들고 거의 같은 시간에 규칙적으로 일어난다. 규칙과 방황은 서로 엇갈려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하루키 문학에서 이 둘은 언제나 함께한다. 주인공은 일상에 뿌리내린 규칙을 따르면서도 끝없이 방황한다. 소설에서 일어날 법한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불확실한 이야기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게 된다. 처한 상황에 따라 때로 시간 감각, 날짜 감각을 상실하기도 하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고, 어떤 극심한 방황을 겪어도 주인공은 삶을 삶으로서 지탱하는 일상적 규칙을 꿋꿋하게 유지한다. 그것마저 이탈하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상실된다고 여기듯이 말이다.
“질서 속의 혼돈”
이것이 내가 하루키 소설에 열광하는 가장 큰 포인트다. 하루키 소설은 이야기 줄기가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짜였지만 초현실성을 동반해 혼란을 일으킨다. 주인공은 현실을 초월하는 판타지적 경험을 하고, 가상과 현실 그 경계 어딘가에서 방황한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주인공은 자신만의 루틴을 철저하게 따르며 규칙적으로 살아간다. 이것을 보고 있으면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충격적인 사건과 관계없이 소설 전체적으로 질서가 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은 나를 깊이 자극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을 가진 타인에게 쉽게 매료되는 법이다. 나의 경우 하루키가 그랬다. 하루키는 사람으로서도 그렇지만 소설에서도 분명한 질서가 있다. 그에 비해 내 인생은 그러지 않다. 인생의 순간마다 불안을 느끼지만, 하루를 무사히 굴러가게 하는 사소한 규율조차 따르지 않는다. 질서도 없고, 규칙도 없다. 흔들리는 자신을 최소한으로 다잡아주는 안전대 없이 맞이하는 방황은 차원이 다르다. 무질서 속 맞이하는 방황이 그렇다. 그것은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핵심을 단숨에 잘라버린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우울한 사람이 되어 암흑의 소용돌이에 빨려가게 된다. 삶의 기반이 무질서로 이루어져 있을 때, 방황이라는 무거운 돌이 얹어지면 삶은 금세 균열이 나고 파괴된다. 하루키 소설 속 인물과 다르게 내 인생은 그렇게나 취약하다. 그들의 삶의 기반은 규칙으로 점철되어 단단하다. 나는 그와 정반대다. 하루키 문학이 질서 속의 혼돈이라면, 나는 무질서 속 혼돈에 가깝다. 이 간극에서, 질서가 부여된 하루키 문학에서 깊은 대리만족을 느끼고, 삶을 공고히 다질 수 있는 실마리를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