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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Aug 09. 2024

단테의 별 - 1권 1부 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1)

만화영화‘마징가 Z’가 끝나고 뉴스가 나왔다.

‘박정희대통각하께서 연두기자회견에서 밝히신 포항영일만석유발견에 대해 현재 다각적인 조사 중으로 산유국의 부푼 꿈을 한층……. 전남신안 앞바다 해저에서 중국송나라, 원나라시대의 청백자를 실은 유물선이 발견되어……. 오늘 서울명동성당에서 신민당과 재야인사 김대중, 정일형, 문익환, 함세웅 등 20여 명이 유신독재정권종식을 촉구하는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경찰이 정부전복선동혐의로 긴급 입건에…….’

박옥춘이 꾸벅꾸벅 졸다 ‘김대중’이라는 아나운서멘트에 몸을 일으켰다. 문승협이 궁금해 불쑥 물었다.

“작은 고모, 유신독재정권이 뭐예요?”

“아야, 너 어디 가서 그런 거 묻지 말어, 그러다가 까딱하믄 잡혀간다잉.”

“왜 잡혀가요?”

“방금 테레비에서 나오드냐, 저렇게 높은 사람들도 다 잡혀간디, 우리는 별 수없제.”

“근데 발표만 해도 잡혀가요?”

“너는 니가 잘못한 것이나 듣기 싫은 말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욕하믄 성질나냐 안나냐?”

“성질나요.”

“그라지? 하물며 고귀하신 대통령각하께 저랬는디, 암시랑 안 하겄냐?”

문승협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극장에 데려가는 게 귀찮을 텐데도 하이틴영화 ‘진짜 진짜 잊지 마’를 보여준 작은 고모말이라 그냥 수긍하는 척했다. 문득 세종대왕이 떠올랐다. 훈민정음창제를 극렬히 반대한 최만리가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라며 모욕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도 벌주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본 박정희대통령과 책에서 읽은 세종대왕이 비교되었다.

TV에서 정치인 김대중과 관련한 뉴스가 이어졌다. 박옥춘이 갑자기 문승협과 문희경을 향해 손을 내 저의며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아야 시끄러봐야. 오매오매 뭔 일이까, 무담시 저래갖고 으짜스까잉.”

“호호, 선상님 나왔다고, 우리 엄마 또 테레비로 들어간다.”

“아야 봐봐라 인물 좋은 거, 하여튼 인물하나는 훤하니 좋아야.”

박옥춘은 정치를 잘 모르지만 신안출신 야당정치가 김대중의 엄청난 팬이었다. 뉴스가 끝나갈 무렵, 이항리가 저녁상을 치우고 큰방으로 들어왔다.

“내일 전학한 학교에 첫 등교니까, 승협이하고 현아는 책가방 싸야지.”

“내일은 종합장 하고 필통만 가져가면 돼요.”

“오빠, 나는?”

“너도 그렇게 하면 돼.”

“뭔 소리야, 책하고 공책도 다 챙겨야지.”

“아니야, 내일 개학이라 책도 시간표도 아직 없어. 내일은 자리배치하고, 새 교과서 받고, 청소하면 끝이야.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뭐라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가서 준비나 해.”

문승협남매는 작은방으로 건너와 책가방을 뒤적였다. 이항리가 뒤따라 들어왔다.

“내일 엄마도 학교에 같이 가는 거죠?”

“응, 가야지.”

“오빠, 나 여기가 콩닥콩닥해.”

“그래, 그럴 거야. 그래도 오빠랑 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일 일찍 가야 하니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자.”

이항리가 이부자리를 편 후 큰방에서 잠든 문윤아를 옮겨왔다. 모두 잠자리에 누웠다. 문승협도 문현아처럼 새로운 친구와 선생님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학교는 예전모습 그대로 일지, 혹시 자신을 알아보는 친구는 없을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또다시 바뀌어버린 학교환경에 불안한 마음이 들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새마을노래’가 쓰레기차확성기를 통해 새벽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이항리가 일어났다. 뒤척이는 아들에게 이불을 끌어다 덮어줬다. 모아둔 연탄재와 쓰레기를 버리려 밖으로 나갔다.


문승협이 아침을 준비하다 깨우는 엄마목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졸린 눈을 비비며 문현아도 깨웠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자, 윗니 아랫니 닦자. 세수할 때는 깨끗이~’

문승협이 잠에 취한 동생을 일깨우려고 동요를 흥얼거렸다. 문현아가 오빠노래를 들으며 양치질과 세수를 했다. 둘은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아침을 먹었다.


문현아가 길도 모르면서 오빠손을 잡아끌고 대문을 나섰다. 이항리가 막내문윤아를 안고 뒤따랐다.

걸어서 십분 정도 거리의 유선국민학교에 도착했다. 젊은 남녀선생이 등교하는 아이들을 맞이해 지도하려고 교문 안쪽에 서있었다. 이항리가 여자선생에게 다가가 전학 왔다고 하자 교무과로 가라고 하였다. 교무과직원이 몇 가지 질문하고 바로 옆 교무실로 안내했다. 40대 중반정도 보이는 남자선생에게 데려갔다.

“선상님, 요번에 서울서 온 전학생이여라우. 어머님, 이분이 5학년 1반 담임선상님이셔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승협이 엄마 됩니다.”

“안녕하세요, 문승협입니다.”

“잉, 승협이 반갑다. 어머님 첨 뵙겄네요, 앞으로 승협이 담임 맡을 고삼랑이어라우.”

“우리 승협이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당연하지라우. 관심 갖고 지도할 텐께, 너무 염려마시쑈.”

이항리와 고삼랑선생이 간단한 대화를 마치자, 교무직원이 문현아의 담임선생에게 안내했다.

문승협이 문현아에게 수업 끝나면 데리러 갈 테니 교실에 있으라 단속하고 고삼랑선생 앞으로 갔다.

“그라고본께, 승협이가 우리 학교에 다녔었네? 1학년에 입학하고 2학년 때 전학 갔다가 3학년에 다시 왔고, 4학년 때 갔다가 요번에 또 온 거네? 맞냐?”

“네, 맞습니다.”

“하하, 아따 부럽다잉. 나는 서울도 몇 번 못 가보고, 서울친구도 없는디.”

“선생님 괜찮습니다, 서울선생님들도 그랬어요. 왜 전학을 자주 다녔는지 궁금해하시고, 그다음엔 아빠는 뭐 하시냐고 물었어요. 제가 자주 전학한 건.”

“아녀 아녀, 말 안 해도 괜찬해. 궁금한 것은 맞은디, 나중에 니가 말하고플 때 말해. 그라고, 그렇게 기죽을 거 없어야. 니가 원해서 그건 것도 아니고, 전학이 죄도 아니잖애?”

“네? 네, 알겠습니다.”

고삼랑선생이 생활기록부를 보며 무심코 문승협의 전학과정을 확인했다. 문승협은 고개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삼랑선생이 농담을 섞었다가 문승협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라 다독였다. 문승협은 담임선생이 왠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동안 다른 담임선생들은 문승협의 입장과 생각을 고려치 않고 어린 마음을 헤집으며 궁금한 대로 질문했었다. 무엇보다 창피하게 생각했던 그동안의 전학과정을 설명하지 않아서 좋았다. 교무실구석에 달린 스피커에서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고삼랑선생이 지휘봉과 출석부를 챙겨 들었다.

“그라믄, 친구들 만나러 가보끄나? 으째, 떨리냐?”

“네, 조금요.”

“오늘이 마침 새 학년 새 학기인께, 그래도 괜찬할 것이다. 다들 5학년 올라와서 처음 만난께, 즈그도 다 서먹서먹하고 그래서 암시랑 안 해.”

“네.”

문승협은 담임선생을 따라 1층에서 3층 교실까지 가는 길이 마음의 무게만큼 엄청 멀게 느껴졌다.

고삼랑선생이 3층 첫 번째 교실 앞문을 옆으로 제쳐 열었다. 문승협은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고삼랑선생이 교탁에 지휘봉과 출석부를 내려놓고 문승협을 보며 손으로 교실문을 가리켰다.

“승협이는 교실문 닫고 일루 와.”

“네.”

“어디 보자, 용남이가 계속 반장 했은께, 새로 반장 뽑을 때까지 김용남이 임시로 반장해라. 그라믄, 선상님한테 인사해야제?”

”차려, 열중쉬어, 차려, 선상님께 경례.”

“안녕하십니까.”

“그래, 다를 반갑다, 내 이름은 고삼랑이어. 니들 담임선생인께, 앞으로 잘 지내보자잉?”

“예.”

“자, 이리 와. 이번에 서울서 전학 온 친구여. 니가 직접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저는 문승협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래, 지금 빈자리가 없은께, 일단 선상님 자리에 가서 안거.”

“네.”

“느그들은 승협이가 학교생활하는데 문제없게끔 잘 돕고, 다 같이 친하게들 지내라잉?”

“예.”

“승협이도 찬찬히 하나 썩 하나 썩 알아가믄 된께, 너무 조급해 말고. 물어볼 거 있으믄, 친구들한테 물어봐.”

“네.”

“니들은 친절하게 잘 갈쳐주고, 알았냐?”

“예.”

“그래, 내가 쭉 지켜볼 라니까. 그라고 오늘은 첫날인께, 짝꿍하고 자리 정한 담에 5학년 새 교과서를 나눠줄 거여. 아참, 번호도 정해야제. 다 끝나믄 교실 하고 복도청소 후에 파할 텐께, 그리 알고잉?”

“예.”

“그라믄 조용히 소지품 챙겨서 복도로 나가 갖고, 키 순서대로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서. 실시.”

우르르 나가는 반아이들을 따라 문승협도 가방을 챙겨 복도로 갔다. 반아이들이 눈대중으로 키를 맞춰보며 줄 섰다. 문승협은 키가 작은 편이어서 앞쪽부터 키를 맞춰보다 열 번째에 섰다. 다들 짝꿍이 누군지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여자아이들이 선 줄 맨 앞에 키 큰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키 큰 남자아이 뒤에 서있는 여자아이가 여자들이 서는 줄이라며 남자줄로 가라고 하였다. 그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기만 할 뿐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야 병수야, 거그서 뭐더냐, 빨리 일루 와.”

“냅둬, 내 맘인께.”

“아, 저 가분수 같은 시끼. 아야, 거그는 가시나들 줄이잖애, 빨리 이리 오란께.”

순간 반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수군거렸다. 서먹하게 서있던 문승협도 피씩 웃었다. 병수라는 아이가 하체에 비해 상체와 머리가 커서 가분수라는 별명이 딱 어울렸다. 이름 또한 가병수라서 더욱 공감되었다. 임시반장 김용남이 남자 줄 맨 뒤쪽에서 큰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하였다. 담임선생이 지휘봉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뭐시어, 으째 떠들고 난리냐.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냐 안 했냐, 첫날부터 이럴 거여?”

“아닙니다.”

“또 도떼기시장처럼 그라믄, 첫날이고 뭐고 없다잉.”

“예.”

“병수는 저그 용남이 뒤로 가, 여그는 여자 줄이잖애, 키도 젤 큰 놈이 앞에 서 갖고는.”

가병수가 머리를 긁으며 맨 뒤로 갔으나, 김용남에 의해 다시 김용남 앞으로 옮겨 섰다. 담임선생이 키 순서대로 섰나 대충 확인하고 남녀 두 명씩 짝을 맞춰 줄을 세웠다.

“남자들만 좌측으로 2보 가. 둘씩 옆줄 맞추고. 다 섰냐? 모두 좌우향우. 자,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반년 동안 함께 앉을 짝꿍인께, 거시기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라잉?”

“예.”

“인자 자리배치 할 텐께 잘 들어. 교실을 보믄 둘씩 앉는 책상이 가로 넉 줄에 세로 일곱 줄인께, 둘씩 짝꿍 해서 앉으믄 56명이지. 음마? 우리 반이 59명 인디, 책걸상이 부족하네? 그라믄, 용남이가 이따 청소시간에 병수 델고 공작실 가서, 책상이랑 갖고 와라. 선상님이 말해 놀라니까, 용남이 병수 알겄냐?”

“예.”

“이제 들어가서 교실창가 쪽 맨 앞줄부터 왼쪽으로 짝꿍이랑 둘씩 앉는디, 여자가 오른쪽 걸상에 남자는 왼쪽걸상에 앉는다. 실시.”

“실시.”

담임선생지시에 따라 두 명씩 차례로 들어가 앉았다. 문승협은 앞에서 세 번째 오른쪽에서 두 번째 책상의 왼쪽 걸상에 앉았다. 서울은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로 각각 분리된 1인용이었는데, 목포는 책상이 하나로 붙어있는 2인용에 의자는 1인용이었다.

“다 앉았냐? 시방 앉은자리가 눈이 안 좋아서 칠판글자가 안 보인다든가, 좀 거시기한 사람 있냐? 있으믄 손들어봐. 없냐?”

“예, 없어라우.”

“인자 번호를 정해주께잉. 니 이름이 뭐시냐?”

“현기정이어라우.”

“잉, 기정이 니가 1번 이어. 너부터 요렇게 왼쪽으로 1, 2, 3 쭉 갔다가, 다시 너부터 9, 10, 11번 쭉 가믄 자기 번호여, 알겄냐?”

“예.”

“기정이부터 쭉 가믄서 번호를 외친다. 시작.”

그렇게 순서에 따라 큰소리로 자기 번호를 59번까지 외쳤다. 문승협은 20번이었다. 담임선생이 번호를 정한 후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학년반번호이름, 주소, 전화번호, 부모님 성함을 하나씩 불러주며 순서대로 나눠준 종이에 받아쓰게 하였다. 임시반장 김용남에게 다 쓴 종이를 번호 순서대로 걷어서 내일까지 출석부에 이름을 기록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김용남과 키 큰아이 10명을 인솔해 교과서를 가지러 갔다. 문승협도 가겠다며 손들고 자원했지만, 담임선생이 전학 온 첫날이니 그냥 있으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옆에 앉은 짝꿍과 눈이 마주쳐 머쓱하게 웃었다.

“아야, 너 서울서 왔냐?”

“응.”

“내 이름은 진숙이어, 박진숙.”

“어 그래, 반갑다.”

“집은 어디냐?”

“유선동.”

“그라믄 학교 바로 옆이네. 나는 서선동, 학교 뒤 깔끄막 있는 데여.”

박진숙은 단발보다 조금 긴 머리의 마른 체격이었다. 5학년인데도 콧물이 흘렀고 옷에 군데군데 찌든 때가 묻어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풍겨서 불결하게 느껴졌지만, 문승협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교실 뒤편 서너 명이 있는 무리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서울놈, 이리 와바라잉.”

“…….”

“아야, 모른체끼해. 저 시끼는 강덕구라고, 첨엔 이름 땜에 붙인 별명이 깡다군디, 진짜로 깡다구는 쎄다잉.”

문승협이 소리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아이의 말을 듣고 아무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얌마 서울놈, 이리 와보란께? 새끼가 귀가 먹었나.”

“아야, 고만해라 덕구야. 오늘만 날이냐, 시간은 앞으로 허벌라부러.

“암은, 나한테 있는 것은 시간뿐이제.”

“그 옆 빡빡이는 이진군디, 대가리가 짱구라서 별명도 짱구여. 저 시끼들 둘 다 조동구 꼬봉인디야, 동구 빽 믿고 맨날 까부는 시끼들이어. 근디 저 시끼는 옆 반인디 왜 왔으까.”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문승협의 뒤통수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들이 어떤 애들인지 잘 듣고 앞으로 조심하라는 듯 설명해 주었다. 갑자기 문승협의 왼쪽어깨를 툭 치며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김철종이여, 잘 지내보드라고.”

“그래, 잘 지내자.”

짝꿍 박진숙이 뒤쪽을 힐끔 보더니, 김철종의 말이 사실이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저 시끼들 양아친께, 웬만하믄 피해 다녀야 써, 까딱하믄 줘터진다잉.”

“응, 알려줘서 고마워.”

“아야, 근디 뭔 냄새 다냐? 어디서 꼬리 한 냄새 안 나냐? 킁킁.”

“염병하네, 뭔 냄새가 난다고 지랄이냐 지랄은?”

“음마, 가시나가 뭔 욕을 그렇게 해 쌌냐. 승협어, 너는 안나냐?”

“어? 어, 무슨 냄새? 난 잘 모르겠는데?”

“썩을 시끼가 코도 썩어갖고, 염병하고 있어 그냥.”

“아따 가시나, 입이 허벌나그만. 안 나믄 그만이제, 아조 욕을 입에 달고 살그만.”

김철종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난다고 하자, 박진숙이 찔려서 발끈하며 욕했다. 문승협은 김철종의 동의를 구하는 물음에도 그냥 모른 척 얼버무렸다. 박진숙과 김철종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김용남과 키 큰아이들이 새 교과서를 들고 교실앞문으로 줄줄이 들어왔다.

“아야, 교단에 쭉 줄 맞춰 놔라잉.”

“그냥 바닥에 놔도 되까?”

“잉, 암시랑 안 해.”

“하기사, 곰방 나눠줄 것인께.”

“야, 짱구. 넌 뭐더러 왔어, 느그 반으로 안 가?”

“저 시끼 뭐라 그래 쌌냐? 내가 오든 말든, 니가 뭔 상관인디.”

“깝치지 말고 얼른 가라잉, 곰방 선상님 오신께.”

“으짜스까, 나는 아직 갈 맘이 없어분디.”

“너 시방 뭐라고 씨부리냐, 승질 건들지 말고, 좋게 말할 때 꺼져라잉.”

“아따, 내 발로 내가 왔은께, 인자 내 발로 가야겄다.”

김용남이 새 책을 내려놓는 아이들을 살피다 교실 뒤쪽에서 시끄럽게 장난치는 강덕구와 이진구를 발견했다. 이진구에게 자기 교실로 가라며 무섭게 쏘아보았다. 움찔한 이진구가 꿀리지 않고 스스로 간다는 듯 거드름 피우며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김철종말에 의하면 김용남이 전교 1등에 싸움도 잘했다. 괴롭힘 당하는 아이들을 보호해 주고 친절해서 인기 있었다. 반면 아이들이 '쌈구'라 부르는 '조동구, 이진구, 강덕구'일당은 늘 상 아이들을 괴롭혀서 기피대상이었다. 이를 막는 김용남과는 앙숙관계였다. 쌈구 우두머리인 조동구가 싸움으로 김용남을 이긴다는 소문이 있지만, 전교회장인 6학년 싸움짱이 김용남 뒤에 버티고 있어 조동구가 참고 있다고 했다. 김용남과 조동구가 싸울뻔한 적은 있었으나 실제로 둘의 싸움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그제야 3학년 때 김용남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담임선생이 김용남을 금방 알아보고 임시반장을 시킨 이유를 알았다.

잠시 후 담임선생이 가병수와 함께 다른 교과서보다 부피가 큰 미술책과 음악책을 들고 왔다. 혹시 빠진 교과서는 없는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반아이들에게 번호 순서대로 나와서 새 교과서를 한 권씩 챙겨 자리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가병수의 실과교과서가 두 권이고 자연교과서가 없어 잠시 소동이 있었지만, 자연교과서를 두 권 가져간 아이가 있어서 금세 해결되었다. 교과서가 다 배포되자, 담임선생이 의자를 책상 위에 뒤집어 올려 뒤로 옮기라고 하였다. 이번에도 번호 순서대로 빗자루 쓸기, 물걸레질, 유리창 닦기 등을 정해주며 청소를 지시했다. 김용남에게 교무실에 가있을 테니 청소 끝나면 보고하라고 하였다. 반아이들이 주어진 임무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김용남이 청소를 마친 뒤 조용히 있으라 하고 교무실에 가서 담임을 모시고 왔다.

“다들 청소하느라 욕봤다. 오늘은 교실마룻바닥에 초 칠하고 광내기를 안 했는디, 토요일마다 수업 끝난 후에 대청소함시로 할 것이어. 금요일까정 광낼 때 쓸 왕초 하나씩 갖고 와서 반장한테 내, 알겄냐?”

“예.”

“내일은 개인면담으로 수업 없이 자습할 것인께, 산수책하고 연습장만 챙겨 오고. 뭔 질문 있냐?”

“선상님, 수업시간표는이라우?”

“잉, 시간표는 내일 알려줄 것이어. 또 다른 질문 있냐? 없으믄 반장 끝내자.”

“차려, 열중쉬어, 차려, 선상님께 경례.”

“감사합니다.”

문승협은 서둘러 새 교과서를 가방에 넣었다. 교실을 나와 제2별관 1층에 있는 2학년 1반 문현아교실을 찾아갔다. 5학년 교실이 있는 본관건물은 1층에 양호실, 총무과, 교무과, 교무실, 교장실, 2∙3층에 과학실, 자료실이 있었다. 2,3,6학년 교실이 있는 제2별관건물과 가깝지만 따로 떨어졌다. 문현아교실은 출입문이 제2별관서쪽 끝에 있어 가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교실 앞에는 저학년이라선지 학부모 여러 명이 교실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승협은 혹시 엄마가 있나 기대에 차서 찾아보았다. 역시나 없어서 서운했다. 교실창문에 다가가 학부모처럼 교실 안을 살피며 동생을 찾았다. 문현아표정이 편안해 보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선생님말씀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긴장한 동생을 보면서 생각했다.

‘왜 나는 매번 실망하면서, 방금 또 엄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까? 만약 엄마가 여기에 있었어도, 현아 눈빛이 저렇게 불안할까?’

그때 문현아가 오빠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문승협도 같이 웃어주며 선생님말 잘 듣고 노트에 기록하라고 손짓했다. 문현아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더욱 집중했다. 다행히 조금 전보다는 긴장이 많이 풀린 표정이었다. 아이들의 종례인사와 함께 학부모들이 우르르 교실로 들어갔다. 문승협은 들어갈지 말지 담임선생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문현아가 새로 받은 교과서를 가방에 넣지 못하고 낑낑댔다. 문승협이 재빨리 들어가 교과서와 가방을 대신 챙겼다.

“현아야, 오빠가 책이랑 가방이랑 챙겨서 교실 앞에 있을게, 빨리 화장실 갔다 와.”

“오빠, 어디 가지 말고 꼭 교실 앞에 있어, 알았지?”

“알았어, 걱정 말고 다녀와.”

문현아는 금방이라도 쌀 것처럼 부리나케 뛰어갔다. 문승협은 동생소지품을 마저 챙겼다.

“오메오메, 니가 오빤갑다잉.”

“네.”

“오빠가 겁나게 자상하네, 오줌 마려운 건 또 어떻게 알았대?”

“그냥 보면 알아요.”

“호호호, 그래야. 느그 엄마는 어디 가고?”

“…….”

옆에 있던 한 학부모가 화장실에 가는 문현아와 문승협을 번갈아 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참견했다. 이를 지켜보던 문현아의 담임선생이 다가왔다.

“그러면, 네가 현아오빠 5학년 승협이니?”

“네, 안녕하세요.”

“그래, 동생 챙기러 왔구나?”

“네.”

“호호, 그래, 참 기특하네.”

“그란께 말이요, 이런 오빠가 또 어디 있으까잉.”

“선생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그래, 현아 잘 데리고 가거라.”

“네. 안녕히 가세요 아줌마.”

“아따 인사성도 바르네.”

문승협은 문현아의 담임과 학부모에게 인사하고 교실을 나왔다. 교실 앞에서 기다리는 게 어색해 화장실 쪽으로 서너 발짝 갔다. 마침 문현아가 총총걸음으로 왔다.

“오빠, 갔다 왔어.”

“현아야, 수업시간이든 언제든 화장실 가고 싶으면, 손들고 선생님께 말해. 그러면 보내주실 거야, 오늘처럼 그렇게 웅크리고 있지 말고, 알았지?”

“그래?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

“아니야, 선생님은 말하면 다 들어줘.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다 말해도 돼. 너 1학년 때도 참다가 옷에다 싸서 오빠가 말했잖아.”

“아씨, 내가 언제. 알았어, 앞으로 꼭 그럴게, 됐지?”

문승협이 씩 웃어 주었다. 자기 가방은 등에 동생 가방은 앞에 메고 정문을 향해 운동장을 건너갔다. 문현아가 양손에 하나씩 든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뒤따랐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기 책가방은 자기가 메겠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동생이 메기에는 가방무게가 꽤 있어 괜찮다고 했다. 문현아네 반에 왜 엄마들이 와있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교과서무게만큼 머리에 든 지식도 무거우면, 누구도 공부하지 않겠다. 지식은 머리에 들어가면 무게가 없어지는 걸까? 우리 엄마는 왜?’


문승협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동생에게 힘든 내색 없이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에서 가라앉은 엄마목소리가 들려오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루문을 열며 다녀왔다고 인사해도 인기척이 없었다.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무 대꾸 없이 안방에 돌아누운 할머니와 수심 가득한 얼굴로 작은방에 앉아있는 엄마를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자고 있는 문윤아를 초점 없이 바라보는 엄마눈치를 살폈다. 문현아가 뾰로통해서 엄마에게 푸념하였다.

“엄마, 다른 엄마들은 학교 끝날 때 다 왔는데, 엄마는 왜 안 왔어?”

“넌 지금 그것이 중요하냐? 지금 내 마음이 말이 아닌데, 그런 말이 나와?”

“내가 엄마마음을 어떻게 알아.”

“엄마, 현아가 뭘 안다고 그래요.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현아한테는 그러지 마세요.”

“어른이 말하는데, 너는 어린것이 뭘 안다고 참견은 참견이냐?”

“알았어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현아야, 손 씻고 밥 먹자, 가자.”

문현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에게 혼날까 봐 부리나케 오빠뒤를 따라갔다. 문승협은 주방으로 가서 석유풍로에 불을 붙였다. 아침에 먹었던 미역국냄비를 올려놓고 밥상을 폈다. 문현아가 밥상 차리는 오빠를 도우려 나섰다.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다 김치그릇을 바닥에 쏟았다. 순간 얼음처럼 굳어 당황한 눈빛으로 문승협을 쳐다봤다. 문승협이 얼른 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문현아에게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할머니와 엄마가 있는 방 쪽을 한 번씩 살피며 귀 기울였다. 만약 할머니가 알면 엄마가 야단맞고, 엄마가 알면 자신이 혼날 일이라 잔뜩 가슴 졸였다. 다행히 인기척이 없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현아에게 화가 났지만 참아야 했다. 엄마에게 야단맞아 이미 주눅 든 상태였고, 도우려다 발생한 일이어서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쏟아진 김치를 젓가락으로 집어 그릇에 담았다. 그나마 그릇이 깨지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불안해하는 문현아에게 괜찮다고 속삭이며 다독했으나 여전히 울상이었다. 빨리 치워야겠다는 생각에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걸레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문현아가 부리나케 걸레를 들고 오더니 미안한 마음에 직접 닦으려 했다. 하지만 서투른 동생에게 맡길 수 없어 걸레를 달라고 하여 서둘러 정리했다. 김치국물을 훔쳐낸 걸레를 문현아에게 걸레통에 가져다 놓으라 하고 반찬을 꺼낸 후 국을 떠 담았다. 문현아가 가만히 지켜보다 수저와 젓가락을 가져왔다. 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거의 다 먹을 즈음 할머니 박옥춘이 주방으로 왔다.

“뭐더냐, 밥 묵냐?”

“네, 할머니는 점심 드셨어요?”

“난 안 묵어도 암시랑 안 한께, 니들이나 많이 묵어.”

“네.”

“새끼들은 밥 묵는다고 이런디, 에미라는 년은 저렇게 쳐 자빠졌으니. 으이그, 속 터진다 속 터져.”

“아녜요 할머니, 엄마가 차려준다고 했는데, 그냥 제가 차려 먹겠다고 했어요.”

“알았은께, 쓰잘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묵어라.”

문승협이 집에 들어왔을 때 짐작은 할머니말투로 확신으로 바뀌었다. 불안한 마음이 요동쳤지만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었다. 태연히 오뎅볶음을 집어 할머니눈치를 살피는 문현아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문현아가 반찬을 챙겨주는 오빠에게 싱긋 웃으며 입에 넣었다. 문승협은 밥 먹으며 동생과 눈이 마주칠 때는 살짝 미소 지었으나 거의 무표정이었다. 문승협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밥을 다 먹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냈다. 문현아에게 한 컵 따라주고 밥그릇에 물을 따라 마시면서 할머니동태를 살폈다. 박옥춘이 이항리가 있는 방에 잠시 귀를 대보더니 문을 확 열어 재치고 들어갔다.

“아야, 아그들이 밥 묵는다고 김치까지 엎어가믄서 저러고 있는디, 너는 쳐 자빠져있냐.”

“…….”

“뭔 한 일도 없으믄서, 맨날 그렇게 쳐 자빠져 있으믄 으짤라고 그라냐?”

“왜 한 일이 없어요, 좀 전에 이불빨래도 했잖아요.”

“그라믄, 그깟 빨래 좀 했다고 시방 유세 떠냐? 오매오매, 즈그 덮을 이불 빨고도 저러믄, 시엄씨 덮은 이불 빨았으믄 동네방네 난리 나겄네.”

“제가 청소도 했잖아요. 어머니, 또 뭔 심사가 틀어져서 이렇게 난리세요.”

“뭐라고야, 난리야. 시엄씨한테 말하는 저 뽄데보소. 어허, 속에서 천불 나그만 그냥.”

자고 있던 문윤아가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깨서 울었다. 문승협이 얼른 달려가 문윤아를 안아 달래면서 문현아까지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아야, 동네사람한테 한번 물어보끄나? 시엄씨 점심도 안 차리고 자식새끼들 밥도 안 주믄서, 이렇게 쳐 자빠져있는 며느리가 세상에 있냐고?”

“어머니, 오전에 애들 전학 때문에 학교 갔다 오니까, 어머님이 야단치며 청소하라 하셔서 청소했고. 빨래하고 힘들어서 쉬다 보니 이렇게 된 거예요.”

“뭔 소리까잉. 사내새끼를 주방에 들여보내는 것도 그런디, 밥까지 차려 묵게 한 것이 자랑이냐 시방? 시엄씨는 그렇다고 치자, 니 새끼라도 밥은 제때 제대로 챙겨 먹여야제.”

“어머니, 엄마가 좀 힘들면 애들이 차려 먹을 수도 있죠. 그걸 갖고 이렇게 저를 쥐 잡듯이 잡으세요?”

“오매오매 환장하네, 내가 너를 쥐 잡듯이 잡아야.”

문승협이 엄마와 할머니의 다툼을 피해 동생들을 데리고 나왔으나 마당에서도 들렸다. 막냇동생 귀를 막으며 뒤뜰로 자리를 옮겼다.

“오빠, 할머니가 김치그릇 쏟은 걸 어떻게 알았지?”

“걸레를 본 거 같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할머니는 왜 맨날 엄마한테 화내? 할머니 나빠.”

“그런 거 아냐. 어른들은 각자 자기 생각이 있는데, 서로 맞추려는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엄마도 좀 그래. 할머니가 뭐라 하면,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하면 될 것 같은데.”

“엄마도 매번 그러기 힘드니까 그러는 거야. 너도 가끔 오빠말 안 들을 때 있잖아, 그거랑 비슷해.”

“그럼 오빠는 누구 편이야?”

“가족끼리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거 없어, 편드는 거 아니야.”

“난 오빠 편인데?”

“하하, 그래 오빠도 현아 편이야.”

“오빠는 맨날 언니 편만 들어, 내 편은 없고.”

“왜? 윤아 편은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고, 오빠까지 있으니까 제일 편이 많잖아.”

“와, 그런가? 오빠도 내편인 거 맞지? 나는 언니보다 내편이 더 많지 롱.”

문승협은 문득 서로 배려해야 할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더 많이 주고, 때로는 불편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도 마음대로 관계를 단절할 수 없는 사이여서 어쩔 수 없이 감당하리라는 믿음 때문에 공격하겠지만, 그래서 더 아프다는 걸 다들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박옥춘과 이항리의 고부갈등은 며느리가 점심을 차려주면서 잠잠해졌다. 그러나 박옥춘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집에 들어오는 순서대로 딸들을 붙잡고 고자질하듯 하소연하였다. 두 딸 또한 엄마 편을 들고 적극 동조했다.

이항리도 마찬가지로 시어머니나 남편과 갈등이 있는 날이면, 늘 아들 문승협을 붙들고 신세를 한탄하였다. 이날 저녁도 다르지 않았다.

문승협은 저녁상차림을 대하는 두 고모의 불만스러운 태도와 싸늘한 눈빛에 위축되었으나, 엄마와 할머니의 언쟁이 있고 나면 항상 뒤따랐던 행동이라 태연한 척하였다. 그렇게 어른들의 언행에 영향받지 않은 것처럼 내외적으로 힘겹게 잘 버텼지만 엄마에 의해 무너졌다. 이항리가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거실에서 TV 보는 문승협을 방으로 불렀다. 문승협은 또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엄마가 어떡하면 좋을까? 네 할머니는 왜 이 엄마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답답하고 미치겠다.”

“엄마, 엄마가 참으면 안 될까?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나이 드신 어른이니.”

“아야 승협아, 나이 들면 그래도 되는 거야? 맨날 트집 잡고 욕하고, 어른이면 그래도 되는 거냐고.”

“엄마, 엄마마음 알겠는데, 그래도. 아니, 아니다, 어른이면 그러면 안 되지.”

“아니야, 말해봐. 왜, 엄마가 잘못한 거야? 괜찮으니까 말해봐, 말해보라니까?”

“엄마가 잘못한 것 없어, 할머니가 심한 것 같아.”

“내가 너 낳고 방에 좀 누워있었더니, 누구는 애 안나 봤냐면서 일 안 하고 누워있다고, 네 할머니가 바가지에 물을 떠 와서 쫙 뿌리더라. 기가 막혀서, 어디 그뿐이냐? 너 임신했을 땐 땡볕에 밭일까지 시켰다. 만삭에 일하다 몸이 무거워 힘들고,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아 좀 쉬려 하면 노발대발 난리 쳤다. 내가 한이 맺혔다 한이.”

“엄마, 알아요. 그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서 잘 알고 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내가 뭔 죄를 지었을까? 뭔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시집살이당하면서 사나 모르겠다, 흑흑흑.”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래, 엄마는 죄지은 것 없어. 엄마, 울지 마.”

“내가 시집와서 시댁복도 남편복도 없고, 내가 정말 너 하나만 보고 산다, 흑흑.”

“알아 엄마, 아니까, 이제 그만 울어요. 엄마가 계속 우니까, 애들도 따라 울잖아.”

문승협은 그동안 수없이 반복된 엄마의 신세한탄을 외울 정도로 들어왔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처음엔 엄마가 불쌍하고 너무 슬퍼서 같이 울며 동화되었다. 세상 눈치를 조금 알아가던 1학년쯤엔 듣기만 하기도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원망에 가슴에서 복받치는 화를 느꼈다. 엄마를 중단시켜보려 했으나 하소연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 듣다가 정신이 멍해지고 엄마기분이 풀리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할머니가 밉다, 엄마가 불쌍하다, 팔이 안으로 굽는구나……. 그래도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문승협은 낮에 엄마와 할머니가 다투며 한 말들이 각자 입장에서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어떤 분노를 느꼈다. 이런저런 상념에 휘말려 괴로워하다 겨우 잠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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