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리뷰 서론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시작한 지 약 세 달이 지났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앞다투어 비엔날레 정보를 전하였고 미술 전시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진작에 기본 정보를 알고 계실 테지요.
하지만 광활한 인터넷 공간에서 혹시나 이 글을 마주하게 될, 비엔날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뒤늦게나마 글을 써 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총 일곱 가지의 섹션이 있습니다. 미술, 건축, 영화, 댄스, 연극, 기록보관.
그중에서 영화는 우리가 아는 베니스 영화제로서 매년 개최되는 반면, 미술 비엔날레는 2년에 한 번씩 개최됩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종합 예술 축제이며 이들 중 미술과 영화 섹션이 가장 크게 주목받는 행사입니다. 7가지의 섹션 중 미술 비엔날레를 말하려 합니다. (이하 비엔날레로 명명)
흔히 비엔날레를 미술계 올림픽이라고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각 국가에서는 나라를 대표할 작가와 큐레이터를 선발하여 약 일곱 달 동안 국가관에서 전시를 진행케 하고 비엔날레 시작과 동시에 심사위원단이 최고의 국가관과 아티스트에게 황금사자상을 수여하기도 하니까요.
미술씬 최전선이라고도 불릴 만큼 그 명성은 미술계 종사자라면 한 번쯤은 꿈꿔볼 자리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대로만 본다면 황홀할 정도의 미술 잔치로 느껴지실 텐데요, 이면도 존재합니다.
한국관은 비엔날레가 시작한 지 100년 뒤 예술가 백남준의 건의로 1995년 지어집니다. 100년 동안 한국의 공간은 비엔날레에 없었다는 것이죠. 2024년 현재 여전히 국가관이 없는 나라들이 존재합니다. 볼리비아 전시를 보러 러시아 국가관들 들어가며 러시아 이름이 쓰인 건물 외부를 보고 있는데 한 중년께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러시아가 아니고 볼리비아 작품들만 있는 곳이에요". 따로 국가관이 없는 볼리비아가 2년째 불참 중인 러시아관을 임대하여 참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비엔날레는 곧 국력이다"라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참여조차 권력인 비엔날레에 모든 국가가 올림픽 금메달과도 같은 황금사자상을 위해 전시를 하며 경쟁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술은 주관적인데 말입니다.
그리하여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모두가 이미 명성을 얻은 작가는 아니겠지만, 비엔날레에 초청되거나 특별한 상을 받는 경우 미술사에 편입되는 명예를 갖기도 하므로 입증된 작가들이 주로 눈에 띕니다. 그런데 그 미술사가 서구 문화권을 중심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 또한 들여다볼만합니다.
메인 지휘봉을 잡는 비엔날레의 큐레이터 또한 권력의 중심으로써 작용하며 지난 59회에(2022년) 이르러서야 최초로 여성 큐레이터 체칠리아 알레마니에게 자리가 주어졌었습니다. 이번 비엔날레의 총괄 큐레이터는 다시 한번 '최초'로 남미 큐레이터에게 돌아갔는데요, 브라질의 아드리아노 페드로사가 이끌게 되었습니다.
과연 다음은 아시아인에게 돌아갈까요?
최초의 남미 큐레이터가 제시한 비엔날레의 주제는 이탈리아어로 STRANIERI OVUNQUE, 영어로는 FOREIGNERS EVERYWHERE,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입니다. 외국인이라는 말은 남과 나 자신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 될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기에 각 국가의 작가들은 외국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이번 비엔날레의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지요.
비엔날레의 본전시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본섬 두 곳, 자르디니 Giardini 와 아르세날레 Arsenale에서 진행됩니다. 워낙 볼거리가 많아 하루에 두 곳을 가기란 쉽지 않은데요 그래서 일단 자르디니 구역 먼저 둘러보았습니다.
자르디니에 입장하게 되면 왼편으로 비엔날레 중앙 파빌리온이 보입니다. 중앙 파빌리온의 외관은 항상 하얀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는데 올해는 찬란한 색들로 가득 채워져 한층 더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이곳은 국가관과 상관없이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가 진행되어 행사 주제를 관통하는 전시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적인 건물의 외관은 브라질의 아마존 출신 예술가 그룹인 마쿠(MAHKU)가 장식하였습니다.
중앙 파빌리온으로 입장하면 이번 주제를 몸소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제인 외국인 안에는 이민자, 망명자, 원주민, 난민은 물론 그동안 외면되었던 성 소수자, 전쟁의 희생자, 식민 지배 희생자 등을 포함하고 그와 관련된 작품들만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주류로 여겨졌던 서구 선진국 중심의 글로벌 노스 출신을 제외한 글로벌 사우스 출신의 작가들로 전시가 꾸며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작정하고 주류가 아니었던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이어서 흥미로운 점은 전시 작품 설명에서 볼 수가 있는데 위 사진에서처럼 설명 말미에는 000 작가의 작품이 비엔날레에서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한두 명이 아닌 상당수의 작가들이 처음 참가하였으며 그중에는 이미 생을 마감한 작가들도 있었습니다. 보는 내내 주목받지 않아야 할 예술은 없다고 소리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전시장에 비엔날레 칼리지 (아티스틱 연습과 인턴십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 작가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고요.
이미 명성이 확보된 작가여서 참가한 비엔날레이기보다는 세계적 커리큘럼 없이도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작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비엔날레가 될 것이라는 선전포고를 들은 듯하였습니다.
팽창하는 글로벌 시대에 다양성을 존중하고 소수에게 귀 기울이는 행보는 어떤 면에선 진부했지만 (지난 카셀 도큐멘타와 매우 비슷하다 느껴짐) 그나마 확실하게 이번 행사의 의도와 취지를 챙기겠다는 면에서는 좋았습니다.
휘황찬란한 미국관 바로 옆에는 전쟁으로 인해 개막 직전 담당 큐레이터와 참여 작가의 결정으로 폐쇄된 이스라엘관이 있습니다. 조금 멀리서 지켜보면 두 국가관 사이 예술 Arte이라 크게 써져 있는 비엔날레 안내 푯말이 자리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마치 비엔날레를 대변하듯 보였습니다.
전쟁과 원주민, 성소수자, 이민자, 식민 지배 등 이번 비엔날레에서 다루어진 어쩌면 민감할 수 있는 주제들이 예술이기에 장벽 없이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술은 시대성을 담아야만 하고요.
살아남은 운이 좋은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예술 축제. 누군가에겐 이렇게 비엔날레가 비치겠지요.
폐쇄가 되었지만 이스라엘관 내부에서는 준비되었던 전시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고 옆의 큐알 코드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르디니에서 관람한 국가관들 중에 제일 좋았던 곳은 따로 리뷰를 남기겠지만 인상 깊었던 선택을 한 오스트리아관 이야기하려 합니다.
오스트리아 파빌리온은 대표작가로 안나 예르몰라에바를 선정하였는데 그는 소련 레닌그라드 출생으로 1989년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이주, 오스트리아에 기반을 두고 작업하는 작가입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그 나라의 대표 작가로 참여하는 비엔날레인 만큼 자국 태생 작가가 작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오스트리아관은 달랐습니다. 이민자로서 그 나라의 대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해당 국가의 이민자에 대한 표상이라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외국인을 주제로 하였기에 당연한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자르디니의 많은 국가관에선 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시 내용 또한 더욱 놀라웠습니다.
안나의 작품은 일상생활의 시학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가 사회 안에서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상호작용을 하는지 주목하도록 합니다. 다섯 가지의 작품 중에는 그녀가 막 정치적 난민으로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을 당시의 자전적인 요소가 담긴 작품도 있었습니다. (Research for Sleeping Positions, 2006)
갑자기 온실이 나옵니다. 비엔날레를 관람하며 수많은 자극에 피로했던 눈을 잠시 쉬라는듯한 귀여운 꽃과 나무들. 그런데 의미를 알고 보면 이토록 가녀린 식물들이 무엇보다도 강인하게 느껴집니다. 카네이션, 장미, 튤립, 재스민, 삼나무 등 일련의 식물들은 색상 혁명을 타나 내는데 색이나 꽃 이름으로 언급되었던 여러 혁명 사건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1974년 포르투갈에서 독재에 맞선 군사 반란의 상징이었던 붉은 카네이션 그리고 2003년 조지아 장미혁명, 그에 영향을 받은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과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 혁명까지. 놓여있는 식물들은 비민주적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국민들의 혁명을 다시금 상기시켜 줍니다.
사회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은유적으로 풀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관에 입장하자마자 오른쪽에서 보이는 발레 비디오에서 (Rehearsal for Swan Lake, 2024) 먼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리허설 영상인데, 이 안무는 우크라이나 안무가와 협업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소련에서의 백조의 호수는 정권 교체를 의미했기에 영상 속 무용수들은 현재 러시아 정권 교체를 위해 연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오스트리아관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작품들 또한 난민으로서 그녀가 겪은 이야기가 녹아져 있습니다. 정치적 난민을 한 국가관의 작가로 선택하고 목소리 낼 수 있게 서포트한 오스트리아 문화부의 선택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간접적인 메시지들은 누군가에게는 직접적인 불쾌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그 선택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습니다.
상당히 아쉬운 국가관도 있었고 예상치 못하게 좋았던 곳도 있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술은 주관적이기에 제 글이 무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이 글로 인하여 한 명이라도 비엔날레에 호기심이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만간 좋았던 국가관의 리뷰를 포함해 남은 아르세날레 지역의 파빌리온들도 관람하고 또 후기를 남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