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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심 Aug 28. 2022

300원에 인생을 건 사람이 보여준 열정

집착과 열정의 경계에서

“일에 보이는 끈기가 열정인지 집착인지 때로는 알기가 어렵다.”


평소에 뉴스 기사를 잘 읽지 않아서 세상 일에 내가 너무 무관심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나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행복해지려면 아침에 뉴스 기사를 읽지 말라”라는 말도 좋은 구실이다. 어떤 이슈를 종합적으로 살피지 않고 단편적으로 접해 그릇된 편견만 만들 요량이라면 애초에 시작도 말자는 생각도 좋은 핑계이다. 또 시류에 영합하는 이슈를 이해하는데 나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이슈가 터져 나와 끊임없이 나의 관심을 갈망할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관심받고자 집착하는 이슈들에 심리적 거리를 둔다.


그런데 웬일로 웹페이지를 스쳐 지나가는데도 눈을 사로잡는 한 인터넷 뉴스 기사가 있었다. 아마도 나의 잠재의식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백그라운드 모드’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 제목을 클릭하고 단숨에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도의 한 남자가 기차표 추가 요금 300원 환불 문제로 22년 동안 소송을 진행했고 마침내 승소했다는 기사였다. 주변 모든 사람이 말리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100번의 법정 출두했고 얼마 전 결국 재판에서 이겨 많지 않은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정의를 위해 싸웠고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를 수호하는데 어려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BBC


집착 혹은 열정?



그의 행동은 집착이었을까 아니면 열정이었을까? 나 역시 살면서 어떠한 것에 대한 나의 끈기가 둘 사이에서 어느 것인지 궁금했고 항상 열정에서 비롯되었기를 바랐다. 주변 사람들이 그 인도 사람에게 그만 포기하라고 권했던 이유는, 누가 보아도 이익이 되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집착으로 보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도 사나이는 정의 수호라는 이름하에 사소한 재판을 끈으로 잡아 삶을 살아가는 동력으로 삼았던 것 같다. 이쯤 되면 열정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뜨겁게 해 줄 가치에 열정을 쏟은 것이니 말이다.




열정과 집착을 구별할 수 있나?


흔히 사람들 누구나 끈 하나씩 잡고 산다고 말한다. 물론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끈을 잡을 수도 있다. 끈은 거창한 목표일 수도 있고, 일상에서 즐거움을 주는 단순히 취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기대를 거는 대상인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열정 혹은 집착으로 나타나는데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왜냐하면 열정과 집착은 대상/활동에 대한 끈기와 꾸준함을 겉으로 보이며 삶의 활력을 준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열정은 긍정적이고, 집착은 부정적인 것이니 둘은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람들이 열정을 선호하는 이유는 집착으로 인한 부정적 에너지가 시야를 좁게 하고 대상에 매몰되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열정이 뿜어내는 긍정적 에너지는 유연하고 총체적 사고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열정과 집착의 차이는 행위를 잠시 쉬게 되었을 때 더 선명해진다고 한다. 집착으로 인한 끈기는 잠시 쉴 때 불안함을 불러일으키지만, 열정은 갈망하고 아쉬운 감정을 일으킨다.



의미 있는 끈, 무의미한 끈이 따로 있나?


사람은 목표 조정 능력 (goal adjustment capacity)를 갖고 있어, 무의미한 목표를 포기하고 더 나은 목표를 추구한다.
-카스튼 로쉬 (Carsten Wrosch), 캐나다 몬트리올의 콘코디아 대학


그 인도 사람에게는 기차표 환불보다 더 의미 있는 목표가 22년 동안 생기지 않았던 것인지 의문이다. 나도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하다가 어느 순간 현타가 와서 이일을 자신이 왜 하고 있나라는 자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뒤로 자신이 몰두하는 일에 대한 의미의 재해석과 더 나은 의미를 가진 무언가를 찾는다. 이 과정은 어떤 일의 가치와 의미를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는 일이니 삶에 뚜렷한 기준이 필요하다.


로쉬 교수의 말처럼 사람은 더 높은 목표를 쫓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목표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을 ‘능력’이라고 표현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목표지향이 더 이익이 되는 쪽으로 나아가는 유연함이 되지만, 이와 같은 태도는 필연적으로 삶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도 사람이 보여준 것은 자신이 이룰 가능성이 있는 목표를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쫓았다는 것이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무의미해 보이는 목표이지만,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목표 조정능력에 너무 의지하면 꾸준함이 주는 보너스는 얻기 힘들지 않을까. 적정한 목표에 꾸준함을 더한다면 일만 시간의 법칙이 말해주듯, 남다른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나도 늘 끈 하나를 잡고 사는 것 같다. 요즘은 글쓰기가 그렇다. 어떤 날은 괴로움이 들어 집착인 것도 같고, 또 어떤 때는 즐거움이 느껴져 열정인 것도 같아 나의 끈이 열정인지 집착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기사: https://m.mk.co.kr/news/culture/view-amp/2022/08/75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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