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태권도 정신으로

Hello, Santiago

by Hei 헤이


오늘도 날이 밝는다.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다. 나는 이 순례길에서 유일하게 매일 아침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이제 3일째 함께 하고 있는 해인이는 오늘 나와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지만 다른 방을 사용했는데, 러쉬 샴푸바 냄새를 맡고는 "언니 일어났구나" 하고 알았다고 한다.


오늘도 배낭 옆에 작은 생수병을 하나 끼고 아침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바람막이를 입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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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이 제공되지 않는 숙소라 아침밥을 먹기 위해 다음 마을에 들렀다. 이 마을에서도 많이 숙박한다고 들었는데, 어쩐지 문이 열려있는 식당이나 바는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서 고기아저씨와 친구들이 다가와 조금만 더 걸으면 바가 있을 거라며 산속으로 사라진다. 배가 너무 고파서 우리도 조금 서둘러 걸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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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조금 흐린 것이 범상치 않다. 걸음이 느린 나는 오늘도 산길에서 해인이와 헤어져 혼자 걸어갔는데 가뜩이나 흐린 날 어둑한 산길을 혼자 걷다 보니 조금 으스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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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배도 고프고 갑자기 새끼발가락이 아프기 시작해 잠시 길에 놓인 통나무 위에 앉아 쉬기로 했다.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어 확인해 보니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한다. 발 볼이 넓지 않은 신발 때문인지, 인터넷에서 본 대로 양말을 두 개나 겹쳐 신어서인지 새끼발가락이 움직일 공간이 많지 않았어서 자꾸만 스치는 바람에 물집이 생기려는 것 같다.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르르 나타났다. 제2, 제3의 고기아저씨라도 된 듯 밴드를 내밀며 괜찮냐고 묻는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에 괜찮다며 웃으며 카페가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물어봤다.

한 외국인 부부가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찾아보더니 너 배가 고프구나! 어쩌지 우리도 잘 모르겠는데.. 하고 대답한다. 아마 카페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봤던 것 같다. 그들은 가방에서 크래커를 꺼내 내밀었다. 딱 봐도 한입 먹으면 목이 막힐 것 같은 건빵 같은 비주얼이었지만 감사해하며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크래커를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였는지 조금 더 먹을래? 하고 물었지만 나는 꼭 카페를 찾아갈 거라고 답하며 다시 또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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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0분 정도 더 걸으니 순례자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워 둔 작은 카페가 보인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니 고기아저씨와 친구들, 해인이, 그리고 한국인 여럿이 모여 어서 와서 먹으라며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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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에 가득했던 또르띠야 냄새가 너무 좋아 오늘 아침은 또르띠야와 콜라를 먹기로 한다. 순례길에서 먹는 콜라는 한국에서 먹던 콜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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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순례길에서 처음 만나는 대도시인 팜플로나로 향하는 날로 오늘 걸을 거리는 20km 정도였는데 우리보다 일정이 하루 늦었던 성우오빠가 함께 걷기 위해 론세스바예스에서부터 42km를 걸어 팜플로나로 오기로 했다. 어제 고기아저씨가 지펴놓은 고기 욕구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 성우오빠가 오기 전에 얼른 팜플로나로 들어가 장을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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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너무 불러서일까 오늘 여정의 중반이 넘어가니 슬슬 걷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지나가다 보이는 작은 마을 벤치에 앉아 셀카도 찍고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쉬어가기로 했다. 나보다 앞서가던 해인이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 그네를 타며 쉬고 있다고 한다.


옆 벤치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오전에 나에게 크래커를 건네주었던 귀인들, 외국인 부부였다. 무슨 자신감인지 되지도 않는 영어로 나 카페 다녀왔어!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며 대화를 시작해 본다.


이 부부는 독일에서 왔는데, 휴가를 맞이하여 순례길에 올랐다고 한다. 팜플로나까지만 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휴가 때 이후에 길을 이어 간다고 했다. 나는 이번 순례길에서 산티아고까지 갈 거라고 답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다.


이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사람은 1% 뿐이야


생장 순례자 사무실에서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다. 사실 그것도 그럴 것이 프랑스길은 대략 800km를 도보로 가야 하는 길인데 짧게는 28일, 길게는 40일 이상을 시간 내어 걸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휴가로는 오기 어려운 일정이라 유럽권의 사람들은 여러 번 끊어서 길을 걷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13시간가량이 걸려야 올 수 있다며 오는 길이 너무나 오래 걸리다 보니 여러 번 나눠 올 수 없다고 그래서 아마 그 1%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일거라며 농담을 던졌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평온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그들은 하루 5시간 가량을 한 달 내내 매일 걷는다는 것이 대단하다며 역시 태권도 정신이라고 추켜세워준다.

태권도를 배워보지 않아 태권도 정신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좋은 이야기인 것 같아 괜히 맞장구를 치고 각자의 길을 다시 출발했다.


IMG_9504.JPG 길을 걷던 중 보였던 작은 바로에 멈춰 오렌지주스를 한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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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이 끝나고 도심에 들어섰다. 겨우 3일이지만 시골 마을과 산길만 걷다가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와 횡단보도를 걸어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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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로나 도착 3km 전에 위치한 부를라다라는 도시는 팜플로나만큼이나 큰 도시였다. 아스팔트길이다 보니 숲길에 비해 딱딱하고 걸어도 걸어도 도시가 끝나지 않아 점점 힘이 들기 시작했다. 새끼발가락은 여전히 통증을 호소했고, 갑작스럽게 발바닥도 아프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족저근막염은 이 날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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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팜플로나 성곽이 보인다. 성문을 들어서면 내가 예약한 숙소까지 또다시 20여 분간을 걸어야 한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오늘의 여정이 힘들었지만, 외국인 부부에게 배운 태권도 정신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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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로다 도심을 걸어 도착한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었다. 나는 오늘 다행히도 2층 침대 중 1층에 당첨되었는데 내 침대 위로 낯익은 배낭이 보인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지 따로 예약한 해인이가 내 윗자리에 당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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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빨래를 하고 한인마트에 들러 라면을 구매한 뒤 고기를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그 사이 성우오빠가 도착했다. 우리는 알베르게 키친에 모여 삼겹살을 굽고 라면을 끓였다. 해인이가 챙겨 온 맛다시와 내가 가져온 고추장도 꺼내고 스페인 햇반도 데워 한상 가득 꺼냈다. 뭔가 아쉽다 싶었는데 성우오빠가 잽싸게 나가 소주를 한 병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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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지게 저녁식사를 하고 소주도 한잔하고 기분 좋게 산책을 나선다. 순례자들은 왜인지 온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순례길에서 만난 마을, 도시는 꼭 산책하며 둘러본다. 저녁이 되니 길은 더욱 환해지고 많은 순례자들로 마을이 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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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해가 왜 이렇게 긴지 8시가 넘었는데도 날이 어두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술을 한잔씩 하고 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한국 순례자들도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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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고작 하루만이지만 재회한 것이 반갑다는 명목으로 간단한 핑거푸드와 함께 맥주를 한잔 하기로 했다. 만난 지 3일 만에 드디어 우리는 한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르지만 비슷한 각자의 사연으로 이 먼 타국에 모이게 된 우리가 새삼 신기했다. 우리는 시작은 다르지만 모두가 당연한 듯 산티아고까지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시작했으니 당연히 끝을 봐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못할 리 없다는 자신감이 닮았다.

낮에 만난 외국인 부부가 생각났다. 그들이 말했던 태권도 정신이 이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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