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30화/2부 끝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60)

by 태양을 품은 별

추적추적 비가 내린 토요일, 전두환대통령이 서남아시아와 대양주 순방에 나섰다. 청와대에서 공항 가는 길목마다 인파가 도열했다. 궂은 날씨에 일반시민과 공무원, 학생들까지 동원하였다. 출국길 대통령차에 태극기와 손을 흔드는 광경이 실시간 중계됐다.

저녁뉴스도 대통령일행의 카퍼레이드장면을 반복했다. 아나운서가 대통령순방을 온 국민이 열렬히 축하한다고 멘트를 덧붙였다. 창경원동물원의 과천서울대공원부지로 이전착수보도는 아이들 귀에만 들렸다.

국민성원을 받으며 떠난 대통령순방은 다음날 끔찍한 비보로 돌아왔다. 전두환대통령이 방문할 아웅산묘소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였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도끼만행사건 이후, 역사 이래 두 번째 데프콘3이 발령되었다. 불과 한 달 전 KAL기 폭발사건에 이어 나라와 국민이 또다시 공황상태에 빠졌다.

전두환대통령은 간발의 차이로 무사했다. 17박 18일간 버마·인도·스리랑카·호주·뉴질랜드·브루나이, 6개국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길에 올랐다.

사고당일 대통령공식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버마의 독립영웅이며 국부인 아웅산장군묘소참배였다. 한국을 방문한 해외정상들의 국립서울현충원참배처럼 의례적 행사와 다름없었다.

10시 10분, 주버마한국대사와 대통령비서실장 등 의전선발대가 영빈관에서 출발하였다.

10시 18분쯤, 부총리 등 수행원들과 기자들이 아웅산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인야레이크호텔에서 행사를 위해 일찍 이동하였다.

10시 26분경, 태극기를 단 벤츠차량을 선두로 제대차량이 경찰호위를 받으며 들어섰다. 공식 수행원과 기자, 경호원들 시선이 자연히 모아졌다. 주버마한국대사가 차에서 내리며 외쳤다. ‘곧 각하께서 오십니다’. 모두 2열 횡대로 섰다. 기자들도 촬영준비를 마쳤으나, 대통령도착이 지연됐다. 경호실이 행사진행 전 연습 삼아 아웅산묘소나팔수들에게 연주를 요청했다. 진혼나팔소리가 울린 순간, 폭발음이 진동하였다. 여기저기 비명이 쏟아지고 울부짖으며 아비규환에 빠졌다.

정부조사단이 버마랭군에 급파되어 현지수습을 개시했다. 정체불명 테러범들이 미리 폭발물을 설치해 놓은 뒤, 대통령의 묘소참배를 알리는 진혼나팔소리에 맞춰 감행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14명이 부상당하고, 경제부총리 등 17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희생자명단과 사진을 방영하였다.

‘버마 아웅산묘소 폭탄테러 희생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석준경제부총리, 이범석외무부장관, 김동휘상공부장관, 서상철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대통령비서실장, 김재익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 심상우민주정의당총재비서실장, 이계철주버마특명전권대사, 하동선경제기획원해외협력위원회기획단, 이기욱재무부차관, 강인희농수산부차관, 김용한과학기술처차관, 민병석대통령주치의, 이재관대통령비서실공보비서관, 이중현동아일보사진기자, 대통령경호실경호관 한경희∙정태진, 고인이 된 분들께 삼가 조의를 표하며~’

곧바로 희생자자택에 빈소가 차려졌다. 서울동작동 현충원에도 합동분향소가 설치됐다.

한편 순국자들은 버마랭군 2개 육군병원 중 제2병원으로 옮겨졌다. 부상자들은 제1병원에 후송되어 치료받았다. 하필 일요일이어서 수십 명의 사상자를 치료할 당직의사가 2명뿐이었다. 약품과 의료기재도 부족했다. 소독약이 없어 물로 상처를 씻고, 가위대신 면도칼을 사용하였다. 2차 수술쯤에는 염증이 심했다. 에어컨이 없어 부채를 부쳐가며 수술하였다. 본격 치료는 테러발생 3시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랭군시내 각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 약사들을 모두 차출했다. 대사관직원들과 상사주재원들은 가정구급약품들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가족처럼 밤새워 환자들을 간호해 주어 부상자치료에 큰 힘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TV와 라디오 등 정규방송이 중단됐다. 순국인사 애도와 추모특집, 뉴스특보와 좌담으로 대체하였다. 각종 문화행사도 중지하거나 연기했다.

부상자 14명 중 11명은 국내로 귀환하여 국립의료원에 입원되었다. 버마정부에서 ‘아웅산사건 조사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여러모로 보아 전두환대통령을 노린 폭탄테러인지라, 대통령생존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정부에서 버마외무상이 4분 늦게 영빈관에 도착하여 사건현장에 없었다고 발표했다. 호사가들 입에서 별의별 추리가 난무하였다.

종합적으로 보면 천운이랄 정도로 우연이 겹쳤다. 원래 대통령은 오전 10시 15분 영빈관에서 버마외무상을 접견하고, 10시 20분에 묘소로 같이 갈 예정이었다. 때마침 버마외무상승용차가 영빈관으로 향하던 중 고장 났다. 대한민국 60년대 수준의 교통인프라여서 택시가 드물었다. 외무상운전기사가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간신히 택시 1대를 끌고 왔지만 이미 10시 15분이었다. 같은 시각 전두환대통령이 버마외무상을 만나려 1층 로비에 내려갔으나, 아직 도착 전이라고 보고받았다. 국가원수가 로비에서 기다리는 모양새가 이상하고, 버마외무상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 2층으로 올라갔다. 영빈관요원들에게 격려라도 하자며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10시 19분에 버마외무상이 왔다. 묘소로 출발한 시각은 예정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이었다. 오전일정이 대한민국수행원들끼리 진행하는 묘소참배다 보니,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는 아니었다. 아웅산묘소까지 4.5km 길을 굳이 재촉할 이유가 없었다. 뒤늦은 시간이 죽음에서 삶으로 인도한 결정적 계기였다. 물론 경호실의 나팔시범연주요청도 주효했다. 또한 폭탄테러신호로 판단된 진혼나팔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스케줄이 지연됐더라도 무사하지 못할 수 있었다.

주버마한국대사 때문에 구사일생하였다는 주장도 전해졌다. 대머리에 안경을 착용하여 대통령과 매우 흡사한 스타일이었다. 태극기 펄럭이는 의전차량을 타고 모터사이클경호를 받으며 대통령보다 앞서 도착했다. 내려서 수행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가운데자리에 섰기에, 멀리서 보면 대통령으로 오인할 가능성이었다.

신빙성이 떨어진 이야기도 나왔다. 참배묘지행사장이 좁아서 경호실장요청에 비서실장이 먼저 도착하였다. 테러범들이 관례대로 비서실장과 대통령이 함께 움직인다고 여겨 폭탄을 터트렸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버마한국대사와 비서실장은 순직했다.

버마경찰이 관련자 사살 1명, 체포 1명, 도주 1명을 발표하였다. 레이건대통령이 방미 중인 중국외교부장과 한반도긴장을 논의했다.

대한민국국적희생자 17명 유해가 엠버밍과정을 거쳐 비행기로 운구됐다. 현지서 화장해 국내이송방법도 있지만 배제하였다. 국민장을 결정하고 모든 비용을 국고부담으로 했다. 김포국제공항에서 영현봉영식을 치르고, 서울대학교병원 합동봉안소에 안치하였다. 전두환대통령과 각계인사, 시민들 조문이 이어졌다.

버마반군소행이란 보도가 있었으나, 한국∙버마합동조사단이 사건현장에서 북한소행증거를 확보했다. 뉴스를 통해 전해지자 전 세계가 경악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제70회 IPU총회가 소련의 KAL기격추규탄과 보상요구 등 결의문 5개 항을 채택했다. 국내에서는 당장 북한에 보복하고, 소련과 수교를 해서라도 KAL기격추진상을 밝히라며 들끓었다.


대입학력고사를 40여 일 앞둔 고3수험생들은 걱정이 앞섰다. 과연 이 시국에 시험이 치러질지 반신반의하였다. 문승협이 철저히 비밀로 지켰던 김생출선생의 이직소식이 교내에 돌았다. 이달 말 퇴직한다고 알려지면서 많은 학생들이 슬퍼했다.


버마아웅산묘소폭탄테러 순국외교사절 17위 합동영결식이 열린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북한만행규탄대회가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다. 국가발전을 위해 기용된 핵심참모이자 특급행정가들이 희생됐다며 통탄하였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국가인재들을 테러로 잃었다고 가슴을 쳤다. 실제로 국가운영에 필수적인 법학∙경제학∙행정학∙사회학 등에서 명망이 높았다.

법학계에선 함병춘비서실장사망을 한국법사회학의 인재라며 애도했다. 한국 법철학∙법사상사∙법제사에 큰 영향을 미쳐 몇십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로 평가받았다. 부친이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국가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모범적 지도자 송암 함태영의 아들이었다.

경제계는 서석준경제부총리와 김재익청와대경제수석이 그랬다. 한국경제를 책임진 주요 경제인사들이 한꺼번에 세상을 등졌다며 안타까워하였다. 한국경제가 기운다는 관측까지 돌았다. 특히 김재익경제수석은 최고경제학자로 꼽힌 경제정책통으로 사실상 전두환의 경제가정교사였다. 전두환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초빙하여 ‘나는 군인이라 경제는 모른다’고 털어놓으며, 국가경제정책을 책임져 줄 것과 경제학기초부터 가르쳐 달라 부탁했다는 전언도 있었다.

행정학과 정치학 측에서는 박정희군사정권의 외교안보핵심인 이범석외무부장관을 높이 평가하였다.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관계정상화를 골자로 한 북방정책선구자격 인물이었다. 물론 만만찮은 반론도 존재했다.

경제4단체 등 재계인사들이 순직한 40여 명의 유자녀를 위해 장학금 20억을 모금키로 하였다.


정규방송이 나흘 만에 재개됐다. 전두환대통령이 국무총리 등 11개 부처 장관급개각을 단행하며 국면전환에 나섰다. 국민들도 점차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각급 학교도 조심스레 문화행사를 시작했다. 문일고가 체육대회와 첫가을축제를 개최하였지만, 대입시험을 코앞에 둔 3학년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문승협은 작년 축제 때 초대한 정난희생각에 무척 힘들었다.


버마정부가 8일 만에 북한만행으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대한민국국가원수를 노린 폭탄테러로 규정되면서 국민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이산가족상봉으로 북한김일성과 소련공산당에게 6.25 전쟁책임을 묻는 분위기였던지라, 어느 방향으로 뛸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전국에서 북한만행규탄궐기대회가 늘어났다. 이웅평귀순과 KAL기폭파사건 이후 또다시 반공열풍이 불었다. 국민들이 강성주의자와 온정주의자로 극명히 갈렸다. 강성주의자들은 북한김일성과 소련을 타도하며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쳤다. 용서할 수 없는 전쟁선전포고라며 군사적 보복까지 요구하였다. 온정주의자들은 순국수행원들을 슬픔으로 애도하며 평화를 주장했다. 전두환정권은 국론분열을 적극 이용하였다. 북한과 갈등을 원치 않는 미국눈치를 받들며 국가위기를 자신들의 기회로 삼았다. 신군부독재에 반감으로 가득 찬 국민여론이 바뀌어갔다. 민심이 측은지심에 우호적으로 기울면서, 전두환의 전횡과 친인척비리등 실정이 묻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만행이 전두환정권의 안정과 유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더니, 임기를 이어갈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전두환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마침표를 찍었다. ‘북한의 폭력망동은 국제사회에서 징벌받아 마땅하며, 또다시 도발하면 전쟁선포로 규정해 반드시 응징하겠다’. 별다른 보복 없이 경고만으로 종결했다. 미국이 남북군사적 충돌을 만류한 결과였다.

레이건대통령이 보조를 맞춰 한미공조를 공표하였다. 국제사회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KAL기폭파사건으로 준중거리퍼싱-II탄도미사일을 서독과 이탈리아에 배치하여 소련본토를 사정권에 두는 등 추가보복을 단행했고, 3차 세계대전문턱에서 소련관제센터 페트로프소련방공군소령이 세계를 멸망시킬뻔한 우발적 핵전쟁을 막은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핵감축중단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국내정치권에서 전두환대통령의 버마순방을 두고 설왕설래했다. 왜 계획에 없던 버마를 출국직전 추가하였는지 의심했다. 북한화물선 ‘동건애국호’가 버마랭군항에 체류한다는 스리랑카대사의 첩보보고까지 있었다. 가봉암살계획과 필리핀폭발물암살테러징후 등 정보기관들의 테러의심보고 때도 순방을 강행한 전례가 있긴 하였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해외순방중독이란 말이 돌았다. 전두환이 임기초 1981년부터 매년 아프리카와 캐나다 등 수많은 국가를 방문했다.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권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약점에서였다. 범야권이 의문을 제기하자, 정부가 답하였다.

‘버마가 사회주의이념을 지지하고 북한에 우호적이나, 제3세계 비동맹 국가다. 최근 경제 등 현실적 이유로 한국과 관계개선에 많은 의욕을 보여왔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여 버마를 우호국가로 확실히 만들겠다는 명분에서 첫 번째 순방국으로 정했다’

야권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두환의 미래를 염두한 행보라 분석하고, 버마군부독재자 ‘네윈’식 상황정치벤치마킹으로 여겼다.

네윈은 일본군훈련을 받은 군인이며, 1962년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1974년부터 재작년까지 7년간 두 번의 임기를 마친 버마대통령이었다. 대통령직을 사임한 현재도 당의장직을 유지하며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정부시위에 계엄령과 통행금지를 선포하고 탱크를 투입하였다. 군인들에게 실탄발포를 명령하는 등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폭동과 공공재산파괴 혐의를 씌워 투옥시키고, 반역죄로 기소하는 것까지 전두환과 여러모로 닮았다.

청와대가 야권의 거듭된 진실요구에 강력부인하였다. 박정희가 유신헌법 전에 대만식 총통제를 연구하기 위해 측근을 파견한 사례가 있었다. 야권주장은 합리적 추론이고 개연성도 충분했다. ‘쓰리 허’라 불린 ‘허문도∙허화평∙허삼수’중 한 사람으로만 추측할 뿐, 누가 배후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대학가민주화운동진영에서는 토론형식을 빌어 왈가왈부하였다. 폭탄테러에 전두환사망을 전제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예측성 발언들이 쏟아졌다.

제일 먼저 반공연맹과 재향군인회 등 우익호국보훈단체가 거론됐다. 민주진영의 민주화움직임에 좌경친북화나 월남패망수순이 우려된다며 집회 등 실력행사에 나설 것이란 논지였다. 하지만 집권여당이 개헌을 좌시하지 않으리란 주장이 우세했다. 당장의 민주화목표가 대통령선출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헌법개정이었다. 제5공화국헌법이 비민주성으로 가득하였다.

오히려 군부권력이 공고화되어 민주화가 더욱 뒤처진다는 예상도 있었다. 대규모혼란에 북한위협을 명분으로 또다시 군부정권이 장악한단 논리였다. 누군가는 전두환을 능가한 독재자등장과 강경군부인사의 친위쿠데타 가능성을 점쳤다. 명실상부한 군부이인자 ‘노태우’를 뜻했다. 12.12군사반란을 주도하여 후계자자리를 공고히 한 터라, 하나회를 비롯한 군부세력들이 대통령으로 앉힐 거란 의미였다.

어떤 이는 최규하대통령의 집권과정에 견주었다. 대통령유고시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을 수행한다. 대통령선거인단을 구성해 헌법에 의거 3개월 내 후임자를 선출한다. 유신헌법을 계승한 제5공화국에서 완전한 문민대통령이 당선될 리가 만무하였다.

민주화를 가정한 소극적 상상도 내놓았다. 민주화운동권 중 급진세력의 주장인 반미사회주의나 민중민주주의를 국민들이 용인하지 않을 거란 분석이었다. 6.25 참전경험자들이 많은 현실에서 지금의 정권처럼 반공친미노선을 고수할 여지가 다분했다.

대다수 일반국민들은 민주주의보다 눈앞에 펼쳐진 밥벌이가 우선이었다. 프로야구단 해태타이거즈가 지난 6월 전기리그를 우승한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MBC청룡을 4승 1무로 꺾고 창단 1년 만에 우승하였다. 해태타이거즈연고지 광주시민들이 악몽 같은 과거를 잠시 잊고 오랜만에 열광했다.


대학입학체력장이 다가왔다. 고3수험생들이 차라리 대입학력고사자체가 없어지길 바랐다. 막상 닥치니 웃픈 기대를 하며 두 손을 모았다. 얼마 전 정상적으로 시험이 치러질까 걱정한 태도와 정반대였다.

레바논테러조직 ‘헤즈볼라’가 미군과 프랑스군 주둔기지에 자살차량 폭탄테러를 감행하였다. 미해병대원 241명과 프랑스공수부대원 58이 숨졌다. 대학입학학력고사 30일 전이었다.

대입체력장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남학생은 윗몸일으키기 1분 63개, 턱걸이 18개, 던지기 63m, 오래 달리기 1000m 3분 20초, 제자리멀리뛰기 2m75cm, 100m 달리기 13초 여야 만점이었다. 여학생은 턱걸이대신 오래 매달리기를 하고, 오래 달리기는 800m였다. 조별로 줄 서서 종목을 옮겨가며 온종일 응시했다. 턱걸이에서 배치기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꽃이 피었다. 긴장되고 힘든 와중 위안거리였다. 문승협은 요령이 없어 겨우 5개 하였다. 모든 종목을 마친 뒤 체력장 등급과 점수를 바로 알았다. 대부분 20점 만점을 받았으나, 문승협은 턱걸이 때문에 18점이었다.

김생출선생이 마지막 출근을 하루 앞두고, 점심시간에 문승협을 상담실로 호출했다.

“선생님, 부르셨어요?”

“응 그래, 거기 앉아라.”

“짐은 다 정리셨어요?”

“마음이 문제지, 물건은 정리할 게 별로 없어.”

“근데, 무슨 일로?”

“저번 너 아팠을 때 병원검진결과는 의사에게 들었다.”

“곧 나아지겠죠, 신경 쓰지 마세요.”

“육체적 병이야 지속적으로 관리하면 된다지만, 너는 마음의 병이라 걱정된다.”

“마음의 병이요?”

“응, 고3병도 그렇고, 너의 마음 깊은 곳에 꽁꽁 숨어있는 그 응어리들 말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허허, 녀석. 아무튼, 대입학력고사도 얼마 안 남았는데 방황하지 말고, 알았니?”

“네, 알겠습니다.”

“먹고사는 직업을 위해선 전문적인 박학다식이 중요한데, 인생은 또 다르단다.”

“인생이요?”

“그래, 인생에는 비전문적 잡학다식이 필요해.”

“잡학다식?”

“당장 꿈이 없어도 괜찮아, 언제든 가질 수 있으니까. 근데, 다양한 견문을 넓히지 않으면 꿈 찾기가 어려워. 그래서, 너에게 인문학을 추천해.”

“인문학?”

“응. 뭐든 최선을 다해보고, 그 과정을 느끼면서, 얻어지는 결과까지 받아들여봐.”

문승협은 중학교수업시간에 서수연선생말씀이 생각났다. ‘인간중심 인문학이 중요하다’. 학업성적으로 고민하던 중학교친구 이정훈에게 해준 이야기도 떠올랐다.

‘최선을 다하는 건 결과에 따른 감정까지도 겪어내는 거야. 우리는 성적으로 살지 않아, 꼴등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보는 것, 틀려도 한번 더 풀어볼 용기로 평생을 살아갈 태도를 배우는 거야. 공부를 한만큼 실력이 늘어나겠지만, 결과까지 비례하지 않아. 열심히 한 노력 네가 알고 내가 알잖아, 그거면 돼.’

“선생님은 이제 어디로 가세요?”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정해지면 연락할게.”

“선생님, 그동안 여러모로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승협이 일어서서 허리를 90도 숙였다. 김생출선생은 미소 지으며 악수를 청하였다. 마주 잡은 문승협손등을 토닥여주었다. 서로 진심을 담아 인사를 나눴다.

문승협은 상담실을 나오면서 김생출선생 같은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또 생각했다.


김생출선생의 마지막 출근날은 어긋나지 않았다. 곧 학교를 나선다는 소식이 교내에 빠르게 퍼졌다. 많은 학생들이 교무실부터 교문까지 도열하였다. 김생출선생이 교장선생과 동료교사들에게 배웅받으며 교무실을 나왔다.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김생출선생별명을 외쳤다. 김생출선생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간디! 간디! 말하지 마 간디!”

“역사를 잊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달라질까라우!”

“너희들이 잊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뭔 힘이 있다고라우!”

“너희들이 평가하고 역사가 평가해야지!”

“예, 꼭 기억하께요!”

학생들은 교정이 떠나갈 듯한 목청으로 김생출선생에게 응답했다. 인생스승을 송별하는데 눈물로 사치를 부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부끄러운 줄 몰랐다.

김생출선생은 선생들의 수직적 사고를 수평적 사고로 바꾸려 부단히 힘썼었다. 제자들에게 ‘하라, 마라’ 대신 ‘하자’라는 표현을 상징적으로 사용했다. 인도국민들에게 비폭력평화주의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있다면, 문일고학생들에게는 ‘말하지 마 간디’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유독 역사를 강조하여 기억시키려 애썼다. 적어도 김생출선생제자라 자부한 학생들만큼은 역사인식이 뚜렷하였다.

김생출선생이 교문을 나서자마자, 대기 중인 택시를 타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미련에 사로잡혀 아쉬움으로 가득 찬 자신과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3일 후 월요일, 뜻밖의 김생출선생소문이 교내에 돌았다. 기간제계약직교사였으며, 더 이상 교직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전해졌다. 문일고학생들이 충격받은 것은 계약직교사가 아니었다. 정교사와 기간제교사가 교사들 사이에서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학생들은 전혀 괘념치 않았다. 당장은 불가피한 사정상 헤어졌지만, 언제든 문일고로 다시 돌아올 거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참스승으로 여긴 학생들이 많았기에, 김생출선생의 교편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여서 가슴이 뭉클했다. 김생출선생을 떠나보낸 문일고학생들의 애틋한 심정과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어우러졌다. 10월의 마지막밤을 노래하며 추억을 붙잡았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세월은 학생들 마음과 달리 멈추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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