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해가 되면 인터넷 커뮤니티에 여러 다짐 글이 올라온다. 올해는 독서를 많이 하겠다는 다짐,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 재테크를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어쩌면 나도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은 여러 다짐 가운데 도저히 나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은 누군가의 다짐글에 동참하겠다는 댓글이 우수수 달렸는데 그것은 바로, ‘한 해 동안 옷 안 사기’이다.
이런. 나는 옷을 좋아한다. 그래서 꽤 자주 산다. 예쁜 옷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며 결국 우리 집으로 데려와야 진정이 되는 이유를 한때는 엄마 탓으로 돌린 적도 있었다. 빠듯한 형편 탓에 기본적인 옷 이상은 사 주시지 못했던 엄마, 그래서 멋 부리기는 생각도 못했던 유년 시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지금 내가 이러는 게 아닐까? 그런데 얼마 전 친구가 “너 마흔이 넘도록 주구장창 옷을 사대면서 계속 엄마 탓하기엔 좀 그렇지 않냐?”라는 말을 하는 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네? 나 그냥 옷 좋아하네? 엄마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이토록 브레이크 없이 옷을 사던 나를 돌아보게 된 계기가 있다. 이름하여 ‘2019년 제일평화시장 난전 사건’. 제일평화시장, 일명 ‘제평’은 어떤 곳인가? 옷에 대한 갈증을 백화점에서 그대로 해소하다간 파산이 불 보듯 뻔하지만 그렇다고 예쁜 옷 입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동대문의 대표 시장! 전국 옷가게의 허브! 옷을 사지도 않고 질척거리다간 사장언니들의 레이저 눈빛을 받기 딱인 곳!
2019년 가을 어느 날 그곳에서 안타깝게도 화재가 발생하고 말았다. 밤새도록 불을 끄는데 열 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는 뉴스를 보며 내 마음도 타들어갔다. 그리고 엄청난 피해로 장사할 곳을 잃은 그곳 상인들을 위한 임시 장터가 동대문 역사공원 주변으로 설치되었는데, 웬걸, 노상으로 나온 가게들이 그 즉시 오만 가지 목적과 취향을 갖고 근처를 지나가던 이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이 아닌가, 이건 흡사 제평 옷가게가 동묘 앞 난전으로 변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평소 손님을 카리스마로 훑으며 장사하던 언니들이, 남녀노소 한 무더기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걸려있는 소중한 옷들을 휘휘 뒤적거리는 난감한 장면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매연은 그득하지 해는 내리쬐지, 내가 사장이라도 그야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날 상황이었다.
따라서 성이 잔뜩 나 있던 어떤 사장님은, 그들과 달리 진정한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하리라 마음 먹고 활기차게 스텝을 밟으며 옷의 가격을 물어본 내게 “언니 그냥 구경왔지?”라는 싸나빼기 말을 쏘아붙였으니, 하...나는 차마, “아닌데요 저 제평 죽순인데요?”라고 받아치지도 못한 채 기가 죽어버렸다. 슬픔에 잠겨 집으로 가야겠다 마음 먹고 걷기 시작한 그 때, 인파 틈에서 누군가 내 뒷덜미를 확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드.디.어. 내가 여기서 험한 꼴을 보는구나. 도매상에서 옷도 안 사고 움찔대니 결국 제대로 패대기 쳐지는구나.’ .... 그런데 이게 웬일? “언니! 이거 우리 가게 옷이네!! 언니 언니!! 너무 반갑다!!” 내 뒷덜미를 낚아챈 사람은 바로 내 티셔츠를 제작 판매한, 마침 그 옷을 입고 지나가던 나를 알아본 옷가게 사장님이었던 것이다!
백주 대낮 도심에서 느닷없이 목덜미를 세게 잡혀본 경험이 있는가? 생각보다 공포스럽다. 내 티셔츠 뒷자락을 (내 허락도 없이) 뒤집으면서 마침 옆에 걸려 있는 옷들의 태그와 똑같지 않냐며 확인시켜주던 사장 언니를 보며 얼얼해진 나는 그 순간 강하게 깨달았다.
‘어...나 여기 너무 많이 왔네?...나 옷 너무 많이 샀네?’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어야 할 소들이 버려진 폐섬유를 먹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보다도, 2019년 그날은 그간 나의 옷 소비가 지나쳤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여전히 나는 옷이 좋지만, 그래서 토종 한국인 체형에 맞는 옷을 마음껏 사 입을 수 있는 한국이 좋아서 이민을 가지 않겠다는 진심 가득한 농담을 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계속 모른 척 하기엔 내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새해가 되었다. 1월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는 새 옷을 샀다. 어렵겠지만, 다짐해본다.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는데, ‘한 해동안 옷 안 사기’는 못 지키더라도, ‘1년 동안 살 옷 개수 정해놓고 사기’라도. 겉모습에만 치중하면 마음이 공허한 거라는데, 그렇다면 올해는 내면의 확장을 위해 더 노력하는 걸로. 쓰면서도 지킬 수 있을지 자신 없지만, 그래도 써본다. 많이들 그렇지 않은가? 매년 새해 결심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일단 다짐하면, 그 실천이 조금이나마 반복된다면, 적어도 작년보다는 더 나아진 내가 되지 않겠는가.
(2024.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