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애정결핍증? - (2)
며칠 후, 이항리는 문승협과 문현아에게 알리지 않고 새 학기시작과 함께 다닐 수 있도록 집 근처 국민학교에 전학수속을 마쳤다. 문승협이 원치 않은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가 설레하는 민족 대명절 설날이 코앞이었다. 박옥춘은 설음식 장만을 위해 며칠째 시장을 다녀왔으나 아직도 살 것이 있어 또 시장 갈 차비를 했다.
“아따, 사도사도 뭐가 빠진단께. 아야 에미야, 오늘도 시장가야겄다야.”
“네, 그래요 어머니. 근데, 오늘은 뭘 사려 구요?”
“떡방앗간도 가야 허고, 병어랑 거시기 뭐냐 꼬막, 꼬막도 사야겄다. 그라고, 승협이도 델고 가라잉.”
“승협이는 왜요, 집에서 애들 돌봐야 하는데.”
“승협이는 가래떡 지키고 있으라 허고, 너랑 나랑은 장 보믄 안 쓰겄냐.”
“네, 알았어요.”
“승협아, 우리 장손 어디 갔냐?”
“네 할머니, 저 부르셨어요?”
“잉, 할무니 허고 장 보러 가게 언능 준비해.”
“저도 가면 동생들은요?”
문승협은 며칠 동안 동생들을 돌보느라 집에만 있어서 갑갑하고 심심했다. 그러던 차에 할머니가 같이 시장에 가자고 하니 들뜨고 신났다.
“오늘은 고모가 집에 있은께 괜찬해.“
“작은 고모가요?”
“아야 희경아, 우리 시장 갈란께, 니가 애들 좀 보고 있어라잉?”
“승협이는 이라우?”
“델고 갈란다.”
“알았어라, 다녀오쑈.”
문승협은 작은 고모말이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양말을 신었다.
“가만있어봐라, 방앗간도 가야 한께 항동시장으로 가자. 에미야, 얼른 택시 잡아라잉.”
“네 어머니. 택시, 택시! 항동시장으로 가주세요.”
문승협일행은 5분도 채 안되어 항동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입구에 있는 떡방앗간으로 들어갔다.
“아자씨, 오랜만이요잉, 잘 있었소?”
“아따 엊그저께도 시장가시는 거 봤그만, 뭣이 오랜만이어라우.”
“그 짝에서 봤는갑그만, 나는 못 봤는디.”
“허허허, 꼭 눈을 마주쳐야 본거다요? 본 쪽에서 어디 시장가는 갑다 하믄, 그것이 본거제.”
“호호, 아자씨가 여간 재밌단께, 변한 게 없소잉.”
“사람이 변하믄 묘똥에 들어가야 한디, 변하믄 쓰겄소? 건강하시지라우?”
“땅만 파믄 들어갈 것 같소야, 인자 늙어서 걷기도 숨차요.”
“땅이 얼어서 파질란가 모르겄소. 하여튼, 맛있는 거 많이 잡숫고 부지런히 움직이쑈, 그래야 오래 살아라우. 근디, 야는 누구요?”
“아, 우리 장손이어라우. 잘생겼지라, 호호호.”
“안녕하세요.”
“옴마, 이놈이 그 서울놈이요? 얼굴도 희끄무레하니 기생오랍씨처럼 잘 생겼다. 몇 살 묵었냐?”
“12살 이요.”
“아저씨가 알아서 해주실 거니까, 너는 지켜보고만 있어, 알았지?”
“알았어 엄마, 빨리 갔다 와.”
“그래.”
“아야 에미야, 얼른 가잔께.”
“네 어머니.”
박옥춘은 방앗간아저씨에게 주문한 후 문승협을 혼자 남겨두고 이항리와 시장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어선지 문승협 앞으로 손님이 3명밖에 없었다. 문승협 차례가 됐을 때는 설을 앞두고 가래떡을 하려는 사람이 점점 몰려들었다. 방앗간아저씨가 작업 중 말이 많았다. 방앗간아주머니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문승협에게 계속 질문했다.
“아야, 서있으믄 다리 아픈께, 거그 의자에 안거.”
“네, 감사합니다.”
“아따 그놈 인사성 하나는 좋네. 서울 어디 사냐?”
“효자동이요.”
“효자동? 효자동이믄 서울 어디 만침이대?”
“네? 효자동이 효자동에 있죠?”
“뭐냐 거시기, 크고 유명한데 있을 거 아니어.”
“아, 경복궁? 광화문?”
“와따 그라믄 서울 한복판에서 왔그만. 너는 좋겄다, 좋은데 살아서, 허허허. 근디 저 놈시키 똑 부러진다잉, 경복궁도 알고 광화문도 알고, 똑똑하네.”
방앗간아저씨의 이런저런 질문에 문승협이 귀찮아질 즈음, 세련되게 잘 차려입은 아주머니와 첫눈에 봐도 키 크고 예쁜 여자아이가 방앗간으로 들어섰다. 문승협은 그 여자아이를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주위는 안 보이고 그 아이만 눈에 들어왔다. 처음 느껴본 이상한 경험이었다. 이내 현실로 돌아와 그들을 지켜보았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메, 사모님이 어쩐 일이요, 가래떡 뽑으러 왔소?”
“네, 잘 계셨죠?”
“아따 두말하믄 잔소리지라우.”
“손님이 많네요? 어쩐다, 기다려야 되나.”
“그냥 거그다 두고, 가서 일 보고 오쑈, 순서 되믄 내가 알아서 할 텐께.”
“그래도 돼요?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미안해서.”
“뭔 걱정을 사서하요, 괜찬해라우. 다 아는 처지에 그러고 사는 거제, 선경이도 있소 안.”
“그럼 선경아, 여기 좀 있을래? 엄마가 시장에 얼른 다녀올게.”
“아야 선경아, 거그 기생오랍씨같이 생긴 놈이랑 야그 하믄서 지둘리고 있어, 아자씨가 곰방 해줄 텐께.”
“네. 엄마 빨리 갔다 와.”
“걱정 붙들어 매고 언능 댕겨오쑈, 병원하고 약국은 다 잘되지라우?”
“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선경아, 엄마 다녀올게.”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아주머니와 다른 아주머니들은 쌀이 닮긴 대야를 줄 세워놓고 쫓겨가듯 시장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방앗간아저씨의 공평한 인심이 있어 가능했다. 방앗간에는 방앗간아저씨부부와 선경이라는 여자아이, 문승협만 남겨졌다.
“가만 보자, 선경아, 너는 몇 학년 때 전학 왔었냐?”
“네?”
“너도 서울서 전학 왔었제?”
“네, 4학년이요.”
“니 옆에 있는 놈도 서울서 왔단다야. 아따 뭐 하냐, 언능 서로 인사해.”
선경이라는 아이와 문승협이 멋쩍게 있자, 방앗간아저씨가 둘의 어색함을 풀어주려 인사하라고 하였다. 둘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 눈치 보았다.
“아야, 머슴아 시끼가 먼저 당당하게, 나 누군디 하고 인사해야제 뭐 하냐?”
“아 안녕, 난 승협이야, 문승협.”
“안녕, 난 최선경이야.”
문승협은 당황해서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눈가는 데로 흘깃 보며 인사를 건넸지만, 최선경은 옅은 미소로 문승협을 빤히 쳐다보며 인사했다.
“허허허, 영락없는 기생오랍씨란께. 저것 보소 저거, 에끼 사내시끼가 순해 빠져 갖고는.”
“어허, 일은 안 하고 뭔 염병하요야?”
“아따, 임자는 뭔 말을 그렇게 섭하게 한가.”
“아그들이 그라믄 다 그라제, 지금 처음 보고 남녀 칠 세 부동석인디, 손이라도 잡아야 쓰겄소?”
“내 말은 남자가 먼저 당당하게 거시기하라는 말이제, 내가 언제 손잡으라고 했단가?”
“아이 시끄럽소야, 말이 말 같아야 말이제. 아그들한테 신경 끄고 얼른 일이나 하쑈, 지금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하그만 농담 따먹기 하고 있네 그냥.”
방앗간아저씨가 쑥스러워서 어찌할 바 모르는 문승협을 보고 놀리자, 방앗간아주머니가 남편의 쓸데없는 오지랖에 버럭 했다. 문승협은 순간 통쾌해 소리 내서 웃을뻔했으나 꾹 참았다. 최선경도 입을 가리고 웃었다. 마치 재미있지라고 동의를 구하듯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문승협은 그제야 동감한다는 구실로 최선경을 바라봤다.
“몇 학년이야?”
“어, 이제 5학년에 올라가.”
“그럼 나랑 같은 학년이네. 방학이라 놀러 왔니?”
“어? 응. 아 아니.”
“무슨 대답이 그래? 응했다 아니했다.”
“방학이라 놀러 온 것도 맞는데, 전학 올 거래서.”
“아 그래? 어디로, 어느 학교?”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아마 이 근처겠지.”
“이 근처면 유선국민학교나 서해국민학교 둘 중 하나겠네, 유선으로 와라, 유선.”
“글쎄, 엄마 오면 물어볼게.”
“서울에서는 어디 다녔어? 나는 삼선국민학교 다녔었는데.”
“나는 효자국민학교.”
“그래? 그럼, 너 효자동에 사니?”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나도 효자동에서 살았거든, 호호호, 신기하다.”
“진짜? 신기하다.”
그때 박옥춘과 이항리가 시장에서 산 물건을 양손 가득 쥐고 방앗간으로 들어왔다. 문승협이 엄마에게 달려가 어느 학교로 전학하는지 물었다. 유선국민학교라는 말에 최선경을 바라보았다. 최선경도 같은 학교라는 사실을 듣고 미소 지었다. 둘의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으째, 다됐소 안 됐소?”
“해가 중천이요, 다 됐어라우.”
“에미야, 빠진 거 없지야? 이제 다 됐은께, 얼른 택시 잡아타고 가자.”
“네 어머니.”
“그라믄 우리는 갈라요, 아자씨 고맙소.”
“아따 별말씀 다하요, 돈 받고 당연한 일인디. 조심히 살펴가쑈잉.”
박옥춘과 이항리가 물건을 챙겨 들고 방앗간을 나섰다. 문승협은 머뭇머뭇 뒤따라가면서 최선경을 보았다. 최선경이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문승협도 최선경처럼 하고 싶었으나 마음과 달리 손을 살짝 들다 말고 나와버렸다. 방앗간을 나와서도 최선경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엄마가 방앗간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아 아쉬움이 더욱 컸다.
박옥춘과 이항리가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물건 산 것과 음식 만들 것 등 많은 이야기를 했다. 문승협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최선경과 나눴던 몇 마디와 최선경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왔어야 했다는 미련으로 최선경생각뿐이었다. 최선경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잊히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신기한 체험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문현아와 문윤아가 집에 온 엄마에게 배고프다며 보챘다. 이항리가 시장에서 사 온 주전부리를 펼쳐놓았다. 서로 먼저 먹겠다며 아옹다옹하는 딸들에게 사이좋게 나눠먹으라고 야단쳤다. 문승협은 엄마의 호통에 깜짝 놀랐다. 비로소 최선경이라는 아이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설날연휴 때문에 광산을 둘러본 문재환이 설을 이틀 앞두고 집에 왔다.
“어머? 어머니, 아버님 오셨어요. 아버님,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죠? 얘들아, 할아버지 오셨다.”
“할아버지, 안녕하셨어요?”
“잉, 잘 있었냐?”
“오메, 이렇게 온 것 본께, 그래도 설날이라고 까지가 소식은 보냈는 갑써.”
“뭔 또 실없는 소리 한가, 반가우믄 반갑다고 하믄 될 것을.”
“아휴, 어머님은 아버님 언제 오냐고 계속 궁금해하고는, 오시니까 그러네요.”
“춥다, 언능 들어가자.”
박옥춘이 궁금했던 남편을 막상 대면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퉁명스럽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사를 던졌다. 문재환은 인사를 받으면서도 그런 태도를 못마땅해하였다.
이항리와 아이들이 문재환에게 큰절을 했다. 윗목에 나란히 않아 말씀을 기다렸다. 아이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으나, 이항리표정이 어두워졌다.
“승협이는 공부 잘하냐?”
“네 할아버지, 우 하나에 전부다 수예요, 그리고 반장 했어요.”
“아따 우리 장손 장하다, 하하하. 우리 현아는?”
“오빠보단 못하지만, 저도 잘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도 잘해. 윤아는 그림도 잘 그려, 그려볼까?"
“야, 너는 학교도 안 다니면서 무슨.”
“언니만큼 크면 나도 잘할 거야, 그치 엄마.”
“그래, 윤아도 잘할 거야. 승협아, 애들 데리고 건너 방에 가서 책 읽고 놀아라.”
할아버지 문재환의 칭찬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항리가 아이들을 건너 방으로 쫓아 보냈다. 문승협은 그늘진 엄마모습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짐작했다. 그동안 설날에 아빠가 오는지 궁금해도 눈치 보느라 물어볼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와 엄마의 대화를 엿듣고 못 온다는 걸 알았다. 대화 중 간간이 들리는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에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설을 하루 앞둔 날 문재환의 둘째 아들 문경빈가족과 셋째 아들 문경철가족이 왔다. 삶의 터전이 서울인 문경빈과 윤옥희부부는 서울말씨에 전라도사투리가 묻어났다. 문경철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부산에 살아서 서울말씨에 경상도와 전라도사투리가 섞였으나, 아내 정영숙은 부산에서만 자라 경상도사투리가 심했다.
“아부지, 절 받으쑈.”
“아야, 우리도 같이 하자, 우리도 방금 도착해서 아직 절을 못했다.”
문경철이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내와 두 아들 문승대, 문승지를 나란히 세워 절하려 했다. 조금 먼저도착한 문경빈도 아내와 두 아들 문승희, 문승현을 나란히 세웠다. 다 같이 큰절을 하였다.
“아버지, 건강하시죠?”
“잉, 느그도 건강하지야?”
“예, 다 건강하요.”
“그래, 차 갖고 왔냐?”
“서울서 여기 오려면 기름이 무자게 들어가는데, 기름값도 없고 해서 기차 타고 왔어요.”
“우리도 길이 험하고 해서, 그냥 기차 탔어라우.”
“아따, 기차를 움직일라믄 돈이 꽤 들텐디, 돈 많이 벌었는갑다잉? 허허, 오느라 고생들 했다.”
“하하, 고생은요 무슨. 애들 데리고 새벽기차 타느라 잠을 설쳐서 그렇지, 괜찬해요.”
작은며느리들이 시아버지의 안부를 들으면서도 주방 쪽을 힐끔거렸다. 집에 들어오면서 마중 나온 맏며느리 이항리와 인사를 나눴지만, 음식장만 하느라 고생하는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었다.
부자간 인사를 곁들인 화기애애한 농담이 끝나자 고부간 안부인사가 이어졌다.
“어머님도 건강하셨죠?”
“나야 느그들 기다리믄서 목이 좀 빠졌제 건강하다.”
“호호호, 어머님요,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더. 근데예, 고모들은 어데 갔는 갑지예?”
“잉, 둘 다 친구 만나러 갔어야, 곰방 올 거다.”
“동서, 형님 혼자 고생하시는데, 우리는 이만 주방으로 갈까? 그래도 되죠 어머님?”
“고생은 뭔 고생아, 내가 다했는디. 인자 왔은께 좀 쉬어라.”
“어데예, 점심도 차려야 되는데 가봐야지예.”
작은며느리들이 시부모에게 인사를 마치고 주방일을 도우러 일어나려 했다. 불만 섞인 시어머니말에 멋쩍어 주춤하다 주방으로 갔다. 문경빈이 이를 지켜보다 한마디 참견하였다.
“엄마는 맨날 형수한테만 뭐라 해. 형수가 일해서 고생이 아니라, 엄마시집살이에 더 고생이요, 하하하.”
“아니 그라믄, 큰며느리가 설음식 차리는 게 당연하제 뭐대? 시집살이야, 염병할 소리 하고 있네. 시집살이는 무슨, 니는 따순밥 먹고 뭔 헛소리하냐?”
“아이고, 우리 엄마 화났나 보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엄마는. 그냥 형수가 고생한다고 해도, 엄마고생은 다 안다니까. 말이 나와서 말이지, 며느리 넷 중에 엄마시집살이 당하고 산 사람은 형수 밖에 없잖소.”
“아니, 내가 시집살이를 하라고 했냐 뭣을 했냐?”
“하하, 알았소 알았어. 알았은께, 그만합시다 엄마.”
“연설하네, 말은 지가 꺼내놓고 그만하자고?”
“근디 포항은 언제 온다요? 전화는 왔었소?”
“잉, 거그는 처갓집 들렸다가 낼 아침에 온다드라.”
“엄마, 군기는 포항을 잡아야 겄그만 그래.”
“맞어, 막내가 제일 먼저 와서 형들을 맞이해야지, 항시 명절날 당일아침에 온다니까.”
“아야, 거그는 냅둬 부러 음식도 못한디 와봤자 짐만 돼 짐.”
“거보쑈, 형수가 없으믄 일이 안된단께, 둘째 셋째도 다 오늘 왔으니 말이요.”
“쓰잘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점심 차릴 때까지 눈이나 좀 붙여라잉.”
문재환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문경빈만이 이항리를 편들어주었다.
박옥춘은 항상 큰며느리 이항리를 못마땅히 여겼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첫 번째는 큰아들 문경준이 친구를 좋아하고 머리 좋은 것만 믿다가 사업에 실패한 것이나, 멋 부리고 놀기 좋아해서 가정에 불성실한 것을 내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시어머니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동네사람들을 만나거나 친정과 진외가에만 가면 시집살이를 푸념하며 뒷담화를 한다든지, 큰며느리로서 시어머니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이 원인이었다. 특히 박옥춘은 작은며느리들과 같은 비교대상이 있거나 친척들을 만났을 때, 이항리의 잘못을 싸잡아 흉보고 야단치는 등 시집살이를 더욱 심하게 했다. 고부갈등의 골이 무척 깊었다.
이러한 고부갈등은 장손이자 장남인 문승협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이 없을 때 문승협을 앞에 앉혀놓고 서로 흉보거나 욕하기 일쑤였다. 문승협은 할머니와 엄마의 갈등을 잘 모르는 상황임에도, 그때마다 두 사람의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만도 감당하기 힘겨운데, 부모를 중심으로 한 할머니와 친인척들의 반목 사이에서 늘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문승협은 이런저런 어른들의 영향으로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더욱더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남자어른들이 늦은 점심을 먹고 피곤하여 낮잠 잤다. 여자어른들은 전 부치고 생선을 굽는 등 설음식을 장만했다. 아이들은 문승협이 대장이 되어 동네 어귀에서 숨바꼭질과 다방구를 하며 한바탕 놀았다.
놀이에 지친 아이들이 방에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아침나절 친구를 만나러 갔던 문희숙과 문희경이 들어왔다..
“오메, 내 예쁜 조카들 왔는가?”
“어, 고모다, 안녕하세요 고모.”
“고모 잘 있었나.”
“아야 승희야, 너는 뭘 먹었는디 이렇게 뽀얗대?”
“이것이 누구여, 아따 우리 승대 엄청 커부렀다잉.”
“아가씨, 잘 있었어요?”
“고모들 어데 갔다 왔는겨?”
“마실 갔다 왔어라, 올케언니들 오느라 고생했소.”
“근디, 우리 오빠들은 어딨소?”
“느그 오빠들 여기 있다.”
“워메, 우리 오라버니들 잘 계셨단가요?”
“그람, 잘 있었은께 여그 와있제. 느그들도 잘 있었는가 부다잉?”
“그라지라우, 그란께 동상들이 안부인사 안 하요.”
“서울오빠는 얼굴이 까만 것이 맨날 술만 잡숫는가 보네, 인자 술 좀 그만드쑈.”
“아야, 너는 술이나 받아 주믄서 그런 말 해라.”
“호호호, 부산오빠는 좀 야위었네, 무슨 고민 있소?”
“사는 게 다 고민이제, 허허허.”
“막내오빤 언제 온다요?”
“아 거기야 맨날 당일 날 아침 아니냐, 내일 아침에나 오겄지 뭐.”
“그라믄, 지금쯤 처갓집에 왔겄그만.”
“엄마, 식혜 됐소? 식혜 좀 주쑈, 목이 좀 칼칼하네.”
“엄마, 서울오빠가 식혜 달라하요, 식혜 있소?”
“잉, 여그 있다. 아야, 얼른 식혜 좀 갔다 줘라.”
“아따, 시원한 것이 좋다야, 식혜는 역시 우리 엄마식혜가 최고여.”
“아야, 방금 뭐라 하냐?”
“어머니 식혜가 최고라 하네예.”
“호호, 염병한갑다. 식혜믄 다 똑같은 식혜제, 내가 만든 거라고 뭐 다르다냐? 호호호.”
문희숙과 문희경이 설날을 맞아 찾아온 가족들과 인사 나눴다.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박옥춘이 자랑하는 식혜와 유과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오랜만에 만남의 회포를 풀었다.
저녁식사 후 남자들은 화투를 쳤다. 박옥춘이 TV 보는 두 딸과 손주들 곁에 누워있었다. 며느리들은 나물을 무치는 등 막바지 설음식장만에 여념 없었다.
TV를 보다 졸다 하던 박옥춘이 갑자기 크게 한숨 쉬며 일어나 앉아 문경빈에게 물었다.
“아야 승희애비야, 그 썩을 놈 준배말이다, 그놈은 못 잡냐?”
“맘먹고 도망간 놈을 어떻게 잡겄소, 나름 알아보고 있은께 곧 소식이 있을 거요.”
“아야, 너는 경찰이믄서 형 일인디 신경도 안 쓰냐?”
“아따 엄마는, 내가 으째 신경 안 쓰겄소, 엄마말대로 형 일인디.”
“그라믄 어떻게 좀 해봐야?”
“알았단께라우, 알아보고 있단께는 참말로. 엄마가 신경 쓴다고 안될 일이 되고 될 일이 안 되겄소? 엄마는 건강 생각해서 그냥 가만히 있으쑈, 내가 알아서 할란께.”
“세월 다 보내고, 그놈이 돈 다 써 불고 난 다음에 잡으믄 뭐 한다냐, 잡을라믄 하루라도 빨리 잡아야제.”
“오메, 삼봉 든걸 깜빡했어야. 아따, 엄마 땜시 삼봉 든 걸 계산 안 했네.”
“염병하네, 너는 시방 삼봉이 중하냐?”
“하하, 알았어라 엄마. 알았은께, 그 이야기는 인자 그만하쑈, 얘기해 봐야 속만 상한께.”
“속이 상할 때 상하더라도, 나는 야그해야 겄다.”
“아따, 설날 앞두고 손주들도 다 있는디, 그만하소.”
“낼이 설인디, 승협이 애비가 없은께 속이 상해서 안 그라요. 끄니는 챙겼으까? 뭔 지랄한다고 친구친구해서.”
“어허이, 그만 하란께는 참말로.”
“알았소, 알았단께. 승질머리 하고는 그냥, 꽥꽥 소리만 지르믄 단가? 늙어도 그놈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어, 사그라들지를 안 해.”
박옥춘은 남편 문재환의 호통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친구에게 사기당한 문경준이야기는 표면상 마무리되었으나,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어른들 이면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박옥춘의 문경준에 대한 속상함과 화는 다음날 설날 차례를 지내고 세배하면서 다시 터졌다.
집안서열에 맞춰 가족단위로 세배하였다. 세뱃돈과 덕담을 주고받을 때 박옥춘이 긴 한숨을 쉬었다.
“에휴, 떡국은 먹었으까?”
“엄마, 그만하쑈 좀. 누군 큰오빠 생각 안 하겄소? 다들 눈치 보고 바늘방석이그만 그러네.”
문재환의 부릅뜬 눈빛과 문희경의 말 한마디로 진정되었다. 문희경의 말이 맞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이항리와 문승협은 분명히 눈치 보고 있었다. 문승협의 사촌동생들이 부모에게 선물 받은 설빔을 입고, 세배와 세뱃돈, 주고받는 덕담에 그들의 사소한 웃음과 행동까지, 지금 만큼은 이항리와 문승협 그리고 문현아와 문윤아에겐 부러움이었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문경준이 이 자리에 없다는 이유로 의기소침했다.
“엄마, 우리 아빠는? 우리도 엄마아빠한테 세배하고 세뱃돈 받을래, 응?”
“윤아야, 넌 왜 쓸데없는 말을 해.”
문승협이 천진난만한 막냇동생 문윤아말에 순간 당황하고 화가 났다. 자신도 모르게 문윤아손을 낚아채 당겨 안으며 입을 막았다.
“아, 아파 오빠. 아우, 숨 막힌다고.”
“어, 미 미안. 제발 오빠 옆에 가만히 좀 있어라.”
문승협은 철없이 짜증 내는 막냇동생입에서 얼른 손을 떼어 어깨에 얻었다. 태연히 다정한 척하였으나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울컥했다. 어금니를 깨물고 꾹 참으면서 옆에 서있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마주친 엄마눈에는 남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눈물이 고여있었다. 너는 괜찮냐고 묻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적어도 이항리와 문승협은 많이 슬펐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교감하며 위로했다.
정적이 흐르며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는 아침에 온 셋째 포항작은아버지 문경민가족에 의해 바뀌었다.
“할아부지할무니하고 각자 부모한테 세배했은께, 인자 큰엄마아빠와 작은엄마아빠한테도 세배해야제?”
“맞어, 우리 고모들도 세배받아야겄다.”
“그라믄, 오빠랑 올케언니들도 다 앉고, 우리도 옆에 같이 앉아서 세배받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느그도 새해 복 많이 받고, 공부 열심히 해라잉.”
고모들까지 동조하여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문승협은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받은 세뱃돈은 엄마에게 맡기라는 한마디에 각자의 엄마손으로 건너갔다. 온 가족이 다시 다과상 앞에 둘러앉아 한과와 배를 집어먹었다.
“아부지, 큰집 가기 전에 외할무니한테 세배하러 가야지라.”
“가야제, 니가 전화해 봐라. 외숙손님이 많은께, 외숙시간에 맞춰야제.”
문경철이 수정과를 마시며 아버지에게 외갓집에 세배하러 가는 걸 확인했다.
문경철의 외갓집은 문승협에게 진외가다. 명절이면 가족행사를 치르고 진외가와 종갓집에 인사 갔다. 문승협의 진외가증조할머니는 할머니 박옥춘의 엄마다. 진외가증조할머니에게 세배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 매번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진외가증조할머니손님이라기보다는 박옥춘의 오빠인 진외가할아버지들 손님이었다.
“아부지, 점심때쯤 와서 식사하라네요.”
“그래야, 아직 손님이 많은갑다잉.”
“예, 작은 외삼촌도 손님들이랑 말씀 중이라네요.”
“와따, 명절이라고 의원들이 인사하러 왔는갑소.”
문경철이 외삼촌사저의 집사와 통화하고 손목시계를 보며 아버지에게 전하자, 문경민이 거들었다.
문승협의 진외가작은할아버지 박동일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정치인이었다. 평상시에도 정치인과 법조인, 공무원, 군경, 지역유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명절 때 진외가큰할아버지 박동후의 손님까지 겹치면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박동후는 1945년 8월 15일 일본패망 이후 미군정청으로부터 불하받은 지인의 회사에 경영자로 참여하였다. 그 회사가 6.25 전쟁피해로 파산에 이르자, 문승협의 할아버지인 처남 문재환과 함께 인수하여 ‘태선화학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미군정청은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가자 38선 이남을 신탁통치하였다. ‘패전국소속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과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 귀속에 관한 건’에 의거, 1945년 11월 12일 설립한 ‘신조선회사’를 통해 남한 내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모든 재산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1948년 3월 22일 '중앙토지행정처'로 개칭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12월 9일 법률 제74호로 귀속재산법을 제정하였다. 1950년 3월에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적산 불하를 빠르게 진행했다. 곧이어 발발한 6.25 전쟁으로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전반에 대혼란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삶의 터전을 하루빨리 복구해 안정된 삶을 마련하려는 국민들의 염원과 의지가 들끓었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 4.19 혁명을 거친 5.16 군사정부에 의해 1.2.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다. 국가기간사업인 시멘트, 유리, 화학, 철강 등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하는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사회전반이 고도경제성장과 더불어 산업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태선화학공업주식회사도 국가의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에 힘입어 빠르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문승협의 진외가큰할아버지인 박동후회장의 손님 중에는 태선화학직원뿐 아니라 성공한 사업가로 존경받는 경제인 박동후를 찾아온 손님도 있었고, 재력과 정치에 줄 대려는 사람도 있었다.
문경민이 위압감을 주는 저택대문 앞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를 들은 커다란 셰퍼드 세 마리가 저택안쪽 입구정원 건너편에서 컹컹거렸다. 어른도 충분히 공포를 느낄만한 큰소리로 짖어댔다.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는 셰퍼드소리와 함께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요?”
“나요, 경민이어라우.”
저택 안에서 누군가 부리나케 뛰어나와 쪽문을 열었다. 문경민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반갑게 흔들었다.
“오메오메, 이게 얼마 만이어, 잘 있었는가?”
“아따 오랜만이요잉, 잘 있었소?”
“이사님, 안녕하셨어라우?”
“잉, 그래.”
“어서 들어오쑈.”
문승협이 태어나기 전부터 진외가 일을 도맡아 하는 임집사였다. 문재환가족을 차례차례 맞이하며 인사했다. 문재환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는가?”
“예, 이사님 덕분에요.”
“회장님은 계시제?”
“그라믄요, 계시지라.”
“아저씨, 안녕하세요?”
“음마, 이것이 누구여, 승협이가 이렇게 커부렀어? 오랜만이다잉, 잘 있었냐?”
“네.”
문승협은 진외가에 잠시 맡겨져 살았던 적이 있어서 임집사와 구면이었다. 임집사가 반갑게 문승협의 볼을 쓰다듬고는 앞장서 저택 안으로 인도했다. 문재환가족을 손님이 오면 대기하는 방으로 안내했다.
“이사님, 어르신 방도 그렇고 다른 방도 다 손님들이 있어 갖고, 여그서 쪼께 기다리셔야 겄는 디요?”
“그런가? 그러세 그럼.”
“어르신은 의원님 손님들한테 세배받고 계시고요, 회장님은 시장이랑 담소 중인디, 끝날 때 됐어라우.”
“잉, 알았네.”
“손님들 가시믄 바로 말씀 올릴게요.”
임집사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남자어른들과 문승협은 소파에 앉았다. 박옥춘을 위시한 딸과 며느리들은 누가 선동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여자어른들이 있는 식당으로 갔다. 문승협의 사촌동생들이 부산하게 왔다 갔다 했다. 문승협은 사촌동생들을 지켜보다 진외가에 맡겨졌을 때 같이 살았던 육촌동생들이 생각났다.
“할아버지, 저 율이한테 갔다 와도 돼요?”
“잉, 근디 부르믄 빨리 와라잉.”
문승협은 할아버지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열고 나갔다. 매끄러운 긴 나무복도를 따라 달리듯 미끄러지듯 걸었다. 식당 쪽에서 쩌렁쩌렁 흘러나오는 할머니목소리에 흠칫 멈춰 섰다. 이내 고개를 떨구고 벽에 기대어 서서 귀 기울였다.
“뭔 사업한답시고 그 염병을 하드만, 친구 믿다가 돈도 다 날리고 아조 인생 조져부렀어라우.”
“아이고, 그냥 회사나 잘 다니제 뭔 사업을 한다고? 사업이 어디 쉽간디?”
“아 내 말이 그 말이요. 그냥 가만히 회사에 있었으믄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인디, 아주 미쳤어라 미쳤어.”
“회사만 성실히 다니믄 승진도 시켜주고 할 것인디.”
“그란께 말이요, 부모 속 썩이는 건 둘째 치고라도, 지 새끼들까지 고생시키고 뭔 지랄인지 모르겄소.”
“근디, 전에 뭔 가시나하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드만, 그건 해결됐소?”
“아이고, 말도 마쑈. 내가 그 가시나 머리채 흔들고 난리를 편께, 겨우 떨어집디다.”
“아니, 승협이 에미는 뭐 하고?”
“툭하믄 뽀르르 즈그 집에 가서 지 서방하고 시댁 흉볼 주나 알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라우. 음식을 할 줄 아나 청소빨래를 제대로 하나, 그렇다고 서방한테는 잘하나. 짐이어라 짐, 내가 평생을 져야 할 짐이란께. 아이고, 나랑 전생에 뭔 원수를 졌는지.”
“그래도 큰아들 큰며느린디, 앞으로 잘하겄지라.”
“하이고, 큰아들 큰며느리라우? 나는 아무것도 안 바라요, 그냥 속이나 안 썩이면 좋겄소. 지금 하는 것을 보믄, 자식이 아니라 웬수여라 웬수.”
문승협은 가슴이 먹먹했지만 예전보다 덤덤한 자신의 감정에 조금 놀랐다. 처음 몇 번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머리가 띵하고 울기도 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들면서 뭔지 모를 원망과 울분 같은 걸 느꼈었다.
“어? 오구, 우리 승협이구나. 근데, 왜 그러고 있어?”
“안녕하세요 당숙모.”
“그래, 오랜만이구나, 잘 있었니?”
“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엄마 찾아? 엄마는 잠깐 별채에 뭐 가지러 갔는데.”
“아 아니에요, 그냥.”
문승협의 당숙모가 손님이 다녀간 방을 치운 뒤 빈 그릇을 담은 쟁반을 들고 식당으로 걸어왔다. 한동안 돌봤던 문승협을 보고 반갑게 맞았으나 표정이 이상했다. 그때 식당에서 이야기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당숙모가 왜 그런지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쟁반을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측은한 눈빛으로 손을 잡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우리 승협이 마음이 많이 상했겠구나. 승협아, 어른도 아이들처럼 거짓말하고, 남을 흉보기도 한단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알았지?”
“네, 저는 괜찮아요.”
“그래, 마음 풀어. 저기 방에 율이랑 욱이랑 있으니까, 가서 동생들이랑 놀아라.”
문승협은 당숙모말을 위안 삼아 걸음을 옮겼다. 당숙모가 쟁반을 들고 식당문을 열었다. 어른들에게 어린 승협이가 다 들었다면서 제발 그만하라며 문을 닫았다. 문승협은 육촌동생들이 있는 방으로 걸어가다 들었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았다.
문승협은 오래전부터 외가든 친가든, 엄마와 아빠를 비난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어른들의 입방아를 통해 은연중에 듣고 보았다. 그때마다 심적 고통이 무척 심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오히려 예의 바르고 모범적으로 행동하려 애썼다. 이런 일들이 문승협에게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으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고 또 참았다. 그럴수록 더욱 착하게 행동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자신을 채찍질하여 어른들로부터 인정받는 바른 아이가 되려고 하였다. 그렇게 노력한 만큼 어른들로부터 칭찬도 뒤따랐다.
문승협이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런 대꾸가 없어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승협이 오빠다.”
“형, 안녕?”
“어, 잘 있었어? 뭐 해?”
“오빠 일루 와 봐, 이것 좀 해줘, 잘 안되네.”
“형, 이것 좀 끼워줘라.”
박율이 블록으로 성을 쌓고, 박욱은 전동기차레일을 맞추고 있었다. 문승협이 먼저 블록종탑을 세워준 뒤 기차레일을 연결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육촌동생들이 조금 서먹했지만 금세 뒤섞여 놀았다.
문승협은 목포로 3학년에 전학했을 때 잠시 진외가에 맡겨졌었다. 부모 없는 저택생활이 외로웠으나 어울릴 수 있는 육촌동생들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육촌동생들의 장난감과 학용품은 대부분 박동후회장이 해외출장 갔을 때 사다 준 외국산이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물건들이라 육촌동생들을 동경하고 때로는 상대적 빈곤감에 시기심도 있었다. 그러나 진짜 부러워했던 것은 부모와 함께 화목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문승협이 기차를 레일에 얻어놓고 리모컨의 출발 버튼을 눌렀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칙칙폭폭 열심히 달렸다. 박율과 박욱이 해맑은 미소로 손뼉 치며 좋아했다. 기차가 지친 기색 없이 두 바퀴째 질주할 때, 임집사가 문승협을 찾아왔다.
“승협아, 얼른 가자, 지금 어른들 세배하러 간단다.”
“네.”
문승협은 육촌동생들에게 간다며 손을 흔들어 주고 임집사를 따라 빠르게 쫓아갔다. 진외가큰할아버지 박동후회장 방에 들어가니 내외가 상석에 방석을 깔고 앉아있었다. 문승협 일가는 세배하기 위해 모두 서있었다.
“이사님 내외분은 이쪽으로 앉지 그러시요.”
“잉, 이쪽으로 앉소.”
“그러까요 그럼.”
임집사가 문재환과 박옥춘에게 박동후회장 옆으로 앉으라고 권유했다. 박동후회장이 동의하며 옆자리를 내주었다. 문재환과 박옥춘이 그 옆에 앉았다.
“오메, 오지다. 나는 내 새끼들이 이렇게 다 모인 것을 보믄, 오져 죽겄어 그냥.”
“음마, 그런다고 죽으믄 안 되제. 나 새 장가가믄 우짤라고, 하하하.”
“가쑈 가, 난 암시랑 안 한께. 나는 누가 뭐라 해싸도, 우리 새끼들 다 본께 좋소야.”
문승협의 진외가큰할머니는 나라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냥하는 거지를 집에 들여 밥 먹이고 옷가지도 줘서 인자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사람이 많은께, 어른들이 먼저 세배하고, 그다음에 아그들이 해야 쓰겄네요.”
“그럼 우리 먼저 하고, 애들은 거기 서있다가 우리 끝난 후에 세배하면 되겠네.”
문경빈이 임집사의 말에 애들을 한쪽으로 물러서있게 했다. 어른들이 나이 순서대로 서서 세배하였다.
“외숙,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잉, 그래. 느그도 건강하고 복 많이 받고, 형제간 우애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해라.”
“예."
"외숙모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잉, 나는 다 좋은께 내 걱정은 하덜 말고, 우짜든지 느그가 잘살아야 나도 좋아야.”
“하하, 네, 그럴게요.”
“뭐하요, 얼른 복돈이나 많이 주쑈.”
“다들 돈 벌고 어른인디, 뭔 복돈을 주라고 하까?”
“음마? 새해고, 세배도 하고 했은께 줘야제. 그라고 희경이는 아직 학생인디, 안 그냐?”
“아따, 세뱃돈 좀 아껴볼라 했드만, 이녁 땜시 틀렸네, 하하하.”
이를 지켜보던 임집사가 미리 준비한 흰 봉투 여러 개를 박동후회장에게 건넸다. 봉투에는 이름이 쓰여있었고 돈이 들어있었다. 박동후가 봉투를 한번 보고 어른들을 둘러보았다. 약간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항리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경준이는 안 왔냐?”
“네, 그쪽 일이 좀 그래서요.”
“아무리 그래도 설인디, 왔다 가야제.”
“네, 죄송합니다.”
“니가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알았다.”
“뭔 병이 들어 그 지랄한지 모르겄소, 에휴.”
“아따 고모는, 경준이도 잘할라다 그랬겄제, 누가 처음부터 속을 줄 알았겄소.”
“혼자나 열심히 하제 뭔 친구 챙긴다고. 지 새끼들이나 잘 챙기제, 친구 믿었다가 쫄딱 망해부렀어라우.”
“아그들도 있은께 그만해. 이따가 경빈이하고 매제는 나 좀 보고 가소.”
여동생 박옥춘의 한탄에 아내가 조카 문경준을 두둔하자, 박동후회장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봉투에 쓰인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며 세뱃돈을 주었다.
어른들의 세배와 덕담에 이어 아이들도 나이에 맞춰 서서 세배했다.
“큰할아버지, 건강하세요.”
“오냐.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부모한테 효도해야 써, 알았제?”
“네 알겠습니다.”
“우리 아그들은 복 돈을 줘야겄다, 큰 놈부터 한 명씩 이리온나.”
박동후회장이 아이들의 세배를 받고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손주들과 한 명 한 명 눈 맞춰가며 발행된 지 얼마 안 된 빳빳한 만 원짜리 한 장씩을 쥐어주었다. 처음 보는 신권을 복돈으로 받고 제자리에 돌아가 앉으려는 문승협을 진외가큰할머니가 불렀다.
“어이구, 우리 승협이가 문가네 장손이제잉. 그렇게 전학을 많이 다녀서, 공부할 틈도 친구 사귈 틈도 없었다던디, 공부도 잘하고 반장이라믄서?”
“저보다 공부 잘하는 애들도 있어요.”
“허허, 내 새끼가 겸손하기까지 하네. 우 하나에 전부다 수라믄서, 그라믄 최고여 최고.”
“전부다 수인 애도 있는데.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니 할미가 엄청 자랑하드라, 우리 장손 장손함시로. 이 할미가 우리 승협이를 무지하게 이뻐한께, 절대로 어디 가서 기죽지 말고 당당해야 써, 알았제?”
진외가큰할머니가 두 손을 포개어 꼭 잡더니 얼굴을 매만지고 머리도 쓰다듬었다. 문승협은 칭찬과 당부에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예뻐해서 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처지가 불쌍해 안쓰러워서 하는 격려이며,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하지 말고 너만은 잘해야 한다는 채찍처럼 느꼈다.
문승협의 할아버지 문재환은 광산사업이 괘도에 올라 순탄해지면서 백색중절모와 백색양복에 백색구두를 신고 오토바이를 타는 멋쟁이로 변모하였다. 가족과 떨어진 생활에 카바레출입이 빈번하다는 소문과 술집아가씨나 다방아가씨와의 염문설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큰처남 박동후가 태선화학회사경영을 도맡다시피 하였고, 회사와 처갓집으로부터 외면받는 상황이었다.
잠시 그동안의 안부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임집사가 지금 어르신이 혼자 있으니 세배하러 가자고 하였다. 문승협가족은 줄줄이 방문을 나섰다. 임집사가 큰 방문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어르신, 둘째 고모네가 세배하러 왔네요.”
“잉? 누구?”
“둘째 옥춘 고모네요.”
“외할무니, 우리 왔어라우.”
“잉? 희경이 왔냐?”
이번에도 어른들이 먼저 세배했다. 아이들까지 세배를 마치고 문승협의 진외가증조할머니 앞에 모두 나란히 앉았다. 진외가증조할머니가 91세 고령임에도 정정했으나 때때로 작은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시력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가깝게 앉아야 했다.
“아야, 니가 누구냐?”
“외할머니, 저 경빈이요.”
“잉, 그래 그래. 니가 순사 하는 경빈이고, 그라믄 니가 경철이제?”
“네 외할무니, 아직 정정하시요잉, 다 알아보시고.”
“가만있어, 근디 뭐가 하나 안 뵌다? 잉, 큰 놈 경준이는 어딨냐?”
“아, 화장실 갔어요.”
진외가증조할머니가 반가운 미소로 좌에서 우로 한 사람씩 찬찬히 훑어보았다. 낯설다 싶으면 눈을 맞추고 누군지 물었으며 문경준이 안 보여서 찾았다. 문경빈이 재빨리 대답하고 어머니 박옥춘에게 고개 저으며 눈짓했다. 박옥춘이 입꼬리를 씰룩하더니 이항리를 노려봤다. 눈치를 받은 이항리가 고개 숙였다. 문승협이 무심결에 세 사람눈을 따라가며 보았다. 속상한 마음에 엄마처럼 고개를 떨궜다.
“저 아그들은 니 새끼냐?”
“예. 저기 큰애가 장손 승협이고요, 그 옆이 현아고, 그 옆이 제 아들 승희하고 경철이 아들 승대에요.”
“승협이는 내가 알제. 승협아 이리온나, 복돈 주께.”
“네? 큰할아버지께 받았어요.”
“그거는 그거고, 증조할무니가 준 것은 또 다르제.”
“감사합니다, 증조할머니 만수무강하세요.”
“허허허, 오냐오냐. 으째 너는 말하는 뽄새가 이리 이쁘냐. 안 그냐?”
“하하하, 네 그러네요. 외할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진외가증조할머니가 한복치마를 주섬주섬 옆쪽으로 젖히고 속바지 안쪽에서 돈을 꺼내 아이들에게만 세뱃돈을 주었다. 그리고는 침구 옆에 있는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벨소리를 들은 해남댁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들어왔다. 집안 심부름과 진외가증조할머니를 보필하는 순영이가 뒤늦게 따라왔다.
“아야, 싸게 가서 식혜랑 약밥이랑 산자랑, 먹을 것 좀 가져오니라.”
“예 어르신, 언능 가져오께요.”
“순영이 니는 저그 거시기 좀 내오고.”
순영이가 벽장문을 열고 보자기에 싸인 소쿠리를 꺼냈다. 진외가증조할머니 앞에 내려놓고 보자기를 풀어 소쿠리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문승협이 예상한 쇠고기산적, 홍시, 곶감, 바나나 그리고 다양한 외국과자가 들어있었다. 사저에 잠시 맡겨져 살 때 진외가증조할머니와 자주 자고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 소쿠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외가증조할머니가 음식을 먹다가도 귀한 음식이라 생각되면 종이에 싸서 소쿠리에 담아 보관해 두곤 하였다. 예뻐하는 손주들이나 반가운 손님이 오면 소쿠리를 풀어놓아 먹게 하고 또 그걸 보며 흐뭇해했다. 외국과자들은 진외가큰할아버지와 당숙들이 해외를 다녀올 때마다 사온 것이었다. 특히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일본과자가 많았다. 본인은 항상 맛만 보고 애지중지 소쿠리에 보관하였다.
문승협은 진외가증조할머니와 생활하면서 맛있는 음식과 과자를 독차지해 좋았으나 가끔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과자는 상할 염려가 없어 괜찮았지만 가끔 막 상해 가는 음식은 먹기 힘들었다. 증손자의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진외가증조할머니가 실망할 까봐 상한 음식을 거절하거나 상했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억지로 먹었다. 때론 입에 머금고 있다가 진외가증조할머니 몰래 화장실에 가서 뱉어내기도 했었다.
“아가, 이리온나. 아야, 이리들 와야. 이거 맛난 것이어, 얼른 와서 묵어봐야?”
“증조할머니, 저는 바나나 주세요.”
“엄마, 나는 저거 과자 먹을래.”
“허허허, 새초롬한 것이 과자는 볼 줄 안다잉.”
“현아야, 넌 뭐 먹을래?”
“나도 과자.”
진외가증조할머니의 먹으라는 권유에도 다들 주춤주춤 망설였다. 문승협은 진외가증조할머니가 무안할까 봐 앞장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바나나를 집었다. 문윤아가 오빠 따라 소쿠리를 들여다보더니 엄마무릎에 앉으면서 들어가는 목소리로 일본과자를 가리켰다. 진외가증조할머니가 미소 지으며 문승협에게 소쿠리를 밀어주었다. 문승협이 과자 두 개를 집어 하나는 문윤아에게 주고 남은 하나를 문현아에게 들어 보였다. 문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지켜보던 문희경과 문희숙도 바나나를 하나씩 집어 들고서 외할머니 옆에 다가가 앉았다. 다른 아이들도 소쿠리 가까이 둘러앉아 하나씩 집어 들었다. 불쑥 방문이 열렸다. 해남댁이 설음식으로 차린 상을 남편 장씨랑 두 번에 걸쳐 들고 왔다.
“아야, 식혜랑 약밥이랑 맛있은께 가져오라 했는디, 으째 안 보이냐?”
“어르신, 점심참이라 식사먼저 가져왔어라우. 식사 다 드시믄 가져올 텐께 걱정마시쑈.”
“아따, 금방 돌아앉았그만 벌써 밥때냐? 느그들 많이 묵어라잉, 묵어야 힘쓰제.”
“예, 외할무니도 많이 드세요.”
문재환가족은 남녀 따로 두 개의 큰상에 둘러앉았다. 음식을 먹으며 식사 후 종갓집에 가는 걸 상의했다. 곧이어 문승협의 당숙모가 작은 상을 들고 왔다.
“고모님,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잉, 질부는 식사했는가? 간도 딱 맞고 좋네야, 근디 뭣을 또 들고 왔는가?”
“고모부님 홍어 좋아하시잖아요, 드셔보시라고 좀 가져왔어요.”
“으메, 뭐 하러 이 비싼 걸. 아따 많이도 갖고 왔네, 냄새가 아주 쐐 한디?”
“고모부님 드셔보세요, 잘 삭혔나 모르겠네요.”
“그라까.”
“어디, 나도 한 점 묵어봅시다.”
“잘 삭혔네, 지금이 딱 맛있고 좋네야.”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잉, 고맙네 질부.”
식사를 마친 후, 문재환이 딸들에게 어린 손주들을 집으로 데려가라며 보냈다. 처가에서 내어준 두 대의 승용차에 박옥춘과 아들부부들 그리고 큰 손자들만 나눠 태우고 종갓집으로 출발하였다.
운전병출신 문경민이 길을 잘 알아 앞장섰다. 어느덧 승용차가 시가지를 벗어나 시골 국도를 달렸다.
문승협은 빠르게 스쳐가는 차장밖을 내다보았다. 대지에는 겨울을 이겨낸 파릇한 새싹들이 해동되지 않은 단단한 황토를 힘겹게 뚫고 나와 하늘을 향해 군데군데 피어났다. 구릉진 산등성이에 단단히 뿌리박고 서있는 나무들도 새로 돋아난 초록잎을 자랑스레 하늘거리며 자유분방하게 도열해 있었다. 멀리 보이는 드문드문한 초가집들이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유리창에 비친 무표정한 엄마모습이 보였다. 잠시 명절분위기에 들떠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눈길을 돌려 산능선을 따라갔다. 무언가 닮은듯한 크고 작은 바위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엄마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승용차가 달리면서 시선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자, 큰 바위가 문승협에게 눈을 맞추며 엄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고개를 돌려 엄마를 보았다. 이항리가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살짝 올렸다.
“엄마, 무슨 생각해?”
“글쎄, 별 생각 안 했는데? 승협이는?”
“나도 그냥. 아직 멀었어?”
“이제 다 왔어, 조금만 가면 돼.”
이항리는 시외가를 나오기 전 시어머니와 함께 시외할머니에게 질책을 들었다. 남편문제와 시아버지소문, 고부간 이런저런 말들이었다. 진외가증조할머니가 문승협을 곁에 앉혀놓고 훈계했기에 문승협도 혼내는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문승협에게 어른들을 닮지 말고 너는 잘하라는 훈육이었다. 이항리는 시외가를 나오면서 시외숙모와 사촌동서에게 동병상련의 이해와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마음 편치 않았다.
승용차가 족히 수백 년은 된듯한 큰 고목 앞에서 좌회전하여 비포장길로 올라섰다. 문승협에게 낯익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전통한옥집 앞에 차가 멈췄다. 차에서 먼저 내린 문경철이 초인종을 눌렀다. 문승협의 종갓집큰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문재환가족을 맞이했다.
“오메오메, 작은아버님 작은어머님 오시요.”
“잉, 질부 잘 있었는가?”
“예, 건강하셨지라우? 어서 들어오쑈.”
“형님, 잘 있었는겨?”
“오메, 부산댁도 왔는가?”
“형수, 큰아버지랑 다들 계시요?”
“그라믄이라우, 오신단께 광주작은아버님도 안 가시고, 다들 기다리고 있어라우.”
“와따, 작은아버님 오시요, 안녕하셨소?”
“잉, 잘 있었냐?”
“예. 할무니는 식사하고 기다리시다가 오침 중인디, 곰방 일어날 때 됐어라우.”
“그라냐, 형님하고 광주 동상은?”
“저기 나오시요.”
“왔냐, 뭘로 왔냐?”
“경빈이랑 경민이가 운전해서, 차 두대로 왔어라우.”
“누구 왔냐?”
“목포 재환이 성님하고 식구들 왔소.”
밖에서 인사 주고받는 소리에 문승협의 증조할머니가 오침에서 깨어나 좌정했다. 모두 안방으로 들어가 세배한 뒤 증조할머니를 마주 보고 둘러앉았다.
“오느라 고생했쟈?”
“아니어라우, 고생은 무슨. 건강은 으짜요?”
“나야 맨 그라제, 나이가 있은께.”
“식사는 잘하요?”
“인자는 이가 없으신께, 거의 죽으로 드신다.”
“우짜든 끄니 거르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드쑈잉?”
“살만큼 살았고, 인자 갈 날 받아놨는디 뭔 걱정이냐. 아그들 왔는디 뭣 좀 줘라?”
“예, 시방 준비하고 있어라우.”
“아야, 어무님 쉬시라 허고, 저쪽 방으로 건너가자.”
문재환은 고령의 어머니가 지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스러웠다.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 못해서 종갓집큰할아버지가 옆에 앉아 어머니상태를 설명하였다. 종갓집큰할아버지 방으로 건너온 가족은 다시 한번 서열에 맞춰 세배했다. 가족이 많아 세배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지금 식구가 많은께, 나눠서 해야 쓰겄다야. 먼저 엄니랑 아부지하고 광주작은아버님이 앉으시믄, 목포식구가 세배해. 그 담에 목포작은아버님이랑 작은어머님이 앉으시믄, 우리하고 광주식구가 세배하자. 그라고 우리 세대는 거실마루로 가서 간단하게 같이 맞절하든가, 아니믄 또 나눠서 하든가 하자.”
모두 종갓집큰아버지말에 따라 서열과 절차를 거쳐 세배하였다. 할아버지세대는 방에서, 여자어른과 아이들은 거실에서, 아버지세대는 방과 거실을 오가며 종갓집큰어머니가 차려 내온 식혜와 다과를 먹었다. 각자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로 해후를 풀었다. 문승협이 한과와 식혜를 먹은 뒤 마당 건너 화장실에 갔다. 종갓집 형들이 따라왔다.
“승협아 어디 가냐?”
“화장실 가려고.”
“아야 니 조심해라, 잘못하믄 또 똥통에 빠진다잉.”
“아이씨 형, 옛날에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
“큭큭큭, 니가 저번처럼 또 삐질까 비 조심하라고 한건디, 내가 뭐 으쨌다고 그라냐?”
“빠지긴 뭘 빠졌어, 빠질뻔한 거지.”
“뭔 소리까잉, 니가 그때 오른발인가 왼발인가 빠졌잖애. 똥 다 묻고, 큭큭큭.”
“형, 진짜 그럴 거야?”
“알았어 알았어, 빨리 갔다 와, 조심하고.”
문승협은 재작년 여름방학에 엄마 따라 놀러 왔다가 재래식 화장실이 익숙지 않아 빠질 뻔했었다.
예전일을 생각하며 조심조심 용변을 본 뒤 화장실냄새에 코를 잡고 미간을 찡그리며 나갔다. 종갓집형들이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앞장섰다. 문승협이 총총걸음으로 형들을 따라잡았다. 형들과 장독대가 있는 뒤뜰을 거쳐 동산언덕을 올라갔다. 작은 길이 나있는 대나무숲에 다다라서 주위를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재작년 여름에 철 지난 고사리와 죽순을 캤었다. 닭 잡으러 대나무숲을 헤치고 쫓아다니며 놀았던 일이 떠올랐다. 다시 걸음을 옮겨 걸어가다 대나무숲길 끝에서 멈춰 섰다. 눈앞에 뭉게구름이 떠있는 파란 하늘과 먼산을 배경으로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넓은 밭이 마치 신세계를 펼쳐놓은 것 같았다. 밭에는 작물을 보관하기 위해 볏짚으로 덮어 지은 초막집이 군데군데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휘황한 농촌풍경에 가슴이 탁 트이며 상쾌했다. 잠시 풍광을 만끽하고 형들을 쫓아가려는 찰나, 포항작은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들에게 집에서 찾는다며 소리치고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나무숲을 헤쳐 나오느라 더러워진 손을 씻으려고 장독대 옆에 있는 우물가로 갔다. 두레박과 펌프 중 무엇으로 물을 길을까 망설였다. 부엌뒷간에서 들려오는 종갓집큰어머니목소리와 엄마의 숨죽여 우는소리에 몸이 굳었다.
“아따 동서, 동서가 참고 살아야제 으짜겄는가.”
“형님,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들 나한테만 뭐라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 동서맘은 내가 잘 알제. 그란께, 승협이랑 애들 봐서라도 동서가 참소.”
“서방복도 없고 시댁복도 없고,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박복한지, 흑흑.”
“음마, 누가 듣겄네야, 인제 그만하소. 그래도 승협이를 보믄, 자식복은 있은께 참아야제.”
“지금 맘 같아서는 당장 이혼하고 갈라서고 싶어요.”
“어허이, 애들이 뭔 죄가 있단가, 애들을 봐서라도 그라믄 안되제.”
문승협은 엄마마음을 이해했으나 또 이해가 안 되었다. 잘못된 모든 것을 다들 엄마 탓으로 돌렸기에 억울해하는 엄마마음은 이해됐지만, 그렇다고 가는 곳마다 말을 옮기며 넋두리하는 엄마는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이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시댁식구를 흉보는 건 정말 창피했다. 그럴 때마다 슬픈 감정이 복받쳤다. 엄마의 그런 행동에 화가 났다. 하지만 참고 또 참아야 했다. 나쁜 감정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마음속 깊은 동굴에 가두어 놓으려 애썼다.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잉, 승협이냐. 엄마 여깄다, 요 옆에 문있지야, 그거 열고 들어오니라.”
문승협이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큰소리로 엄마를 찾았다. 종갓집큰어머니가 알려준 출입문을 찾아 부엌뒷간으로 들어갔다.
“엄마, 우리 언제가?”
“응, 금방 갈 거야.”
“승협아, 우짜든지 니가 잘해야 써, 알겄냐? 니가 잘해야, 니 엄니가 힘내제.”
“네.”
문승협은 조금 전 탁 트여 상쾌했던 가슴이 엄마를 보면서 다시 먹먹해졌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정리하는 엄마가 처량하고 불쌍해 보였다. 말없이 다가가 엄마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두 팔로 껴안았다. 이항리가 애써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문승협손등을 토닥거리며 자신의 마음도 추슬렀다.
그러는 사이 종갓집큰할아버지방에서 할아버지끼리 언쟁이 일었다. 광주동생이 문재환에게 사업자금을 명목으로 도와달라고 하였다. 문재환이 아들 사업이 부도나서 지금 어려운 상황이라며 거절했다. 광주동생이 ‘사업이 잘되어 요즘 잘 나간다고 무시하느냐, 바람피운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런데 쓸 돈을 동생 좀 도와달라, 형이 돼갖고 냉정하게 거절하느냐’며 쏘아붙였다. 문재환도 ‘근거 없는 소문이나 떠벌리고, 내가 그동안 도와준 돈이 얼마며, 나이를 처먹고 아직도 철없이 구는 것이 애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느냐’고 맞받아쳤다. 두 할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져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종갓집큰할아버지가 둘 다 똑같으니 그만하라며 다툼을 제지했다. 기분이 언짢아진 문재환이 선산에 들렀다 바로 목포로 가겠다고 일어나면서 소강되었다. 문재환가족도 따라갈 채비를 하며 일어섰다. 서로가 서먹해진 분위기 속에서 고별인사를 하였다. 여기 걱정은 말고 운전조심해서 잘 가라는 종갓집식구의 어색한 배웅을 받으며 선산으로 출발했다.
종갓집에서 선산까지 걸어서 가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으나 자동차로는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문재환이 선산에 올라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다 중턱쯤에서 멈춰 섰다. 좌우를 살피더니 우측에 있는 공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자 문승협에게 여기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죽으면 묻힐 묘터라고 했다. 햇볕 잘 드는 남향에 앞쪽으로 큰 저수지와 넓은 평야가 펼쳐져 사계절풍경이 아름답고, 뒤쪽은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 겨울철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어 배산임수가 아주 좋은 명당자리라고 하였다. 조상묏자리를 잘 써야 후손이 잘된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문재환가족은 선산을 내려와 왔던 대로 차에 나누어 타고 집으로 향했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문승협은 명절이 즐겁고 좋기는 하지만 왜 늘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지 골똘히 생각했다.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이항리가 꾸벅거리는 문승협에게 무릎베개를 해주며 어깨를 토닥였다. 남편의 지금 상황은 어떤지 떡국은 먹었는지 궁금 반 걱정 반이었다. 진외가와 종갓집에서 계속됐던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문승협은 갑자기 얼굴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에 놀라 잠에서 깼으나 눈을 뜰 수 없었다. 이항리가 처량한 처지가 괴롭고 몹시 한탄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었다. 문승협은 엄마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는 다른 가족이 알게 되면 엄마가 민망할까 봐 모른 척했다. 그러나 우는 엄마를 외면하려 합리화시키는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다. 그동안 우는 엄마모습을 많이 봐온 문승협으로서는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어찌 보면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지만,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어 곧바로 자신을 책망했다.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엄마가 눈치챌까 봐 깊이 잠든 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항리가 집에 다 왔다며 깨웠다. 문승협은 마지못해 일어나는 마냥 눈을 비비며 어디인지 차창밖을 살폈다. 좌측에 유선국민학교가 보였다. 언덕길 도로양옆으로 도열해 어두운 적막을 밝히는 오렌지가로등불빛이 무척 쓸쓸하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한 문재환가족은 씻거나 저녁을 준비하거나 각자 할 일을 했다. 저녁을 먹은 후 옹기종기 모여 앉아 TV를 시청하며 과일을 먹었다. 서울작은엄마 윤옥희가 술상을 차려왔다. 박옥춘이 담근 인삼주에 홍어삼합과 육전 같은 안주거리가 있었다. 문재환집안에서 유일하게 술을 좋아하는 문경빈이 반가운 표정으로 술상 앞에 다가앉았다.
“왐마 이것이 뭣이다냐, 홍어 아니어? 이 비싼 걸, 아따 맛있겄다.”
“냄새가 쏴하지라, 어머님이 아들들이 좋아한다고, 직접 사다가 며칠 삭혔답디다.”
“아버지, 듭시다. 아야, 느그 홍어 묵어라.”
문경빈이 부르는 소리에 모두 술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른들이 젓가락 또는 손가락으로 한 점씩 집어 들었다. 취향에 따라 초장 또는 고춧가루를 섞은 가는소금을 찍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아이들은 먹기 좋은 육전보다 어른들이 먹는 홍어에 관심이었다. 호기심에 덤벼들었지만 홍어를 입에 넣자마자 코를 막거나 인상을 찡그리며 뱉어냈다. 어른들이 당황한 아이들 모습을 보고 웃었다. 문승협도 어른들이 먹는 걸 지켜보다 고춧가루소금장을 찍은 홍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눈물이 핑 돌며 코가 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오물거리다 뼈가 있다는 핑계로 얼른 뱉어냈다. 이를 지켜보던 서울작은엄마가 빙긋이 웃더니 살만 있는 한 점을 골라 초장을 찍어 문승협입에 넣어줬다. 문승협은 어른 인척 하려다 들킨 것 같아 겸연쩍으면서도 자신을 챙겨주는 서울작은엄마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부산작은엄마가 식혜수정과와 한과를 한 상 차려 아이들을 거실로 유인하면서 홍어소동은 막을 내렸다. 어른들은 홍어를 안주 삼아 인삼주를 기울였다. 술을 잘못 마시는 부산작은아버지 문경철이 인삼주를 홀짝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안주거리로 홍어를 집으면서 물었다.
“아부지, 아까 큰외삼촌이 큰형 일로 좀 보자드만, 뭐라시던가요?”
“뭐라겄냐, 쯔, 그냥 걱정에 야단이제.”
“아따, 오빠가 뭐라 했는지 쫌 말해보쑈.”
“뭘 뭐라 긴 뭐라 해, 그냥 그랬단께는.”
박옥춘이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에 끼어들었다. 문재환의 언성이 높아졌다. 설저녁 온화하던 분위기가 순간 얼음장으로 변했다. 문승협은 할아버지큰소리에 깜짝 놀라 긴장했다. 온신경이 어른들 쪽으로 기울었다.
“염병, 또 소리 지르네 참말로.”
“니미, 니 오빠한테 뭔 쓸데없는 소릴 씨부렸는지, 내가 별말을 다 듣는다 아주.”
“내가 뭔 소릴 해라우? 나는 오빠한테 뭐라 한 적도 없는디, 뭔 말이까잉?”
“그냥 확 주둥이를, 내가 이 애편네 땜시 제명에 못 죽는다 내가.”
“음마, 얼척없네 진짜. 뭔 말했나 궁금한께 물어본 것인디, 내가 뭐 으쨌다고 그래싸쏘?”
“아니 한두 번도 아니고, 왜 바람피운다는 소문을 오빠한테 조잘조잘 지랄해서, 회사체면이 떨어졌다고 물러나라 마라 그런 소릴 듣게 하냐고?”
“아니 그라믄, 내가 없는 소릴 했을까비? 내가 다 듣고 알고 한 소리요.”
“아따 엄마, 가만히 좀 있으쑈. 아부지, 손주들도 있는디 그라요, 그만하쑈.”
문경빈이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서로 노려보는 부모를 말렸다. 큰외삼촌이 형상황을 묻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다며 정리했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다.
문재환은 종종 회사가 끝나면 모자부터 구두까지 백색 깔맞춤으로 한껏 멋 내고 카바레에 다녔다. 박옥춘은 멋쟁이 남편이 지방을 순회하며 근무하는 터라 항상 바람피울까 노심초사했다. 남편 근무지마다 감시자를 붙여놓을 정도로 유별났다. 들은 소문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친정에 일러바치며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문재환은 장모님과 큰처남에게 불려 가 핀잔을 듣거나 경고를 받았다. 의부증처럼 부부관계에 큰 문제였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었다. 박동후가 문재환에게 바람피운다는 소문을 추궁했다. 그러고 나서 문경준의 부도수습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줄 테니 편하게 갖다 쓰라고 하였다. 문경빈에게는 정식수사로 돌려 박준배를 빨리 수배하라고 했다. 그러나 편하게 갖다 쓰라는 자금지원은 말이 지원이지 반드시 조건이 붙었다.
문재환은 그동안 갖가지 명목으로 도와달라는 동생들을 위해 땅과 회사지분을 조금씩 팔거나 담보로 수차례 돈을 빌렸다. 그때마다 박동후가 나서 매입하거나 담보로 잡고 돈을 융통해 줬다. 문제는 박동후가 돈을 빌려주면서 실제가치의 반값 정도만 쳐주었다. 언제든 빌린 돈을 가져오면 회사지분이든 담보든 다 돌려줄 거라며 금액이 커지면 나중에 상환할 때 부담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이것은 문재환의 광산경영실적과 자금흐름, 앞으로 있을 태선화학주식상장을 고려한 박동후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반면 문재환은 배려해 준 것으로만 생각하고 늘 큰처남을 고맙고 감사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동후가 문재환소유의 광산을 정확히 지목하며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였다. 문재환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뭔가 꺼림칙하면서도 금세 큰처남의 선의를 의심한 자신을 책망했다. 수년이 지난 후 일어날 파란을 짐작하거나 전혀 의심조차 못했다.
문재환이 흥분을 다스리려고 담뱃불을 붙이면서 정원으로 나갔다. 대충 치우고 자자는 박옥춘의 말에 모두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다들 불편한 분위기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문승협은 다음날 작은아버지가족들이 각자 집에 가려고 나설 때까지 마음이 착잡했다. 친척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서면서 엄마손을 꼭 잡았다. 이항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문승협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은 그렇게 태풍처럼 지나갔다. 며칠 뒤 문재환도 순화광산으로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