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29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59)

by 태양을 품은 별

대검중수부가 영동개발진흥회장 등 ‘조흥은행어음부정보증사건’ 관련자를 검거했다. 이철희∙장영자사건, 명성그룹사건과 더불어 제5공화국 3대 금융부정사건이었다. 취약한 금융제도와 직원들의 부도덕성, 기업인들의 과도한 부축적 욕구가 결합한 중대범죄였다.

민주화운동전국청년연합’이 발족돼 신군부독재에 항거하였다. 대한민국민주화운동에 활력을 예고했다.

10월 1일 건군 35주년 국군의 날은 시가행진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3년 주기 시행이라 지난 1981년 서울여의도광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건군 36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을 기약하였다.

“얘들아, 김근태가 누군지 알아?”

“어디에 나오는 사람인디?”

“민청련이라고, 민주화운동전국청년연합의장이래.”

“민청련? 모르겄다, 근디 왜?”

“이름이 자꾸 기억나서, 이상하게 관심이 가네.”

“승협아, 우리한테나 관심 가져라잉. 그래서 말인디, 오늘은 느그 집서 저녁 묵으까?”

“그르자, 저녁 묵고 다시 독서실로 오자.”

“오늘 일요일이라, 아빠가 집에 있을 수도 있는데?”

“느그 아부지랑 뭔 상관인디?”

“아니, 너희들이 불편할까 봐 그러지.”

“우리는 괜찮해, 느그 집서만 암시랑 안 하믄.”

“뭐 으짠데, 아들 친구들이 공부하다 배고파서 밥 좀 얻어묵으러 왔소, 하믄 되제.”

“그 그럴까, 그럼.”

문승협은 뜬금없는 저녁타령에 마뜩잖았다. 미리 말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엄마 때문에 흔쾌히 응하지 못했다. 이제껏 친구들 집에서 밥 먹는 것을 마다하고 주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렇다고 모처럼 친구들 청을 냉정하게 자를 순 없었다. 적당한 핑곗거리도 얼른 떠오르지 않아 머뭇머뭇 집으로 향하였다.

문승협이 앞장서 대문을 열고 정원에 들어섰다. 이항리와 문경준이 집안에서 부부싸움 중이었다. 문승협은 순간 얼어붙었다. 부모의 싸우는 소리를 친구들과 들어야 했다. 천영기와 이담이 문승협눈치를 살피며 어찌할지 망설였다. 와장창 그릇 깨지는 소리와 험한 욕지거리가 들렸다. 문승협동공이 흔들렸다. 천영기와 이담이 조용히 돌아서갔다.

문승협은 부모싸움을 혼자 보고 들어도 수치스러운데, 친구들까지 목격하였으니 말할 수 없을 만큼 치욕스러웠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억장이 무너졌다. 다리가 풀려 현관벽에 기대어 앉았다.

한참 싸우는 소리를 듣다 결연히 일어나 들어갔다. 거실에서 문경준과 눈이 마주쳤다. 이항리는 방한쪽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문승협은 말하려 했으나,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귓가에 땡땡땡 종소리가 울리며 머릿속이 하얘지고 어지러웠다.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켜보려 해도 통제되지 않았다. 단단히 마음먹고 심호흡하며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아 아빠, 하 할 이야기가 있어요.”

“뭔 사내새끼가 말을 더듬냐?”

문승협은 머리카락이 쭈삣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빠를 쳐다보지 못하고 입술을 움직였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입 밖으로 기어 나왔다.

“드 드릴 말씀이 있다고요.”

“됐어, 나중에 해.”

문경준이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문승협은 나중에란 말에 오히려 안도하였다. 문경준이 험상궂게 인상을 찡그리며 나갔다. 문승협은 대문 닫히는 소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해방감이 몰려왔다. 이항리가 멍하니 앉아있는 문승협에게 다가갔다. 아빠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물었다. 문승협은 사지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그냥이라고만 하였다. 방에서 숨죽이던 동생들이 거실로 나왔다. 문현아가 괜찮냐며 걱정스레 바라봤다. 문윤아는 덤덤히 아무 말없었다. 이항리가 하소연을 시작했다. 문승협은 처량하게 엄마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조이며 가슴이 꽉 막혔다. 답답한 심정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목적지 없이 뛰었다.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어쩌다 아빠가 이렇게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까? 엄마는 이 상황에서도 자식들보다 본인감정이 먼저였을까? 동생들은 무슨 죄로 이렇게 힘든 일을 겪어야 할까?’. 숨이 가빠오자 천천히 걸었다.

문승협은 아빠와 소통에 상상이상 용기를 냈다. 더 이상 엄마에게 손찌검과 욕설을 말아 달라고 할 참이었다. 설사 때리면 맞고서라도 굽히지 않을 각오였다. 어쩌면 아빠가 짐작하고 자리를 회피했단 의심도 들었다. 처음 시도한 대화가 나중에란 한마디로 끝나 허무하였다. 망설임 없이 거절하며 나가버린 아빠가 무서우리만치 싫고 또 미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빠의 반복된 가정폭력이 정당해 보이지 않았다. 세상 어느 천지에 여자를 때리는 게 사랑표현이란 말이 있는지, 야노마미족의 관습조차 야만적으로 보여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정폭력이란 단어 자체만으로 울분이 쌓이고 증오스러웠다. 가정폭력은 그 어떤 말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문득 조금 전 동생들 표정이 떠올라 걱정됐다. 국민학교4학년 때 죽을뻔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서울에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문승협남매들이 집 근처 논에 물을 채워 만든 스케이트장서 신나게 얼음썰매를 탔다. 점심 즈음 지치고 허기져 집에 가니, 엄마가 라면을 끓여줬다. 배부르게 먹은 후 피곤이 몰려와 낮잠을 잤다. 이항리가 잠든 아이들을 남겨두고 외출했다. 문승협이 한참 뒤 잠에서 깼을 땐 의식이 가물가물하였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연탄가스에 중독된 상태였다. 미력하나마 움직여 동생들을 흔들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온 힘을 다해 2층에서 대문밖까지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때마침 발견한 옆집아주머니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대답할 기력조차 없어 손가락으로 계속 집을 가리켰다. 아주머니가 뛰어들어가 동생들을 살폈다. 연탄가스냄새에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고, 동치미국물을 가져다 떠먹였다. 그사이 문승협은 정신을 차리려 쌓인 눈을 집어 얼굴에 비볐다. 일부는 입에 밀어 넣어 목을 축였다. 잠시 후 아주머니가 문승협을 업어 집안으로 옮겼다. 동치미국물을 먹이고 급히 나갔다. 신기하게도 동치미국물효과인지 동생들이 눈을 떴다. 아주머니가 헐레벌떡 사 온 아이스크림을 먹고 모두 의식을 되찾았다. 이항리가 돌아와 아주머니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다. 자식들에게 첫마디가 아빠한테 비밀로 하자였고, 그다음에서야 건강을 확인했다. 말을 잘못하는 막내 문윤아는 젖혀둔 채, 문승협과 문현아에게 비밀이라며 거듭 신신당부하였다. 방안난로의 연탄불을 정리하고 난로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아 연탄가스가 퍼진 사고였다. 비밀은 아직까지 지켜졌다.


문승협은 당시 흐릿한 의식 속에서 봤던 동생들을 잊을 수 없었다. 오늘 힘겨워하는 동생들 얼굴 위에, 너무나 평온히 잠든 그때 모습이 투영됐다. 본인의 아픔보다 동생들을 염려하는 이유가 있었다.

국민학교4학년 문승협이 몽롱한 정신에 기필코 기어나간 것은 생존본능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동생들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기성세대로부터 유무언의 강요에 오랜 시간 숙달된 인식이자, 은연중 부모와 친인척들 기대에 부응하려는 의식의 발로였다. 장손장남이라는 무게가 그러했다. 11살이면 보호가 필요한 어린 나이였으나, 부족한 부모보살핌에도 의젓함을 넘어선 허구적 독립심이었다. 오빠로서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한다는 희생이자 강박이었다.

문승협은 상처받았을 동생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다 허기를 느꼈다. 동생들이 좋아라 하는 먹거리를 포장하여 집으로 걸음을 돌렸다. 약소하지만 음식을 먹으며 잠시라도 상심에서 벗어나길 기대하였다.

“현아야 윤아야, 거실로 나와봐. 얘들아, 얼른 나와서 이거 먹어. 엄마, 엄마도 이리 나와봐.”

“뭔데?”

“만두랑 떡볶이, 배고플까 봐 사 왔어.”

다들 분위기상 시큰둥했으나, 저녁을 먹지 못한 탓에 하나둘 젓가락을 들었다. 문윤아가 순대와 간을 안 사 와서 빵점이라며 투정 부렸다. 동생들을 우울한 함정에서 구해내는데 조금은 성공하였다.

“하하, 그러면, 순대와 간이 100점이라는 거야?”

“아, 좀 너무했나, 그럼 90점.”

“만두랑 떡볶이가?”

“어허 그럴 리가, 만두랑 떡볶이는 당연히 10점이지.”

“나는 오빠가 사 온 거면 뭐든 다 100점.”

“역시 오빠 맘을 알아준 사람은 우리 현아 밖에 없네.”

“마실 것도 사 왔냐?”

“응 엄마, 이런 음식을 먹을 때는 콜라가 제격이지.”

“어디 나도 한잔 주라.”

“잠깐만.”

문승협이 주방에서 컵을 가져와 차례대로 따라 주었다. 문윤아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 트림했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웃었지만, 이항리는 계속 시무룩하였다. 문승협은 기분이 나아진 동생들 모습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으나, 먼저 일어나 안방으로 간 엄마가 신경 쓰였다. 문윤아가 컵들을 부엌에 갖다 놓았다. 문현아는 먹던 자리를 치웠다.

문승협은 방에 들어가 책가방을 쳐다보았다. 다시 독서실로 가서 친구들을 만나기엔 너무 창피했다. 집에서 공부하기로 하고 암기과목을 꺼냈다. 국토지리문제집을 펼치니 일주일째 같은 페이지였다. 이번만큼은 핵심요약 한 페이지를 독파하겠다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10분도 안되어 송곳으로 찌르듯 머리가 또 아파왔다. 매번 반복된 증상에 괴로웠다. 관자놀이를 눌러보고 두통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유일한 약이 책을 덮는 것이지만, 그리하면 불안이 온몸을 휘감고 옥죄여왔다.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과 이러다 대학을 못 갈 수도 있다는 걱정, 이 생각 저 생각에 공부가 안되었다. 좌절과 절망에 빠져 엎드려 있으면 편안해지고 어느새 잠들곤 하였다. 이부자리에 누우면 아침까지 잠들어버릴까 두려워 책상에 엎드렸다. 오늘도 금세 잠들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꿈을 꿨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에 맡겨진 꿈, 할머니집에 혼자 남아있는 꿈, 주로 엄마와 이별하고 공포에 떠는 꿈이었다. 꼭 꿈말미에 엄마가 남겨두고 도망가면 혼절하다시피 울며 발광하다 잠에서 깼다. 어려서부터 고등학교3학년이 된 지금까지 숱하게 되풀이됐다. 어릴 적 반복된 이별불안이 뇌리에 박혀서였다.

언젠가 친척집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버려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처량한 처지를 강하게 부정하려고 자기 최면을 걸다 나타난 심리였다. 어찌 보면 무드셀라증후군 같았다. 과거 나쁜 기억을 빨리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겨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생존본능.

최근에는 자신을 주어온 아이로 의심하며 비약했다. 친자식이라면 부모와 친척들이 어찌 이리 대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풀고픈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아직 유전자검사과학이 없었다. 때늦은 사춘기더라도 문승협에게 떨칠 수 없는 가슴 아픈 문제였다. 자란 가정환경상 돌봄 받는다는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를 채우려는 욕망이 컸다. 특히 필요이상의 인정욕구가 문승협을 의젓한 애어른으로 만들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아동심리학자주장에 일리가 있었다. 아이들이 마음에 안 들거나 뜻대로 안 되면 징징대고 짜증 내듯, 나이에 맞게 시행착오를 거쳐가는 정상적 성장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른이 되어 심리현상에 기형적 퇴행이 발생할 수 있다.


문승협은 역시나 불쾌한 엄마와 이별꿈을 꾸었다. 촉촉해진 눈가를 닦는데, 문현아가 노크 없이 불쑥 들어왔다. 오늘은 왜 독서실에 안 가는지 물었다.

“음, 독서실비가 없어서.”

“왜, 용돈이 없어?”

“응, 오빠 지갑이 말라버린 지 오래야.”

“그럼 내가 좀 줄까?”

“하하, 아니야, 오늘은 그냥 집에서 하려고.”

“오빠, 없으면 말해 내가 줄 테니까, 알았지?”

“그래, 그럴게, 말이라도 고마워.”

다음날 아침 문승협이 독서실에 가려고 나섰다. 이항리가 불쑥 돈을 내밀었다.

“뭐야?”

“독서실비 없다며?”

“누가 그래?”

“현아가 그러더라.”

“감사합니다.”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아냐?”

이항리가 처음 독서실비를 주면서 온갖 공치사를 하였다. 문승협은 한참 들어야 해서 짜증 났지만, 독서실월권을 끊을 수 있는 거액이라 참았다. 오빠주머니사정을 말해준 동생을 곤란하지 않게 하려고 버텼다.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정도로 잔소리가 길었다. 손목시계를 자꾸 보며 빨리 가야 한다고 눈치 줘도 끝나지 않았다. 문현아가 보다 못해 오빠약속시간 늦겠다며 한마디 하자, 그제야 이항리가 놔줬다.


문승협은 어제 부모싸움을 목격한 친구들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일한 안식처가 친구였기에 창피를 무릅쓰고 독서실로 갔다.

“아그들아, 인자 학력고사가 50일밖에 안 남았어야.”

“뭔 세월이 이리도 빨리 가까잉.”

“우린 가만히 있는데, 세월은 뭐가 그리도 급한지.”

“승협아, 니는 괜찮냐?”

“에휴, 나도 모르겠다. 책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책을 안 보면 걱정만 앞서고.”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뭐?”

“어제 무담시 느그 집에 밥 묵는다고 가갖고는.”

“그 그러게, 너희들한테 만큼은 그런 우리 가정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데.”

“승협아, 니 기분 으짠지 알어. 괜찮해, 부부싸움 안 하는 집 있으믄 어디 나와보라고 그래.”

염병 썩을 시끼들, 배부른 소리들 한다, 느그는 그러코롬 싸우는 부모라도 있제.”

“그래, 영기 너 앞에서는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점잖해서 말을 안 한께 그라제, 느그도 한번 고아 돼봐라, 얼매나 서러운가.”

“지랄, 그런다고 고아를 돼보라고 하냐?”

“니가 이제까정 한 번도 말 안 해서, 우리는 느그 집이 화목한 줄로만 알았다잉.”

“너는 언제 말했냐, 마찬가지지.”

“아무튼, 니도 심란하겄다.”

“아야, 오늘 개천절인디, 어디 바람이나 쐬러 가끄나?”

“그라자, 한민족의 시조이신 단군할아버지날인께.”

“야, 쑥이랑 마늘 챙겼냐?”

“허허, 연설하네, 우리 오랜만에 유달산이나 가보까?”

셋은 숨을 몰아쉬며 유달산 일등바위정상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훑더니 더운 체온을 훔쳐 달아났다. 모처럼 가슴이 탁 트이고 속이 다 후련했다. 각자 동서남북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승협은 지난날을 회상하였다. 이자연과 도안광산사택 뒷산에 올라간 일, 최선경과 유달산 동굴에서 보낸 날, 정난희와 조각공원을 거닌 일. 그때마다 상황과 경치가 달랐지만, 모두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것도 잠시, 우울한 기분이 좋은 기억들을 덮어버렸다. 힘겹고 악몽 같은 사건들만 간추린 듯 하나하나 떠올랐다. 부모와의 잦은 이별과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생활, 부모의 극단적 무관심과 무언의 강요, 부모싸움과 고부갈등의 가정불화, 부모와 친인척들의 부담스러운 과잉기대, 태어나보니 장남장손일진대 모범이 되고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 온갖 스트레스와 짓눌린 응어리에 머리가 아팠다.

불쑥 죽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이등바위와 마당바위를 올랐을 때 절망하던 예전처럼.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좌절에 빠뜨린 과거를 겨우 물리쳤으나, 현실 문제들이 다시 괴롭혔다.

난관에 봉착한 대입학력고사공부가 먼저였다. 참고서와 문제집을 보면 글씨가 춤췄다. 몇 번을 읽어도 헷갈리는 문해력. 책을 볼 때마다 송곳으로 찌른듯한 두통과 피로감.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대입시험은 점점 다가오는데, 어떻게 극복해서 성적을 올려야 할지 고민됐다.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이 어떤 인생을 만들어줄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목표대학과 진로를 결정 못한 조바심까지 들쑤셨다. 계속된 부모싸움, 여자친구 정난희와 이별도 가슴을 후벼 팠다. 또다시 삶을 체념하고픈 생각이 고개 들었다. 얼마 전 정신과 상담했을 때 의사선생말이 훅 들어왔다. ‘자살충동을 느낄 수 있다’.

암울한 감정들을 촉발시킨 원인이 있었다. 잘 넘어갔던 중2병과 사춘기가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 고3병이 주였다. 재생불량성빈혈로 체력과 건강도 문제였다. 누구도 문승협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방황을 맞이한 문승협자신도 알 수 없었다.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 되어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하였다. 자기 포용과 자기 용서가 부족한 문승협에게 치명적이었다.

얘들아, 성문종합영어가 무엇을 종합하고, 수학의 정석이 무슨 정석을 말하는지 아냐?

“영문법독해를 종합하고, 수학풀이 정석이겄제.”

“아니,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냐고.”

“대학 갈 때 점수?”

“느그 내가 퀴즈 낼 텐께 맞춰봐.”

“맞추믄 뭐 줄건디?”

“이따 짜장면 사께, 됐냐?”

“문제가 뭐여, 언능 말해봐.”

“꺼꾸로 읽으믄 반대 뜻이 되는 말은?”

“수수께끼어?”

“연설하네, 우리가 항시 쓰는 말 중에서 말이여.”

“뭐가 있으까?”

“자살.”

“그러네, 거꾸로 하믄, 살자.”

“음, 방해?”

“해방, 그래, 그것도 맞어.”

“하나만 더 맞추믄, 진짜로 내가 짜장면 산다.”

“또 뭐가 있을 라나.”

“난 모르겄다, 뭔디, 뭐여?”

“내 힘들다.”

“다 들 힘내?”

“잉, 다들 힘내자고.”

“그라자, 우리 힘내자.”

천영기가 문승협마음을 읽은 마냥 위트 있는 답을 내놓았다. 무거운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영기야, 너는 조금 전에 무슨 생각했어?”

“저그 하늘에 계신 울 아부지하고 엄니.”

“담이 너는?”

“현진이랑 으짤지, 어느 대학 무슨 과 갈지 고민했어.”

“너는 아?”

“나는, 음, 모르겠다.”

“지랄, 니는 우리 대답 다 들어놓고 말을 안 하냐?”

“생각이 많아서 그래, 너무 많아서 다 말할 수가 없어.”

“고민만 하믄 답이 나오냐, 말이라도 해야 속편하제.”

“아야, 인자 하산하자.”

각자 당면한 고민들을 생각했었다. 비록 답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마음은 조금 홀가분했다.

이담이 일어나면서 카세트를 틀었다. 하필 정난희와 무용실에서 들었던 ‘Poco의 Sea Of Heart Break’가 나왔다. 문승협은 노래를 음미하며 내려갔다.

‘저 항구의 불빛은 나를 위해 빛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바다에 표류하는 배와 같아요~.’

‘어떻게 당신을 잃게 되었을까요, 내가 뭘 잘못했나요, 왜 날 계속 헤매도록 내버려 두었나요~.’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나요, 다시 한번 당신 품으로. 나를 구하러 와주세요, 어서 내게 와줘요, 이 바다로부터 나를 당신 곁으로 데려가 줘요. 이 상심의 바다에서 사랑을 잃은 외로움에 빠졌죠, 당신과의 추억은 너무나도 좋았어요, 다시 내 사랑이 되어주길 바래요, 그대여 나는 눈물의 바다, 상심의 바다를 헤매고 있어요. 상심의 바다에서 나는 점점 죽어가고 있어요.’

문승협은 울컥 눈물이 났으나 친구들 때문에 꾹 참았다. 마음속으로 가사를 되뇌며 유달산아래 정난희의 집과 무용연구소를 바라보았다.


유달산을 다녀온 이후, 천영기가 빈번히 독서실자리를 비웠다. 행동거지가 옛날과 딴판으로 변해갔다. 욕을 빠트리면 대화가 안 될 만큼 말투도 거칠어졌다.

“영기야, 무자게 오랜만이다잉?”

“오랜만은 뭐, 맨날 보는 쌍판대기 지겹다 지겨워.”

“너 요즘 공부는 안 하고,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

“씨발, 니가 알아서 뭐 할래?”

“아야, 뭔 말을 그리 섭하게 하냐?”

“염병하네, 섭할 것도 쌨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인데?”

“신경 끄란께. 오지랖 떨덜 말고, 느그 할 일이나 잘해.”

문승협과 이담의 물음에 날 선 천영기답이 돌아왔다. 천영기엄마가 돌아가신 후 달라진 것으로 보아, 상실감과 고아 된 외로움으로 알았다. 친한 친구로서 헛헛함을 달래주려 하였지만, 천영기가 회피했다.

며칠 후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 천영기동네에 사는 김철종말에 따르면 집안갈등이었다. 천영기가 나이차이 많은 형에게 괄시받고 재산상속문제로 다퉜다. 형뜻에 따르지 않으면 한 푼 없이 쫓아내겠다고 협박당하였다. 지적장애누나를 폭행한 데다, 자꾸 말썽 피운다며 보호시설로 보내버렸다. 부모대신 부양의무를 회피한 채 재산만 탐하는 형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나마 착한 형수에게 보살핌 받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문승협과 이담은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김철종을 만난 다음날 천영기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느그들이 뭘 안다고 깝치냐 깝치길?”

“아야, 우리도 모른체끼 하까 마까 무자게 고민했어야.”

“영기야, 너 얼마 전에 우리 집 놀러 왔다가, 우리 엄마아빠 싸운 거 적나라하게 들었지?”

“그래서, 으짜라고?”

“너 그때 담이랑 가면서 나한테 한말 기억나?”

“기억 안 나, 기억 안 난단께?”

“네가 그랬어, 승협아 지금 니 기분 으짠지 알어라고. 나도 지금 니 기분 으짠지 알어.”

“…….”

“그래, 우리 부모가 싸우는걸 너희들한테 들키니까, 정말 쪽팔려서 죽고 싶더라.”

“…….”

“그런데, 영기 네가 내 기분 안다는 말에 괜찮아졌어, 왜냐면 우린 친구니까.”

“맞어, 우리 얼척없는 친구잖애, 안 그냐?”

“후, 그래, 사실이어. 근디, 나를 동정하진 마라잉, 알겄냐? 만약에 그라믄 확 조사불란께.”

“미쳤냐, 너를 왜 동정해, 우리도 지금 죽겠는데.”

“염병하네, 그라믄서 친구라고 운운하냐?”

“하하하, 친군께 다 그런 거여.”

김철종이야기는 안타깝게도 사실이었다. 천영기가 조금 나아진듯했으나, 여전히 독서실을 자주 비웠다. 여자친구 백미정이 찾아와 행방을 물을 정도였다.

금요일저녁 천영기가 말없이 독서실을 빠져나갔다. 문승협과 이담이 조용히 뒤따랐다. 천영기는 중앙시장 근처 초원다방으로 들어갔다. 지난 3월 말 셋이서 장정구권투경기를 봤던 곳이었다. 문승협과 이담이 서로 앞장서라며 등 떠밀다 가위바위보를 하였다. 문승협이 져서 조심조심 올라갔다. 고등학생출입금지라 다방문을 빼꼼히 열었다. 군데군데 어두침침한 백열등만 켜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문을 확 당겼다.

“어이 승협씨, 오랜만이요잉?”

“오매 깜짝아, 어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 야심한 시간에 여그는 으짠 일이시까?”

“아, 누구 좀 찾으러 왔어요.”

“나는 아니고?”

“제가 미스리를 왜 찾아요?”

“오호, 나를 기억하네잉, 나 보고자퍼서 온 거 같은디?”

“아 아니에요, 친구가 이리 들어가길래 따라왔는데.”

“아따, 말이라도 좀 보고 자펐다고 하믄 어디 덧난가?”

“혹시, 내 친구 여기 안 왔어요?”

“딴 친구 두 명하고 저그 안쪽에 있어, 불러주까?”

“아뇨 됐어요. 근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요?”

“야한 영화 볼라고.”

“야한 영화요?”

“잉, 야한 비디오, 포르노 말이어.”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호호호, 으째 도망치는 사람멩키로 가분가? 기다릴 텐께 담에 또 놀러 오소잉?”

다방레지가 부끄러워하며 돌아선 문승협팔을 덥석 잡았다. 뿌리치듯 손을 떼내고 부리나케 내려간 문승협뒤통수를 향해 놀렸다.

“담이야, 영기 여기에 있데.”

“뭐여, 니 눈으로 본거 아니고?”

“응, 전에 그 다방레지가 말해줬어.”

“근디, 뭘 그리 당황해서 왔냐?”

“야, 여기서 포르노영화 틀어준대.”

“포르노를? 여그서?”

“응, 별 희한한 다방도 다 있다, 그치?”

“잉, 세상말세다야.”

둘은 심야시간 다방에서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독서실로 돌아가면서 천영기가 미쳤다며 이구동성으로 뒷담화했지만, 어떤 포르노영화인지 은근히 궁금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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