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하 Jun 06. 2024

목욕탕과 에스테틱

 수년 전, 미국의 TV 진행자인 코난 오브라이언이 스티븐 연과 한국식 찜질방 체험을 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L.A.한인 타운에 위치한 찜질방의 목욕탕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장한 코난은 난생 처음 세신사(洗身師)에게 몸을 맡긴다. 그리고 이태리 타올로 온 힘을 다해 박박 때를 미는 세신사에게 ‘그 피부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었을 때부터 있던 거예요!’ 라며 비명을 지른다. 세신을 마치고 온 몸이 벌개진 채로 나와 ‘지옥 체험을 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나 표정은 매우 상기되어 있던 코난을 보며, 한국에 태어나 일찍 이 세계를 맛본 나는, 반 백살이 넘어서야 세신을 받아본 그와 비교하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생각했다.    

  

 사실 내가 세신을 받아 본 횟수는 지금까지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30대 나이엔 내 몸을 남에게 맡기고 심지어 때를 보여준다는 것이 도통 부끄러워 세신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받기 시작한 세신의 경험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아마도 세신이 이전부터 간간히 다녔던 피부관리실, 소위 ‘에스테틱’이라 불리는 곳에서 받은 관리와 극명히 다른 느낌이라서인 듯하다.      


  에스테틱은 우리 나라 드라마에 꽤 자주 등장하므로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비싼 곳일수록 우아하고 섬세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꼭 비싼 곳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에스테틱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조명은 은은하며, 관리사는 친절하다. 그곳에서의 관리 단계는 주로 다음과 같다.      


1. 가운을 입고 누운 내 얼굴에 관리사가 기분 좋은 향의 로션을 발라 여러 번 롤링하여 화장을 지워주고, 

따끈한 수건을 덮어 모공을 열리게 하며, 크림 바른 손으로 시원하게 압력을 가하며 마사지를 해준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순간이다. 

2. 몽롱한 기분으로 까무룩 잠이 들 때쯤, 관리사는 앰플 몇 방울을 ‘똑!’ 하고 떨어뜨려 주기도 하는데, 

그 한 방울의 성분은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에서 강렬한 햇빛을 받고 자란 오렌지 성분이 함유된 비타민 C이거나, 유서 깊은 프랑스의 한 농장에서 어렵게 추출한 포도나무 덩굴 성분이라는 설명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그 몇 방울이 아주 귀하게 느껴진다.   

3. 피부 속 깊은 곳으로의 흡수를 돕는 기계가 얼굴 위로 왔다 갔다 움직이다가, 고무팩 또는 다른 종류의 팩이 얼굴에 올려지면 잠이 든다. 이십여 분이 지나면 마무리.     



   

 그렇다면 목욕탕 세신은 어떤가? ‘야생’이며, ‘날 것’이다. 가운이 웬 말인가. 목욕탕이니 당연히 맨 몸이다. 여기서 나는 누구보다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1. 일단 탕에 들어서면 세신 이모를 찾아 눈 인사를 한다.

2. 이모에게 세신을 받고 싶다고 알린다. 간만에 큰맘 먹고 왔으니 기본 세신보다 윗단계 관리인 ‘아로마 마사지’를 호기롭게 선택한다. (“아로마 마사지요 이모!”) 

3. 이미 사람들이 여러 개의 베드에 누워 세신을 받고 있다면 입장 시 받은 락커 키 번호를 벽에 있는 보드에 쓴다. (번호를 안 쓰는 곳도 있지만 우리 집 앞 목욕탕은 번호를 적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다!) 

4. “언니 몸 불리며 기다려!”라는 세신 이모의 말에 따라 비누로 깨끗이 몸을 씻고, 열탕에 들어가 앉는다. 

귀와 눈은 이모 쪽으로 최대한 열려 있다. 언제 나를 부를지 모르니까.

5. 오래 열탕에 머무른 탓에 정신이 잠시 혼미해지면 탕 밖으로 나와서 정수기의 찬 물을 받아 마신다. 

숨을 고른 후 다시 열탕에 들어간다. 세신 이모가 “33번 언니 이제 와!”라고 부르면, 냉큼 위치로.

6. “언니 처음 보네. 자주 안 와? 일해? 애기는 어떻게 하고?” 등의 이모 물음에, “자주 오고 싶지만 평일엔 퇴근이 늦어서요. 아이가 크니 집에 두고 올 수 있어 좋아요.” 등으로 답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잠이 들 틈 따위는 없다. 

7. 시원하게 때를 밀던 세신 이모가 몸을 툭툭, 치면, 몸을 바지런히 옆으로 돌린다. 

(처음엔 어느 쪽으로 돌아누워야 할지 고민했는데, 지나고 보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8. 이모가 뜨거운 물 한 바가지를 내 몸에 촤악 끼얹는다. 펄펄 끓는 물에 담갔던 수건을 철썩철썩 내 몸에 붙이고, 온 힘을 다해 꽉꽉 몸을 눌러준다. 

9. 이모가 진한 아로마향 오일을 온몸에 바르고 마사지를 해준다. 나는 최대한 힘을 빼야 한다. 안 그러면 "언니 힘 빼! 안 그러면 내 몸에도 힘이 들어가!”라며 야단을 맞을 수 있다. 간혹 내 몸 위로 올라가서 허리와 팔다리를 꾹꾹 밟아주는 이모도 있다. 

10. 이모가 오이를 강판에 간다. 눈을 감으면 얼굴에 오이가 올라온다. 잠시 후 오이가 걷히고, 요플레도 올라온다. 유럽 어느 곳의 귀한 성분 추출물이 아닌, 날 것, 눈에 보이는 오이이며 요플레다. “You are what you eat.”이 아니라 “You are what you paste.”인 상황! 그게 끝인가? 설마! “언니 앉아서 눈 감고 세수해!”라는 말에 얌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내 얼굴 위로 이모가 우유를 부어준다. 그렇게, 나는 거칠지만 확실하게 관리된다. 내 얼굴, 오늘 제대로 호강한다. 

11. 다시 자리에 누우면 머리 감기 시간. 이모는 시원한 민트향이 나는 샴푸로 두피까지 뽀득뽀득 감겨준다. 이모가 개운하게 헹궈진 머리에 락커키 고무줄을 야무지게 묶어주면 끝.     




 이러하니 어찌 내가 목욕탕을, 세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에스테틱도 사랑하지만, 목욕탕 세신은, 생각만 해도 벅차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국에 살면서 아직까지 세신을 안 받아본 이들이 꼭 한 번은 받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마도 다른 나라에서는 못 해볼 시원한 경험일테니. 아, 쓰고 보니, 남탕에서는 세신이 이렇게 세분화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여탕엔 최소 너댓 개의 세신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누가 대답 좀 해 주세요. 얼굴에 따끈한 우유 맞아보셨나요? 요플레는요? 아, 참 좋은데! 

작가의 이전글 건강한 신체에 글감은 깃들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