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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하 Apr 29. 2024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는데...

  매년 새해가 되면 인터넷 커뮤니티에 여러 다짐 글이 올라온다. 올해는 독서를 많이 하겠다는 다짐,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 재테크를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어쩌면 나도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은 여러 다짐 가운데 도저히 나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은 누군가의 다짐글에 동참하겠다는 댓글이 우수수 달렸는데 그것은 바로, ‘한 해 동안 옷 안 사기’이다.      


 이런. 나는 옷을 좋아한다. 그래서 꽤 자주 산다. 예쁜 옷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며 결국 우리 집으로 데려와야 진정이 되는 이유를 한때는 엄마 탓으로 돌린 적도 있었다. 빠듯한 형편 탓에 기본적인 옷 이상은 사 주시지 못했던 엄마, 그래서 멋 부리기는 생각도 못했던 유년 시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지금 내가 이러는 게 아닐까? 그런데 얼마 전 친구가 “너 마흔이 넘도록 주구장창 옷을 사대면서 계속 엄마 탓하기엔 좀 그렇지 않냐?”라는 말을 하는 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네? 나 그냥 옷 좋아하네? 엄마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이토록 브레이크 없이 옷을 사던 나를 돌아보게 된 계기가 있다. 이름하여 ‘2019년 제일평화시장 난전 사건’. 제일평화시장, 일명 ‘제평’은 어떤 곳인가? 옷에 대한 갈증을 백화점에서 그대로 해소하다간 파산이 불 보듯 뻔하지만 그렇다고 예쁜 옷 입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동대문의 대표 시장! 전국 옷가게의 허브! 옷을 사지도 않고 질척거리다간 사장언니들의 레이저 눈빛을 받기 딱인 곳!    

   

  2019년 가을 어느 날 그곳에서 안타깝게도 화재가 발생하고 말았다. 밤새도록 불을 끄는데 열 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는 뉴스를 보며 내 마음도 타들어갔다. 그리고 엄청난 피해로 장사할 곳을 잃은 그곳 상인들을 위한 임시 장터가 동대문 역사공원 주변으로 설치되었는데, 웬걸, 노상으로 나온 가게들이 그 즉시 오만 가지 목적과 취향을 갖고 근처를 지나가던 이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이 아닌가, 이건 흡사 제평 옷가게가 동묘 앞 난전으로 변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평소 손님을 카리스마로 훑으며 장사하던 언니들이, 남녀노소 한 무더기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걸려있는 소중한 옷들을 휘휘 뒤적거리는 난감한 장면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매연은 그득하지 해는 내리쬐지, 내가 사장이라도 그야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날 상황이었다. 

따라서 성이 잔뜩 나 있던 어떤 사장님은, 그들과 달리 진정한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하리라 마음 먹고 활기차게 스텝을 밟으며 옷의 가격을 물어본 내게 “언니 그냥 구경왔지?”라는 싸나빼기 말을 쏘아붙였으니, 하...나는 차마, “아닌데요 저 제평 죽순인데요?”라고 받아치지도 못한 채 기가 죽어버렸다. 슬픔에 잠겨 집으로 가야겠다 마음 먹고 걷기 시작한 그 때, 인파 틈에서 누군가 내 뒷덜미를 확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드.디.어. 내가 여기서 험한 꼴을 보는구나. 도매상에서 옷도 안 사고 움찔대니 결국 제대로 패대기 쳐지는구나.’ .... 그런데 이게 웬일? “언니! 이거 우리 가게 옷이네!! 언니 언니!! 너무 반갑다!!” 내 뒷덜미를 낚아챈 사람은 바로 내 티셔츠를 제작 판매한, 마침 그 옷을 입고 지나가던 나를 알아본 옷가게 사장님이었던 것이다!  

  백주 대낮 도심에서 느닷없이 목덜미를 세게 잡혀본 경험이 있는가? 생각보다 공포스럽다. 내 티셔츠 뒷자락을 (내 허락도 없이) 뒤집으면서 마침 옆에 걸려 있는 옷들의 태그와 똑같지 않냐며 확인시켜주던 사장 언니를 보며 얼얼해진 나는 그 순간 강하게 깨달았다. 

‘어...나 여기 너무 많이 왔네?...나 옷 너무 많이 샀네?’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어야 할 소들이 버려진 폐섬유를 먹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보다도, 2019년 그날은 그간 나의 옷 소비가 지나쳤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여전히 나는 옷이 좋지만, 그래서 토종 한국인 체형에 맞는 옷을 마음껏 사 입을 수 있는 한국이 좋아서 이민을 가지 않겠다는 진심 가득한 농담을 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계속 모른 척 하기엔 내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새해가 되었다. 1월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는 새 옷을 샀다. 어렵겠지만, 다짐해본다.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는데, ‘한 해동안 옷 안 사기’는 못 지키더라도, ‘1년 동안 살 옷 개수 정해놓고 사기’라도. 겉모습에만 치중하면 마음이 공허한 거라는데, 그렇다면 올해는 내면의 확장을 위해 더 노력하는 걸로. 쓰면서도 지킬 수 있을지 자신 없지만, 그래도 써본다. 많이들 그렇지 않은가? 매년 새해 결심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일단 다짐하면, 그 실천이 조금이나마 반복된다면, 적어도 작년보다는 더 나아진 내가 되지 않겠는가.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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