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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수진 Aug 13. 2022

나의 체류엔 유통기한이 있어

갱신하는 삶

이탈리아에서 외국인 신분으로서의 삶은 꽤나 레벨이 높다. 모든 이방인의 삶이 녹록지 않다지만 말이다.

이탈리아에서 살아 본 한국인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이탈리아에 완전히 동화되고 흡수되어 그 매력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부류와 혀를 차며 다시는 이탈리아를 쳐다도 보지 않겠다는 부류다.

그들의 혀를 차게 하는 것들 중에 하나는 단언컨대 체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인은 유럽에 무비자로 90일 동안 방문할 수 있으며 관광 외 다른 목적이 있는 체류인 경우 비자를 발급받아 합법적인 체류를 해야 하고 입국 후 8일 내에 '체류허가증(Permesso di Soggiorno)'을 신청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이탈리아 관공서와의 지겨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체국에서만 받을 수 있는 이 체류허가증 신청서는 모든 우체국에 항상 있지 않아 여러 우체국을 돌아다니는 것은 기본이다. 해가 매섭게 뜨거워도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쳐도 체류허가증 하나 때문에 몇 시간을 이민국 앞에서 대기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기 일쑤이며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보내고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빠진 서류가 있다며 연락이 오는 시스템. 중간에 프로세스가 한번 멈춰지면 언제 카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무한 대기의 시간으로 탈바꿈하는 마법. 1년짜리 체류 카드를 받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운이 좋으면 6개월 이내로, 카드를 받자마자 숨 돌릴세 없이 갱신 준비를 하고 있는 본인을 발견하게 된다. 카드를 받기 전까지는 이탈리아 밖을 나가는 것은 불법이라 드넓은 유럽 땅을 밟았어도 이탈리아에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이 모두에게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곳 또한 이탈리아이다.

이탈리아 사는 한인들끼리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밤은 거뜬히 새울 수도 있는 다이내믹한 이탈리아의 체류 행정 시스템은 타지에서의 이방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일깨워준다.


울기도 많이 울었더랬다. 로마로 어학연수를 떠났던 첫 해엔 뭣도 모르니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면 토리노로 이사 와서는 새로운 이민국 시스템에 어리둥절하여 뭐 하나 누락됐다 하면 덜컥 겁부터 나서 눈물이 흐르고 손이 벌벌 떨리면서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왜 도시마다 행정 처리 방식이 다를까?


문제가 있다면 연락이 오고 아니면 연락하지 않는다

문제가 있으면 비교적 빠르게 연락을 주지만 문제가 없다면 고요한 기다림의 연속이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의 또 다른 문제는 그래서 문제가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라는 것이다. 문제가 없어 연락이 안 와도 불안, 와도 불안한 시간들. 아, 이게 정녕 외국인 신분으로서의 삶이란 말인가?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워낙 느린 행정이기에 문제가 생겨도 나에게 느긋한 처리시간이 있다는 것. 행정이 빠른 나라에서 온 나는 한국식 서비스의 익숙함을 벗고 이탈리아화가 되는 데까지 꽤나 많은 눈물들을 흘렸었다.


학생의 경우 국립대 입학에 필요한 입학시험을 보려면 가입학 비자를 받아 나와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면 비자를 갱신하는 것이 아닌 공부 목적의 체류허가증을 갱신하며 이탈리아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1년마다 체류허가증을 갱신하며 지내야 하는데 문제는 그 조건에 있다.

학사가 3년짜리라 한들 첫 학년에 최소 한 과목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2학년 진학을 위한 체류허가증 갱신 근처에도 못 가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 고로 수업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곧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 나오고 결과적으로는 체류허가증을 갱신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니.. 머리에 번개가 스치듯 나의 어학 실력은 체류 문제와 직결됨을 느낀 순간 기약 없는 깜깜한 불안감의 터널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멘털 붕괴의 여러 요소 중 하나는 아마도 체류허가증을 갱신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체류의 유통기한이 다가올수록 나는 이곳에서 학생이란 신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내 능력을 입증해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입학 전에는 1년 안에 하나의 시험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큰 소리 뻥뻥 쳤지만 그게 곧 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래서 사람은 장담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나.

앞으로 펼쳐질 설레는 미지의 앞날만을 바라보기도 전에 내년에는 내가 이탈리아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건 장난이 아니구나를 실감하며 그렇게 생존을 위한 공부 모드로 돌입한다. 이쯤이면 공부를 위한 공부인지 살기 위한 공부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나의 이탈리아 생활의 목적은 오직 시험 통과라는 과녁만을 조준하게 된다.


반드시 적어도 한 과목만은 통과하리라. 그리하여 내년에는 행복하게 2학년 등록을 마친 후 당당하게 체류허가증을 갱신하고 이탈리아에서의 삶을 이어가리라 책상 앞에서 다짐했다.

그렇게 2개월이라는 시간을 두고 내년 2월에 있을 중세 미술사 시험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체류 유통기한 9개월이 남아있던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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