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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심 Sep 02. 2022

여행 가서 싸움 말고 불행 배틀

불행의 상대성 이론, 불행에 집착하는 이유

“여행이 늘 즐거운 기억만 남기는 것은 아니다”


대학 다닐 때 동아리를 지도하던 교수님과 학생 몇 명이 어울려 가까운 곳으로 짧은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엠티라고 하는 게 맞겠다. 누가 보아도 조금 비현실적인 조합인 것 같은데 현실이 되었다. 여행지의 풍경에는 관심 없었고 적당히 배를 채운 뒤, 교수님이 들고 온 양주를 까서 나눠 먹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여차하면 교수님과 호형호제 할판이었다. 누가 시작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몸싸움 아니고 불행 배틀이 시작되었다. 처음과 끝은 흐릿하고 하이라이트만 편집되어 머릿속에 고이 저장되어 있다.


학생들 중에 한 형이 고등학교 때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얘기했고 배틀이 그 형의 승리로 끝나는 숙연한 분위기였다. 그 형이 날린 펀치들 중 기억나는 것은 공납금을 내지 못해 엄마가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다고 말했다 (지나고 보니 그조차도 큰 불행은 아니었다). 이 모든 배틀을 어른답게 꿋꿋이 지켜보던 교수님이 승자를 결정짓듯 입을 열었다. 모두 숨죽이고 인생이 베인 굵은 멘트를 기대하고 각자 벌건 얼굴을 문지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교수님: 나도 고등학교 때 진짜 힘들었다. 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려고 그러네...



뜻밖의 전개라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숨을 죽였다. 끝난 줄 알았던 배틀에 예상치 못한 선수가 등장한 것인가? 어떤 불행 펀치를 내놓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교수님: 우리 집에 기사 딸린 차가 없어져서,… 학교 다니기 정말 힘들었어.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솜 주먹 펀치라니… 그 당시 나는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이 상황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기 위해 혀를 깨물어 대신 눈물을 흘렸다. 충혈된 눈이 교수님에게는 공감의 표시로 전해졌으리라 생각한다.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불행을 인지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광경을 눈으로 귀로 직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임팩트가 너무 커 내 평생 잊히지가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다른 이유로 불행을 경험한다 - 톨스토이


각자 다른 이유로 불행을 겪지만, 또 각자의 방식으로 불행을 견디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불행에 얽매이면 삶이 고달프다.





불행에 집착하는 이유

트라우마를 제외한 불행에 대한 얘기이다


1.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만족스럽지 않은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 제일 좋은 것은 과거에 겪은 불행이다. 과거의 불행이 원인이고 현재의 불만족은 결과이니 아귀가 딱 맞는다. 비록 과정이 생략되었지만, 과거의 불행은 좋은 핑계이자 도피처가 된다. 어쩌면 자신을 자책하는 것보다 과거의 불행을 붙드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특히 현재의 불만족을 해소할 길이 없을 때는 이것이 더욱 요긴하다.



2. 자신의 성공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


불행에 집착한다기보다는 불행을 이용한다는 것이 맞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불행을 꺼내어 자신의 성공을 그럴듯하게 장식할 수 있다. 또는 자신의 인생 난이도가 높았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에 흡족할지도 모르겠다.



3. 고통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다.


불행은 고통을 준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아니라 적당히 슬프다면, 마치 슬픈 노래를 듣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고통 뒤에 오는 쾌락은 우리가 달리기를 할 때 경험하기도 한다. 이것은 먼 옛날 인간이 포식자로부터 지치지 않고 도망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4. 뇌가 불행에 집중하게 고안되었다.


이 또한 진화의 결과이다.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에 집중하도록 뇌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의 뇌는 부정적인 것을 더 잘 기억하고 잘 떠올린다고 한다. 따라서 뇌가 불행을 더 잘 떠올릴 수밖에 없다.



5. 동정을 받을 수 있다.


불행을 떠올려 타인에게 전하면 측은지심을 유발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불행이 한 역할하니 기특하기도 하다.



불행을 떠올리는 것이 반복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머리에서 떠올리는 것만으로 복습 효과가 있다. 따라서 기억과 관련된 뇌의 신경회로가 강화된다. 이는 불행을 느낄 때 드는 슬픈 감정이 격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불행한 기억도 견딜만하니 떠올린다는 말이 있다. 또 도움이 될 때도 있으니 비상처럼 적은 양을 주의를 기울여 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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