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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Sep 16. 2022

"한 잔 할래?" 금요일 6시15분 팀장님이 물었다.

마흔의 술자리는 달라야 한다

'지글지글'

때깔좋은 기다란 곱창이 둘둘말려 불판에서 익어간다. 노릇노릇 매캐한 연기와 침샘을 자극하는 곱창구이 냄새가 진동한다. 선홍빛 핏물을 머금었던 염통이 먼저 색을 달리했다.

"염통은 지금 드셔도 되유."

구수한 사투리 만큼 푸근한 인상의 주인 아주머니가 곱창을 듬성듬성 가위로 자르며 참견한다.

"이건 우리집 비법 양념이니께 잡솨봐."

특별할 것 없는 그런데 어딘가 특별한 소스 맛이 잘 구어진 염통에 어우러진다. 

"자, 짠해야지!"

냉장고에서 막 꺼내 기포가 표면에 알알이 맺힌 소주병에서 맑은 술이 콸콸 쏟아진다. 찰랑찰랑 손가락에 넘친 소주 한 방울이 차다. 

"건배"

'쭈욱~'

"크~"

"식기전에 얼른 먹어"

"네, 팀장님."

허름한 곱창집, 고단한 하루를 마친 팀장과 사원 두 사람은 말없이 곱창과 염통을 탐하고 사이사이 소주잔이 오고간다. 


드라마 <미생>에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사라진 BL, 옆팀 정과장의 거짓말. 그 팀을 뒤지는 장그래, 발각되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숨겨놓은 BL을 이미 찾아낸 오과장이 정과장의 거짓말을 밝혀내면서 상황은 종료된다. 봉변을 당한 장그래, 홀로 사무실에 앉아 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도 없지만 자신으로 인해 소동이 벌어진 것 같아 머리부터 숙이고 보는 장그래. 

"술 한잔 할래?"

팀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계약직 인턴사원의 무모함 그리고 그 진정성을 온몸으로 전해 받은 오과장.


둘은 허름한 대포집에 앉아 말없이 소주잔을 주고 받는다. 부글부글 끓는 찌개를 한국자 퍼서 계약직 사원의 그릇에 덜어주는 오과장. 그 둘은 그렇게 서로 한발자국씩 더 가까워졌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끈으로 연결이 됐을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이 한 없이 좋았다. 


술자리를 좋아했다. 술 자체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마흔 일곱이 된 지금도 여전히 술맛은 쓸 따름이지만 첫 잔을 털어넣을 때 목을 타고 넘어가는 짜릿함, 무더운 여름 살얼음이 낀 맥주에 소주를 타 한 모금에 넘기는 그 시원함도 좋다. 술 자체에 대한 예찬은 딱 거기까지다.


누군가의 술자리 제안에 거부감은 없었다. 요즘 친구들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지만 상사와의 술자리를 내심 기다린 적도 있었으니까. 서로 무장을 풀고 기꺼이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고나 할까? 술 그 자체보다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술맛이 달라진다. 마음을 다 꺼내놓고 있는 말 없는 말 쏟아내기도 하고, 묵묵히 듣기만 해도 좋았다. 


한 번 분위기를 타면 3차는 물론이요 노래방까지 풀코스로 소화하고도 멀쩡히(그런척 하는 것이지만) 출근해 아무렇지 않은 듯 일을 했다.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 있느냐? 라는 주변의 추임새를 내심 즐겼던 모양이다.


십수년간 그런식으로 수도 없는 술자리를 가졌지만 술로 인한 문제가 생긴 적은 거의 없었다. 그저 즐겁고 유쾌하고 유대감이 커지는 기억뿐이었으니 운이 좋았달까? 조금 이른 시점인 과장 무렵부터 육성, 조직문화 기능을 맡아 리더 역할을 하면서 술자리는 하나의 루틴과도 같았다. 팀의 특성상 과정 종료 후 뒷풀이 자리가 많았는데, 현업 사람들과의 만남도 좋았고 팀원들도 거부감없이 잘 어울렸다. 


당신만의 착각 아니냐? 싶을수도 있겠지만, 최소 2~3년 이상, 많게는 5년 이상 함께 일했던 당시의 후배들이 그때가 좋았다라고 입을 모으는 것을 보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지 싶다. 한 때 그 결속력이 부러웠던지 옆팀 동기는 '너희 팀은 단합이 잘된다'며 부럽다는 속내를 슬쩍 흘리기도 했다.


술자리는 분명 회사생활에 하나의 윤활유였다. 변화는 40을 넘기면서 찾아왔다. 일단 몸이 힘들어졌다. 숙취로 하루를 몽땅 망치는 일이 잦아졌다. 종합검진을 받으면 뭔가 하나씩 문제가 터졌다. 혈당이 높다든지, 고지혈이 생겼다던지, 혈압이 높아졌다던지, 심지어 담낭에 용종도 생겼다(이는 필시 술과 관련이 있으리라) 또래 동료들은 다 그런 문제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뭔가 문제가 쌓여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도 뻔해졌다. 수년을 똑같은 멤버, 똑같은 패턴으로 술자리를 갖다 보니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녹음기 같은 수준의 대화들만 이어졌다. 주로 회사에 대한 불만, 누군가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런 시간이 이젠 무의미해졌구나 싶었다. 영양가 하나 없는 왕년의 이야기들.


수년간 쌓인 유대감, 끈끈함과는 별개로 매번 같은 사람들과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위기감. 성장이 멈춘 정체구간에 접어들었다는 답답함에 술을 마셔도 유쾌해지기는 커녕 몸이 힘든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공황발작이 왔다.

술을 마시며 괜찮은 척, 유쾌한 척, 사회생활 잘하고 있는 척 단단해 보였던 가면이 벗겨지며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나날이 망가지는 회사, 불만을 쏟아붓는 현장, 조직문화팀은 대체 뭐하는 팀이냐는 경영진의 질책, 개인적인 구설수와 오해, 그간 보지 못했던 경쟁자들의 무거운 시선, 직속상사 임원과의 감정적 충돌 따위...


16년간의 직장생할 이곳저곳에서 이미 경고등이 켜진 상태였지만 술과 분위기에 의존해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력은 몇 년 전 수준에서 멈춰 있고, 연차가 높아질수록 내실도 없이 고집과 아집만이 단단해졌다. 작은 일에도 버럭 화를 주체하지 못했고 감정의 널을 뛰었다. 어느 순간 부터 '나는 회사와 맞지 않는 사람' 이라며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웃으며 들어주던 후배들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을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현실은 수년간 함께 교육을 운영하고 뒷풀이 하면서 끈끈하다고 믿어왔던 내 사람들은 화장실 구석 영업3팀을 결코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조직문화 책임자로 회사의 불의에 맞서겠다며 영웅놀음을 하던 그 시절, 그 이전과는 다르게 결코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은 술자리를 만들어 독이나 다름 없는 알콜과 분노를 쏟아부어온 셈이다. 그렇게 술자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얼굴을 바꿔 나를 서서히 파괴하고 있었다.


현실을 깨달은 후 술자리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알콜 중독도 아닌데 습관은 무서웠다.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소주 세병 이상, 적어도 2차를 달리는 패턴은 계속 되었고 몸과 마음은 더 망가졌다.


다행히 그 폭주는 퇴사와 함께 멈췄다. 술자리에서 입에 달고 살았던 '나는 회사와 맞지 않는 사람'을 증명해야 했다. 아가리 파이터로 구차하게 남기엔 남은 자존감도 없었으니까.


퇴사 후 2년 8개월, 거짓말 처럼 몸과 마음이 회복됐다. 모든 네트웍이 다 끊어지니 강제로 금주가 됐다. 오히려 회사에 출근할 때보다 더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아침 7시 30분에 기상해서 30분 운동을 하고, 글쓰기와 책읽기로 하루를 보낸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10분 정도 명상을 하고, 잠은 꼭 7시간 이상 잤다.


공황증상은 완전히 사라졌고 혈당과 혈압 고지혈 등 경고등이 사라졌다. 


만약 회사에 남아 그 상태 그대로 폭주를 멈추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그 일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퇴사전 3년의 시간동안 얼굴을 뒤바꿔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지만, 술자리의 기억은 여전하다. 드물지만 누군가 불러주면 어김없이 나간다. 왕년의 실력을 발휘해 적어도 2차까지는 멀쩡히 즐긴다. 폭주는 멈췄지만 술자리를 한창 즐겼던 그 시절의 밝은 기억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분노로, 서러움으로, 악으로 마셔선 몸만 상한다.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부는 어느 저녁, 집앞 편의점에서 캔맥주 두개를 사와 파라솔이 펼쳐진 의자에 앉는다. '치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캔맥주를 뜯어 한모금 쭈욱 넘긴다. 


'캬아' 별다른 안주 없이도 좋다. 간밤의 악몽, 낮동안의 짜증, 미래에 대한 걱정이 그 한모금에 날아간다. 마흔 일곱, 뒤늦게 나를 되찾고 술은 그렇게 다시 친구가 됐다. 


무조건 술은 즐겁게 마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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