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애정결핍증? - (1)
“승협아! 빨리 일어나라, 빨리!”
“응, 으응?”
“여기 이 옷 입고, 이 양말 신어.”
이항리가 무언가에 쫓기듯 잠들어있는 문승협을 재촉하여 깨운 뒤, 서둘러 문현아와 문윤아에게 옷을 입혔다. 문승협은 방학인데도 이른 새벽에 깨우고, 허둥지둥 동생들에게 옷을 입히는 엄마를 향해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우 졸려. 엄마 왜 그래, 우리 어디 가? 응?”
“뭔 말이 그리 많아, 빨리 입으라면 입지, 네가 몇 살인데 아직도 어린애처럼 그래? 동생들도 이렇게 알아서 잘 입는데, 넌 오빠가 돼가지고 왜 그래? 넌 우리 집 장남이야 장남, 장남이 되가지고는 쯧.”
“씨, 옷 입는 거랑 오빠랑 장남은 무슨 상관이라고.”
“밖에 추우니까, 이 털모자 쓰고 장갑도 껴.”
이항리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다그쳤다. 문승협은 혼자 중얼거리며 마지못해 옷을 입었다. 눈을 부릅뜬 이항리가 털모자와 장갑을 아들에게 쥐어주고는 목도리를 목에 뱀을 감듯 칭칭 감았다. 문승협이 엄마재촉에 신발을 신은 둥 마는 둥 대문을 나섰다. 대문 앞에 김기사가 차에 시동을 켜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1976년 서울, 한겨울의 매섭고 차가운 새벽공기와 매캐한 연탄냄새가 그들을 괴롭혔다.
문승협은 동생들과 뒷좌석에, 이항리는 앞 좌석에 앉았다. 김기사가 트렁크에 짐을 싣자마자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이항리는 차가 달린 지 3분쯤 지나서야 긴장을 누그러트리고 의자 깊숙이 앉았다. 이런 상황을 만든 남편 문경준을 증오하며 결혼하게 되기까지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렸다.
문경준은 부농집안인 아버지 문재환의 4남 2녀 중 장남이었다. 잘생긴 서구적 외모와 도시성향의 활달한 성격인 데다 노래를 잘해 주위에 항상 친구가 많았다. 친구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았다. 하는 일 없이 놀다 군대에 갔으며, 제대하고 아버지성화에 못 이겨 곧바로 이항리와 결혼하였다.
이항리는 고위공무원 집안의 2남 4녀 중 둘째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욕심이 많았고, 유독 질투와 자존심이 강했다. 결혼 일 년도 채 안되어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중매쟁이를 통해 한번 본 맞선으로 결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승협을 임신했으나 반년도 안되어 부부사이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외형적으로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았던 부부였지만 서로 자란 환경과 성격이 달랐다. 동갑내기 스물둘 어린 나이여서 자기주장이 강해 다툼이 많았다.
또한 처음 며느리를 들인 박옥춘은 이항리를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시집살이를 심하게 시켰다. 문경준은 그런 상황에 처한 아내를 위로해 주기는커녕 허구한 날 친구들과 어울리기에 바빴다. 의지할 곳 없었던 이항리는 남편과 싸우거나 시집살이가 힘들 때마다 친정으로 갔다. 문경준은 아내를 달래서 데려오지는 못할망정 그냥 방관하기 일쑤였다. 이항리는 친정여동생들의 위로와 친정엄마의 훈육으로 그때마다 스스로 시댁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문승협을 출산하였다.
이항리가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아있는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시무룩한 아들표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모든 것이 남편 문경준탓이라 여겼다.
아들 문승협이 태어난 후에도 부부갈등과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나아지기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문경준은 자식이 태어났음에도 뒤늦게 대학을 가겠다며 혼자 서울로 갔다. 이항리는 가뜩이나 의지할 데 없는 상황에서 남편마저 서울로 가버리자 친정과 시댁을 자주 오갔다. 때때로 아들을 시댁과 친정에 남겨둔 채 다녔다. 그래서 문승협은 갓난아기임에도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하였다.
더욱이 이항리는 서울에 홀로 가있는 대학3학년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고 소문이 돌았을 때는 아들 문승협을 아예 친정에 맡겼다. 방학인데도 남편이 내려오지 않자 갓 태어난 딸 문현아만 데려갔다.
문승협은 그렇게 2년이란 시간 동안 외갓집에 맡겨졌다. 그나마 외갓집식구가 물고 빨듯 사랑스럽게 키워줘서 다행이었다. 외할머니를 비롯한 막내이모와 작은 외삼촌이 애지중지하며 한시도 혼자 놔두지 않았다. 문승협에게 외갓집은 좋은 추억이었다.
문승협은 다섯 살이 되기까지 부모와 함께한 시간보다 헤어져있는 시간이 많아 가족과 사는 것에 집착했다. 어리지만 자란 환경이 원인이었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 문경준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다시 부모와 살게 되었다.
자동차가 덕수궁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항리는 시아버지 문재환만 판단을 달리했더라면, 오늘같이 이렇게 쫓기는 상황을 초래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무척 원망했다. 남편의 대학졸업직후 네 식구가 같이 살 때였다. 시아버지가 일부 전답을 팔고 남은 전답을 소작농에게 맡기면서까지 광산개발투자에 적극적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불행을 이끈 시발이라고 단정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당시를 회상하였다.
문재환은 광산개발투자에 나선 이후 광산 2개에 더해 3개의 광산채굴권을 취득하였다. 아들 문경준을 그중 한 광산에 책임자로 출근시켰다.
이번에는 이항리가 아들 문승협을 시어머니 박옥춘에게 맡끼고 어린 딸 문현아만 데려갔다. 남편이 근무하는 광산이 막 개발하는 단계로 생활환경이 열악해서였다.
문경준은 한동안 광산개발과 채굴업무를 열심히 했다. 그러나 셋째 딸 문윤아가 태어나자 도시성향성격 탓에 적성에 맞지 않다며 아버지 문재환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결국 문재환은 아내오빠 박동후와 설립한 '태선화학주식회사'에 문경준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했다. 문경준은 말단직원으로 입사시킨 아버지에게 불만이었지만 도시생활에 대한 기대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문승협은 1년 만에 부모와 동생들을 만나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어린 문승협이 가족을 다시 만난 날 동생들을 밀어내고 엄마 품에 안겨 자면서 기쁨과 서러운 눈물을 밤새 흘렸다. 엄마와 다신 떨어지지 않겠다며 손가락을 걸고 약속에 약속을 다짐했다. 자주 오래 떨어져 살아서 서먹한 아버지와 생활이 어색하였으나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며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경준이 처음 의욕적으로 회사에 다닐 때와 달라졌다. 점점 말단사원이라는 이유로 자존심 상해하며 나태했다. 아내와 어머니에게 월급쟁이가 싫다는 푸념을 자주 하기에 이르렀다. 문승협이 그렇게 갈망한 가족과 헤어짐 없는 행복시간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문재환은 광산개발사업 때문에 보름 정도씩 광산을 순회하며 광산사택에 기거하였다. 집에는 3개월에 한 번 정도 들렀기에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사업을 구상하던 문경준이 아버지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실행에 옮겼다. 어머니 박옥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문승협만을 남겨둔 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다. 사업을 하기에는 목포라는 도시가 너무 좁다면서 막무가내였다.
어둑한 새벽녘이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대로를 한참 달리던 차가 속도를 줄이더니 승강장 쪽으로 들어갔다. 문승협이 비몽사몽 간 도착한 곳은 몇 번 와본 서울역이었다.
‘푸푸, 잠시 후 06:30분발, 목포행 새마을호 열차가 곧 출발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서둘러 개찰하시고, 3번 탑승구로 탑승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역무원아저씨의 안내말이 음률에 맞춰 웅얼거리듯 방송을 통해 역내를 울렸다. 대합실은 이른 시간인데도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시큼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기사가 기차표와 입장권을 사서 침을 챙겨 들자, 이항리도 막내 문윤아를 안고 기차를 향해 바삐 내려갔다.
김기사가 열차짐칸에 짐 정리를 마치고 이항리와 몇 마디 나눴다. 슬퍼 보이지만 인자한 목소리로 아이들과도 작별인사를 했다.
“승협아, 엄마 힘드시니까 네가 동생들 잘 챙겨라. 나중에 또 보자, 안녕.”
“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김기사가 열차에서 내려 창가로 다가갔다. 문승협에게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둘째 문현아가 이상하다는 듯 이항리에게 물었다.
“엄마, 아저씨가 우는 것 같아.”
“응, 당분간, 아니 오랫동안 못 보니까 그래.”
“왜 오랫동안 못 봐?”
“그런 일이 있어.”
이항리가 자꾸 묻는 딸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냥 얼버무렸다. 기적소리가 울리고 희뿌연 수증기가 차창을 가렸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가 차가운 새벽안개를 가르며 목포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항리는 잠에 빠진 셋째 딸 문윤아를 무릎베개하여 뉘었다. 차창을 보며 간간히 한숨을 내쉬었다. 문승협은 지금과 비슷한 엄마의 멍한 눈빛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가 국민학교 2학년 겨울쯤이었으니 거의 2년 만이었다.
아내와 두 딸을 서울로 데려간 문경준은 불알친구인 박준배와 동업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에 성실히 매진하면서 점차 매출이 오르는 성과를 냈다.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아들 문승협을 서울로 데려왔다. 문승협은 그렇게 엄마와 동생들이 있는 서울로 가서 다음 해 2학년에 전학했다. 서울에 전학한 후 가족과 함께한 시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겨우 1년도 채 안되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
문경준의 친구이자 동업자인 박준배가 평소 회사일과 가정에 충실하며 모범을 보였지만, 말수가 별로 없어 주위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혼자 술집에 가기 일쑤였다. 박준배는 혼자 자주 가는 술집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여대졸업생을 우연히 만나 호감을 갖게 되었다. 둘이 만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박준배가 그녀에게 일할 수 있는 의상실을 얻어주며 환심을 샀다. 두 사람은 곧 내연관계에 이르렀다. 박준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넉넉지 않은 수입에 무리하여 내연녀에게 집도 구해주고 두 집 살림을 했다. 내연녀의 의상실이 잘되지 않아 생활비까지 대주었다. 내연녀와의 호화로운 생활과 내연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돈이 필요했다. 마침내 문경준 몰래 회사공금과 수출대금을 빼돌렸다. 이로 인해 문경준의 회사는 악화된 자금사정으로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났다. 갑자기 들이닥친 법원집행관들에 의해 문경준집은 온통 차압딱지가 붙여졌다. 채권자들이 몰려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문승협은 다음날 동생들과 함께 엄마 손에 이끌려 목포행 기차를 타야 했다.
문승협은 당시 영혼이 빠져나간 엄마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순간 슬픔이 몰려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항리가 놀라 물었다.
“승협아, 왜 그래?”
“엄마, 나 다 알아.”
“응?”
“아빠 일이 그때처럼 또 잘못된 거야, 그렇지?”
“아 아냐, 아니야.”
이항리가 당황을 감추며 손사래 쳤으나, 문승협은 이미 짐작했다. 수심 가득한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자신만 목포로 3학년에 전학시켜 놓고 서울로 가버린 엄마와 이별했던 날이 떠올라 슬펐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정들이 어제 일처럼 생각났다.
문경준은 아내와 자식들을 목포 어머니집으로 보낸 후 은행과 채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정사정하고 설득했다. 일 년 안에 모든 빚을 갚겠다는 각서를 써주고서야 겨우 회사를 계속 운영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두 딸은 서울로 데려왔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아들 문승협을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항리가 서울로 떠날 때 곧 데리러 오겠다고 아들을 달랬다. 문승협은 싫다 안 된다며 자지러졌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라 기절할 정도였다. 가족과의 이별에 익숙할법한데도 겨우 10살이라 그러지 못했다. 엄마와 동생들이 혼자만 남겨두고 서울로 가버려 서러웠다. 한동안 이별의 아픔을 달래려 밤만 되면 대문 앞 계단에 앉아 밤하늘을 보며 울고 또 울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할머니가 야단칠까 무서워 이불을 푹 덮어쓴 채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이를 악물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었다.
하지만 그런 크나큰 슬픔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랑 두 고모와의 생활에 스스로 순응했다. 얼마 후 담임선생이 가정방문을 왔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문승협을 측은히 생각하여 잘 대해주었기에 학교생활에서도 잘 적응해 갔다. 3학년 3반, 다들 어린 나이라 동네친구 외에는 대부분 문승협을 기억하지 못했다. 서울로 전학 갔던 2학년 때는 서울아이들이 목포촌놈이라고 깔보았었다. 목포로 다시 전학 갔던 3학년 때는 목포아이들이 서울서 전학 와 서울말을 쓴다며 서울놈이라고 하였다. 담임선생이 아이들에게 놀리지 마라며 야단쳤다. 때론 웃으면서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1학년 때 문승협의 담임이었던 오성희선생이 3학년담임이어서 다행이었다. 오성희선생의 따듯한 관심과 배려로 가족과 이별에 대한 슬픔을 잊고 학교생활에 익숙해졌다. 문승협에게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할머니가 싸준 김밥과 사이다를 챙겨 가을운동회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 해 겨울방학이 시작한 어느 날 이항리가 문승협을 데리러 왔다.
문경준은 부도여파로 사업에 고전하였다. 은행과 채권자들에게 약속한 일 년이 지나도 빚을 갚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아버지 문재환에게 도움을 받아 최소한의 빚을 청산하였다. 비로소 문승협을 다시 서울로 데려와 4학년에 전학시켰다. 가족과 떨어져 할머니와 두 고모랑 생활한 일 년여 시간은 어린 문승협에겐 감당키 힘든 기나긴 시간이었다.
빚을 어느 정도 청산한 문경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업재기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각고의 노력과 채권자들 협력으로 서서히 다시 자리 잡아갈 즈음, 그동안 도망 다니며 숨어 지내던 박준배가 찾아왔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무릎을 꿇고 눈물로 애걸복걸하였다. 문경준이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나 박준배의 끈질긴 사과와 애원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문경준이 박준배에게 넘어가 없었던 일로 하겠다며 용서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박준배가족이 문경준의 옆집으로 이사 왔다. 문경준이 마땅히 기거할 곳 없는 박준배가족에게 집까지 얻어준 것이었다. 박준배가 인생의 은인이라면서 평생을 다해 갚겠다고 예전과 또 다른 모습으로 열심히 문경준을 도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문경준의 회사가 점점 번창하게 되면서 박준배의 배신했던 과거는 자연스레 잊혀 갔다. 문경준과 박준배는 둘 다 똑같이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두었다. 아이들 나이가 서로 같은 또래여서 놀이공원이나 가족여행도 함께 다닐 정도로 무척 가까웠다. 서로 자주 왕래하며 한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그런데 한 달 전쯤 박준배와 그 가족이 온다 간다 한마디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
기차가 중간중간 멈추어 사람이 내리고 타기를 몇 번, 꾸벅꾸벅 졸던 문승협이 으스스한 추위와 배고픔에 잠에서 깼다. 이항리가 지나가는 홍익아저씨를 불러 세워 음료와 먹거리를 샀다. 김밥을 펼치고 삶은 계란을 먹기 좋게 까서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자, 배고프지, 어서 먹어. 목이 메이면, 여기 사이다 마시고.”
“엄마도 먹어.”
“엄마는 괜찮아, 아들 많이 먹어.”
문승협은 엄마가 조금은 안정되어 보였으나 여전히 수심 가득한 표정이 염려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어 치우는 동생들이 철없어 보였다.
‘푸푸, 잠시 후 열차가 송정리 송정리역에 도착하오니, 내리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문승협이 안내방송을 들으며 손톱으로 성에 낀 차창을 긁었다. 차창밖에 눈이 내렸다. 세상이 온통 눈에 덮여 하얗게 변해있었다.
“엄마, 얼마나 남았어?”
“응, 조금만 더 가면 돼. 왜, 추워?”
“아니, 난 괜찮아.”
스팀이 나오는 열차였지만 조금 썰렁했다. 문승협은 동생들을 한번 둘러본 후 차창밖을 내다봤다. 기차가 초점을 맞출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갔다. 하얀 세상이 펼쳐진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문득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못해 몹시 아쉬웠다.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다는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민우, 민주, 영길아, 모두 잘 있어라. 참, 오늘 얼음썰매를 타기로 했었는데’
곧 목포에 도착한다는 생각이 들자 목포친구들 아준, 성철, 영환이가 기억났다. 조금 있으면 마주할 새로운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목포역에 내렸을 때는 따스한 햇볕에 눈이 조금 녹아있었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유달산의 위엄과 바닷바람에 얹힌 차가운 공기가 문승협을 움츠리게 하였다.
목포라는 도시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하는 항구로 썼던 일제수탈전진기지였다. 때문에 도시 곳곳에 적산 가옥과 건물들이 즐비했다.
이항리가 목포역광장 앞에서 호객하는 짐꾼에게 짐을 챙겨주길 부탁하였다. 한 손에 작은 가방을 들고 문윤아손을 잡았다. 문현아와 문승협을 이끌고 택시승강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승협은 동생 문현아손을 잡고 빠른 엄마걸음을 따라갔다. 다행히 짐꾼 덕분에 택시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오거리와 시립도서관이 지나가고 언덕을 오르자 할머니집이 나타났다. 택시기사가 짐을 내려 집 앞 계단 한편에 모아두었다. 이항리가 서둘러 택시비를 지불했다. 작은 가방을 양손에 들고 두 딸을 앞세워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에서 들려왔다.
“누구시요?”
“어머니, 저예요. 엄마가 금방 나올 테니 승협이 넌 짐을 지키고 있어.”
이항리가 세상에서 가장 기죽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이항리가 두 딸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할머니 박옥춘이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추워하는 손자모습을 측은해하며 손을 감싸 쥐었다.
“오메오메 내 새끼 왔냐.”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아이고메, 손이 그냥 꽁꽁 얼어부렀네잉, 추운디 얼른 들어가자"
박옥춘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못마땅한 아들 문경준을 염두하고 문승협을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뭔 염병한다고 남 좋은 일 시키고, 지 새끼들은 이렇게 생고생시킨 다냐, 에이그.”
문승협은 엄한 데다 전라도 사투리로 서슴없이 욕하는 할머니를 무서워했다.
상기된 얼굴로 다시 나온 이항리가 나머지 짐을 들고 박옥춘과 문승협을 뒤따라 들어갔다.
이항리가 방 한쪽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들딸들을 줄 세우면서 박옥춘에게 인사를 청했다.
“어머니, 절 받으세요.”
“절은 뭔 절아. 절은 됐고, 추운께 얼른 이 아랫목으로 와.”
“그래도 절은 받으셔야죠. 얘들아 할머니께 절하자.”
박옥춘목소리에는 짜증과 측은함이 묻어있었다. 인사를 마다 하면서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항리는 나란히 선 아이들과 시어머니에게 큰 절을 했다. 박옥춘이 손자 문승협에게 따듯한 아랫목으로 오라며 채근하였다. 문승협은 할머니 재촉에 동생들과 아랫목으로 가 이불을 덮었다. 이항리는 인사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에이그, 아그들 애비는 어디 있데?”
“서울에요. 회사정리되는 대로 연락한다고, 조금만 참고 있으라네요.”
“미친놈이 친구친구 하드만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뭔 그 지랄을 또 당한대?”
“그러게요, 저도 속상하고 분해요.”
“그란께 내가 너보고 말 안 하드냐, 또 뭔 염병할지 모른께 잘 감시하라고.”
“네, 죄송해요 어머니, 저도 이런 일이 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주고, 있는 땅 없는 땅 전부 팔아서 해줬음은 정신 차려야제.”
문승협의 슬픈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엄마와 할머니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왜 할머니집에 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문승협은 뛰는 가슴을 누르며 숨죽인 채 앉아있었다. 이항리는 시어머니호통에 눈시울을 닦았다.
“친구친구 해봐야 아무 쓸 짝 없다고,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말린께. 거 뭐라 드냐, 뭐 거시기해? 지가 알아서 한다고? 어이 염병한갑다.”
박옥춘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이항리가 문승협에게 동생들을 데리고 작은방에 가서 책을 보든지 놀든지 하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할머니눈치를 보며 일어나 동생들을 이끌고 작은방으로 갔다. 동생들과 다다미거실을 지나 작은방으로 가는 중에도 분노한 할머니호통은 계속되었다. 작은방에 들어서자 동생들에게 책을 펴주고 자신도 책을 들었다. 신경은 온통 할머니방에 쏠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와중에 막내 문윤아가 언니가 보는 책을 자기가 보겠다며 칭얼댔다. 문현아가 순간 욱했으나 오빠눈치에 책을 읽어준다며 동생을 달랬다. 문승협은 계속되는 쩌렁쩌렁한 할머니목소리에 현기증을 느꼈다.
“인자 으짠대, 뭔 방법이 없다냐? 그놈은 못 잡냐, 얼른 사람을 풀어서라도 잡아야제?”
이항리는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훌쩍이면서 시어머니호통을 듣고만 있었다. 문승협은 불현듯 또다시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부모 없는 생활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불안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박옥춘은 계속해서 며느리를 야단치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였다. 이항리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경준은 회사가 다시 궤도에 오르면서 잦은 출장과 늘어난 업무량으로 바빠졌다. 박준배의 과거사를 아는 회사관계자뿐 아니라 주변사람들의 반대가 빛발 쳤지만, 한동안 성실하게 열심히 일해준 박준배를 다시 믿고 회사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더욱이 문경준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인 이항리까지 극렬히 반대했음에도, 다 지난 일이고 이젠 괜찮아졌다며 박준배에게 회사일 일부를 위임해 줬다. 박준배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어떤 이상한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위임받은 회사일을 잘 처리함으로써 모두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오히려 문경준에게 신임과 신뢰를 듬뿍 받았다. 그러나 문경준이 출장으로 회사를 비운 사이, 박준배가 인감도장과 서류를 훔쳐 회사의 건물과 공장을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대출받아 가족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문경준은 박준배가족이 사라진 다음날 사채업자가 이자를 받으러 와서 사실을 알았다. 은행도 곧 알아채고 납품업체에 발행한 어음을 결재하지 않아 또다시 부도상황에 처했다. 문경준이 난감한 상황에서 가족을 목포어머니집으로 보내고 지금 혼자서 힘들게 부도를 수습 중이지만, 박준배가 다시 돌아와 문경준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부터 세운 치밀한 계획이라 속수무책이었다. 더욱이 사채업자로부터 대출받아간 금액이 워낙 커서 수습할 가망이 없었다. 박준배가 처음에는 예전처럼 회사공금을 빼돌리려 했다. 문경준도 만일을 대비해 전표처리와 출납업무를 분리시켜 장부와 현물을 일일 결산하게 하였다. 회계담당과 재무담당에게 이상유무를 상호 확인토록 했다. 박준배가 빈틈을 찾기 어렵자 회사재산을 노린 것이었다.
문승협은 옆방에서 울먹이며 설명하는 엄마말을 듣고 박준배가 싫었다. 어린 마음에 그 가족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웠다.
“아이고, 내가 전생에 뭔 죄를 졌다고 이러까잉.”
“흑흑, 어머니 고정하세요.”
박옥춘이 며느리의 자초지종을 듣고 가슴을 치며 분통해하였다. 이항리도 소리 죽여 흐느꼈다. 두 사람의 한숨소리와 훌쩍이는 소리만 들릴 뿐 잠시 아무 말없이 정적이 흘렀다.
“아그들은 인자 으짤래?”
“아무래도 여기로 전학시켜야 될 것 같아요.”
“전학준비는 해왔냐?”
“네.”
“그래, 나중에 다시 야그 하고, 너도 일단 건너가서 좀 쉬어라.”
“네, 죄송해요 어머니.”
문승협은 이미 짐작은 했지만, 막상 전학이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머리가 띵하고 혼란스러웠다.
‘또 전학? 나 혼자? 현아는? 또 나 혼자만 여기 남는 건가? 엄마랑 동생들도 다 여기서 같이 사는 건가?’
계속되는 스스로질문에 답답하고 궁금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물어보고 싶었으나, 작은방으로 건너온 엄마모습을 보고는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리라 생각했던 문현아가 이항리에게 불쑥 물었다.
“엄마, 우리 전학해?”
“응? 응, 오빠하고 현아는 여기 학교로 전학할 거야.”
“엄마 나는, 윤아는?”
“윤아는 아직 어려서 전학 같은 거 없어.”
“야, 언니는 학교 다니니까 전학이지만, 너는 애기가 무슨 전학이냐?”
“피. 엄마, 윤아도 전학할래. 전학해 줘, 응?”
“그래 알았다, 그러자.”
문현아와 문윤아가 전학 때문에 계속 티격태격했다. 이항리는 팔베개를 하고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문승협은 불행 중 다행으로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엄마, 그럼 아빠는? 아빠도 같이 사는 거야?”
문승협은 불현듯 아버지가 생각나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으면서도 아차 싶었다, 이항리는 아무런 대꾸 없이 돌아누웠다. 문승협은 자신의 앞날이 어찌 될지 걱정되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불과 1년 만에 또 전학할 상황이었다. 이번에 목포로 전학하면 4번째로 매학년마다 전학이었다. 앞으로 또 언제 전학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아빠에게 어떤 원망도 하지 못했다.
문승협기억 속 아버지 문경준은 독불장군이고 두려운 존재였다. 자신이 항상 옳고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거나 이뤄내야 했다. 부부싸움할 때 큰소리로 욕하며 때로는 때리거나 힘으로써 엄마를 꼼짝 못 하게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상대로 도저히 불평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데다 함께한 시간이 적어 많이 어색해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사랑과 정을 내심 갈망하였다.
문승협은 자신도 자신이지만 상심해 있을 엄마가 더 염려되었다. 돌아누운 엄마등이 초라해 보였다. 엄마도 자신처럼 생각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불쌍했다.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시집와서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구박만 받고 오로지 아들만 바라보며 산다는 엄마. 순간 마음이 울컥해서 눈물이 났다.
문승협은 책을 보는 동생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스르르 잠들었다.
문경준과 이항리가 실랑이하며 격렬하게 몸싸움했다. 이항리가 흥분한 문경준의 힘에 팽개쳐졌다. 방바닥에 엎드려 문경준을 향해 울부짖었다.
‘당신이 좋아서 사는 게 아니야, 당신이 좋아 사는 게 아니라고. 애들 때문에, 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거야. 이젠 같이 못살겠어, 이제 더는 못살아.’
문경준이 씩씩거리며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이항리에게 단호한 어조로 결단을 내렸다.
‘그래? 그럼 갈라서자, 갈라서.’
‘승협아, 승협아!’
이항리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며 계속 문승협을 불렀다.
문승협은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천만 다행히도 꿈이었다.
“얘들아, 라면 먹어라. 승협아, 어서 일어나 라면 먹어, 라면 다 불겠다.”
이항리가 라면을 끓여 와서 아이들을 깨웠다. 문승협이 졸린 눈을 비비며 동생들과 밥상에 다가가 젓가락을 들었다. 이항리가 문승협에게 먼저 라면을 떠주었다. 두 딸에게도 떠준 후 아들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더 있으니까, 먹고 더 먹어.”
“엄마, 엄마도 먹어, 응?”
“그래, 같이 먹자.”
이항리는 두세 젓가락 뜨더니 젓가락과 그릇을 내려놓았다.
“엄마 더 먹어, 더 먹으라니까!”
“엄만 괜찮아, 많이 먹었어, 우리 장남 많이 먹어라.”
이항리는 아들 그릇에 라면을 더 떠주고 밥상에서 물러나 앉아 생각에 잠겼다. 문승협은 그런 엄마를 보자 엄마말이 생각났다. 이항리는 부부싸움을 하거나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당해 서러움이 복받칠 때면 문승협에게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해 왔다.
‘승협아, 엄마는 아빠가 좋아서 사는 게 아니고, 다 너 때문에 산다’
문승협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미움이 커져만 갔다.
날이 어두워지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고모 문희경이 도서관에서 돌아왔다. 문희경도 오빠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조카들에게 표시 내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메, 우리 집 장손 왔는가? 아이고, 우리 예쁜 조카님들 잘 있었냐?”
“안녕하세요 작은 고모.”
문승협남매들이 합창하듯 작은 고모에게 몰려가 인사했다. 문희경이 옷을 갈아입는다며 자기 방으로 갔다.
저녁시간이 되자 은행에 다니는 큰고모 문희숙이 들어왔다. 문희숙도 조카들을 반갑게 맞아줬으나 원래 말수가 적어서 기본적인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갔다. 이항리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갔다. 오랜만에 온 시댁이라 주방이 조금 낯설어 시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박옥춘이 안방에서 대답을 잘해주다가 급한 성격에 주방으로 갔다. 며느리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아들 문경준이야기가 나오면서 결국 호통으로 바뀌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이항리가 식사하고 나중에 말씀하자고 하였다. 박옥춘이 어른이 말하는데 말대꾸한다며 노발대발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문희경이 이항리에게 물었다.
“올케언니, 오빠는 어떻게 지낸다요?”
“준배씨가 살던 집이 아직 전세기간이 남아서, 당분간 거기서 지낸대요.”
“그라믄 계속 오빠 혼자 있소?”
“아뇨, 오빠가 연락하면 윤아만 데려오라고 했어요.”
이번에는 문희숙이 이항리에게 물었다.
“그라믄, 승협이하고 현아는 으짜고라우?”
“아 그게, 당분간 여기서.”
“그라믄, 나보고 아그들을 또 키우라고? 인자 둘씩이나, 어허.”
“아따 참, 엄마는 또 그런다.”
“뭐시 또 그래야? 아 그라믄, 내가 다 늙어서 뭔 힘이 있다고 아그들을 키운다냐?”
“엄마, 엄마는 손주들이 불쌍하지도 않소? 올케언니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 겄소?”
박옥춘이 이항리말끝을 물어 버럭 화냈다. 문희경이 대답을 못하는 이항리를 대신해 한마디 했다. 이에 박옥춘이 역정 내자 문희숙이 문희경을 거들었다.
문승협은 막냇동생 문윤아만 데려오라 했다는 엄마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밥을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경험상 엄마랑 떨어져 살지도 모른다고 추측은 했지만 막상 엄마입을 통해 들으니 슬픔이 몰려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는지 금세 마음을 통제할 수 있었다. 예전보다 조금 무덤덤했다. 오히려 동생 문현아와 산다는 사실이 위로되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에도 박옥춘과 두 딸은 이항리를 마치 죄인처럼 앉혀놓고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한동안 문경준의 회사일과 가족 앞날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작은방에서 문현아와 문윤아가 TV를 보다 꿈나라로 갔다. 문승협도 동생들 옆에 누워 어른들 이야기를 엿듣다가 잠들었다.
새벽녘에 이항리가 연탄불을 갈고 와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문승협은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에 깼다. 잠결에 엄마와 동생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바깥바람에 차가워진 엄마를 껴안았다.
“우리 아들, 깼어?”
“으응, 아니.”
“어여 더 자.”
“응, 엄마도 자.”
이항리가 문승협을 향해 옆으로 누워 팔베개를 해주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항리의 몸에 아직 냉기가 남아 있었으나 문승협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하고 포근한 엄마품이었다.
문승협이 아침에 눈떠보니 엊그제와는 다른 낯설면서도 친숙한 방에 누워있었다. 앞으로 있을 일들이 상상되면서 머리가 아팠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고 초인종이 울렸다. 낯익으면서도 새롭게 다시 적응해야 할 동네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인터폰에서 누군지 짐작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줌마, 승협이 왔지라?”
“누구니?”
“저 아준이어라우.”
“누구?”
“아야 승협아, 나와야 같이 놀게?”
문승협과 같은 학년인 동네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문승협은 반사적으로 인터폰 앞에 다가갔다. 친구들과 놀아도 되는지 엄마눈치를 살폈다. 이항리가 조금만 놀다 오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오랜만에 보는 쑥스러움에 대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밀었다. 한성철이 나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너희들 나 왔는지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제. 뭐 더냐, 얼른 나와야 놀게.”
“그래, 오랜만이다.”
“방학이라고 놀러 왔냐?”
정아준이 어깨동무하며 반갑게 물었지만, 문승협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 아직 모르겠어, 어쩌면 전학할지도 몰라.”
“으째서야? 아야, 너 전학간지 얼마 안됐잖애?”
“어? 응, 지금은 어떻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어, 아무튼 반갑다.”
“아야, 우리 뭐 하고 노까? 서울놈, 뭐 하고 노까?”
“음, 아무거나.”
문승협은 또 전학하는 게 창피해서 얼버무렸다. 한성철이 빨리 놀고 싶은 마음에 구슬을 꺼내 엄지와 검지로 튕겼다 받았다 반복했다.
“다마치기 하까?”
“난 구슬이 없는데?”
“그라믄 내가 스무 개 빌려주께, 나중에 갚어.”
“아야, 우리 삼각 치기 하끄나?”
“그라까.”
정아준이 구슬을 주면서 농담이라는 듯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한성철이 놀이를 제안하자, 정아준의 흔쾌한 동의에 문승협도 미소로 동조했다. 문승협과 친구들은 예전에 구슬치기 했던 공터로 뛰어갔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구슬치기 했던 공터는 3학년 때와 변함없었다. 서로 역할분담을 하지 않았으나, 한성철이 막대기로 적당한 위치에 삼각형을 그렸다. 정아준과 문승협은 나뭇가지로 삼각형을 중심으로 양쪽 열 발짝 정도에 선을 그었다.
“그라믄, 기본 몇 개로 하끄나?”
“승협이가 다마치기를 잘 못한께, 두 개로 하까?”
“오케바리.”
“아야 승협아, 우째하는지 기억은 나냐?”
“응, 기억났어.”
문승협이 전에 삼각 치기를 어떻게 했나 생각하는 사이 둘이서 놀이방식을 결정했다. 정아준이 설마 모르진 않겠지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라믄 기본 걸어. 삐틀이 다마는 안 된다잉?”
“당연, 넌 입도 안 아푸냐, 꼭 말을 해야 말이어?”
한성철이 찌그러진 구슬은 안 된다며 내려놓은 구슬을 살펴보자, 정아준이 핀잔주며 어이없어했다. 문승협과 친구들은 각자 구슬 두 개씩을 삼각형 안에 놓고 한쪽 선에 나란히 섰다. 한성철이 굴린 구슬은 삼각형 오른쪽 꼭짓점에서 반 뼘 정도에 멈췄다. 정아준이 굴린 구슬은 삼각형 정면에서 한 뼘 정도 전이었다. 문승협이 마지막으로 굴린 구슬은 힘 조절을 못해 삼각형을 지나가 버렸다. 한성철이 먼저 다음이 아준, 그다음이 문승협으로 순서가 정해졌다.
“오예, 아싸. 아야, 느그들 오늘은 개평 없다잉?”
“아야, 너나 나중에 눈물 찔찔 흘리믄서 개평 달라지 마란께.”
한성철이 놀이를 시작하려 선에 다가서면서 기선제압으로 한마디 하였다. 정아준은 콧방귀 뀌며 비꼬았다. 한성철이 던진 구슬은 정확히 삼각형 중심에 떨어졌다. 여섯 개 구슬 중에 네 개를 삼각형 밖으로 튕겨냈다.
“아야, 오늘 우는 것은 내가 아니라 느그들인갑다? 히히히, 아싸라비용.”
한성철이 보란 듯 구슬 네 개를 따가면서 살살 약 올렸다. 정아준과 문승협은 서로 쳐다보며 황당해하였다. 계속해서 두 번째 시도한 한성철의 구슬은 삼각형을 비껴나가 반대편 선 근처에 멈췄다. 다음 순서인 정아준은 남은 두 개라도 안전하게 따겠다는 작전이었다. 구슬을 던지지 않고 굴려 삼각형 근처에 최대한 가깝게 붙였다. 문승협은 어떻게 할지 재빨리 생각했다.
‘내가 아준이처럼 굴려서 삼각형에 가깝게 붙인다면, 다음순서가 성철이고 그다음은 아준이. 설사 성철이가 구슬을 따가지 못하더라도, 삼각형에 가깝게 붙인 아준이가 나머지 두 개 구슬을 따갈 확률은 99%. 그렇다면 구슬을 던져 두 개 구슬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안 하고는 내가 따갈 기회가 없다’
문승협은 삼각형안 두 개 구슬을 맞추려고 심혈을 기울여 던졌다. 터무니없이 옆으로 비껴갔다.
“히히히, 인자 내 차례제. 아준어 으짜까잉, 너까지는 안 가겄다야.”
“아따 새끼, 참 말만타. 아야, 겐세이 하지 말고 빨리빨리 하란께?”
한성철은 자기 순서가 되자 또 약 올렸다. 정아준은 그런 한성철을 타박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성철이 히죽거리며 제법 먼 거리에서 던진 구슬은 붙어있던 구슬중앙에 정확히 떨어져 남은 구슬마저 따갔다. 정아준과 문승협은 서로 마주 보며 허탈해했다.
“으짜스까잉, 히히히. 내가 뭐라 하디, 아준이 니 차례 까지는 안 간다 안 하디.”
“오메 웃겨불그만잉. 너는 소여, 뒷걸음치다 쥐새끼 잡은 소란께? 음머어, 소, 허허허.”
“뭣아, 너 그러다 디저분다잉, 히히히.”
정아준이 놀라움을 감추며 한성철을 소라고 깎아내렸다. 한성철은 자기 실력을 무시하는 정아준에게 정색했지만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성철과 정아준은 항상 싸울 듯이 옥신각신하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낄낄거렸다. 학교와 동네에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둘 다 모든 놀이와 운동을 아주 잘했으나, 한성철이 반수 위였다. 한성철은 키가 크고 싸움도 잘하는 거친 성격이었지만 자기보다 나약한 아이를 괴롭히지 않았다. 정아준은 문승협보다는 키가 컸으나 한성철 보다는 작았다. 교회를 다녀서 착하고 온순한 성격에 화도 잘 안내며 웬만해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섯 판째 구슬치기를 하고 있을 때, 유도복을 어깨에 메고 지나가던 변영환이 문승협을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옴마, 저 시끼 승협이 아니여? 언제 왔냐?”
“어제 왔어, 오랜만이다.”
“와따, 허벌나게 오랜만이다잉. 아따 시끼, 얼굴은 여전히 거시기 하그만.”
“뭐시어? 아야, 우리 지금 무자게 바쁜께, 저쪽에 좀 찌그러져 있어라잉.”
“뭣아, 저 새끼는 꼭 나만 보믄 지랄한다잉.”
“뭐? 너 디저볼래? 그만 깝치고, 저쪽에 찌그러져 있으란께.”
“야 성철아 왜 그래, 그러지 마.”
“염병, 나는 갈란다.”
한성철이 구슬치기를 방해한다고 생각해 변영환에게 화냈다. 문승협은 싸우려는 기세에 한성철을 말렸다. 변영환이 한성철행동에 움찔하더니 공부해야 된다며 가버렸다.
문승협윗집에 사는 변영환은 동갑내기 친구로 3학년 때 광주에서 전학 왔다. 한성철은 항상 한마디도 안 지려하는 변영환을 무척 싫어했다. 특히 유도를 배웠다고 거들먹거리며 덤벼들어 눈엣가시로 생각했다. 싸움 잘하는 자기를 두려워해 아무도 덤비지 않았으니 그럴만했다. 실제로 둘이 몇 번 싸워 막상막하였지만 한성철이 우세했다. 한성철은 코피가 나도 끝까지 싸우는 반면, 변영환은 코피가 나면 울며 집으로 갔다.
이후 몇 차례 더 구슬치기를 했으나, 한성철이 구슬을 다 따갔다. 정아준이 조금 흥분했다.
“쉬벌, 아야, 인자 다마치기 그만하고 양지 따먹기 하까? 곰방 집에 갔다 올란께, 성철이 너도 언능 갔다 와.”
“오케바리. 승협아, 우리 번개 불에 콩 볶아 묵듯이 갔다 올란께, 너는 쪼깨 기다려라잉.”
정아준과 한성철은 문승협 의견과 상관없이 동시에 냅다 뛰었다. 돌아오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셋은 구슬치기 하던 공터옆 계단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가져온 동그란 종이딱지를 내어 놓았다. 종이딱지에는 ‘아톰, 황금박쥐, 마루치아라치, 빠삐, 타이거마스크, 육백만불사나이, 소머즈’등 다양한 그림과 글자, 별, 숫자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기준으로 따먹기 하는 놀이였다.
“승협이는 양지가 없은께, 내가 이백장 빌려주까?”
“너무 많아, 백장만 빌려주라.”
“아니어, 백장은 적어. 백장은 니가 빌리고, 백장은 내가 그냥 주께.”
“아야, 니랑 나랑 백장씩 주믄 되겄다. 그라믄 빌릴 필요 없잖애, 서울놈한테 빌려줬다가 언제 받겄냐.”
“아따 이 시끼, 머리 한번 허벌나게 좋아불그마잉.”
“그래도 되나, 좀 미안한데?”
“허허, 근디 딱 오늘만이다잉, 담부턴 빌려주고 그냥 주고 그런 거 없다잉?”
“하하, 그래, 알았어.”
“그라믄 누가 선 잡으까? 한도는 최고 50장, 최소는 없고.”
“오케바리. 내가 잡으께. 글자 많은 것.”
정아준이 가져온 많은 딱지 중에서 200장을 문승협에게 빌려주려고 하자, 한성철이 각각 100장씩 그냥 주자고 하였다. 미안해하는 문승협에게 딱 선을 그었다. 한성철이 규칙을 정했다. 정아준이 동그란 종이딱지를 뒤집어 보이지 않게 세 패로 나눠 바닥에 놓았다. 한성철과 문승협은 가운데 패만 빼고 양쪽에 열 장씩 걸었다. 문승협은 12글자, 한성철은 3글자, 정아준은 6글자였다. 문승협은 따고 한성철은 정아준에게 잃었다.
셋은 그렇게 한 시간 동안 그때그때 각자 선호에 따라 돌아가며 선을 잡았다. 별 많은 것, 사람 많은 것, 숫자 높은 것, 때로는 반대로 적은 것, 낮은 것을 기준해 따먹기 했다. 결국 정아준이 다 따가면서 딱지놀이가 끝났다. 셋이서 또 뭐 하고 놀지 고민하는 사이, 한성철엄마목소리가 동네를 쩌렁쩌렁 울렸다.
“성철아, 뭐더냐! 해 떨어지믄 언능 집에 와서 밥묵어야제, 시방 뭔 염병하고 있냐!”
“아따 엄니는 뭔 욕을 그렇게 해싸쏘, 가요가, 간단께라우.”
“아야, 나도 가야겄다, 나중에 또 보자잉?”
“그래, 잘 가라, 다음에 또 보자.”
아쉬움을 접고 다음에 만나 또 놀기를 기약하며 각자 집으로 갔다. 벌써 다섯 시가 넘어 어둑해졌다.
어제의 두려움과 걱정은 어디로 갔는지, 문승협은 불안해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빠른 속도로 적응해 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