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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하 Apr 29. 2024

디지털 디톡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을 고작 3주 만에 수련회에 데리고 가기로 계획한 이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표면적 이유는 아이들의 빠른 단합을 위해, 그러나 관리자의 결정을 일단 삐딱하게 보는 평교사의 추측은 아이들이 친해지기 전에 가야 사고 발생 위험이 낮다는 것이었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입학하자마자 참가 동의서를 어리둥절하며 제출한 학생들은 고등학교 생활에 미처 익숙해지기도 전에 수련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30여년 전 내가 경험한 수련회와 2024년의 수련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돈 내고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단체 기합만 받던 1990년대와는 달리, 이번 수련회는 ‘이 활동을 하면 역시 인간과 인간의 원만한 상호작용으로 짧은 시간 안에 사회성이 발달하겠는데?’ 라며 박수 칠 만한 프로그램이 촘촘히 진행된 것이다. 특히 도착 즉시 학생들의 휴대폰을 수거한 점이 만족스러웠는데, 이것은 마치 알코올 중독 치료 프로그램에 자식을 입소시킨 엄마의 마음이랄까? 그리하여 수련원 도착 전까지 버스 안에서 게임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의 낯빛은 폰 수거 가방의 등장에 썩은 회색으로 변했고, 곧이어 강제 디지털 디톡스 시간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이들은 폰 수거를 이미 예견했던 터라 순순히 프로그램에 적응했고, 자유 시간에는 태초에 스마트폰이 생기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듯 공놀이와 보드게임, 심지어 굴러다니던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그림 그리기까지 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보람찼다.  드디어 이 아이들이 인생을 나락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꼭꼭 씹으며 맛보기 시작했구나. 성취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군. 이래서 수련회는, 준비 과정이 힘들더라도, 학교에서 꼭 진행해야 하는 행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점호 시간이 되자 수련회 담당자가 분실 방지를 위해서라며 휴대폰 가방을 교사들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하여 숙소로 갖고 온 가방은 총 5개. 각각 28개의 폰이 들어 있는 가방의 무게는 상당했다. 으흐흐...평소에 밤새도록 폰을 끌어안고 지냈을 녀석들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친 후 다른 선생님들을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도록 친절하게 안내하고 나니 거실엔 나와, 대략 140개의 폰이 든 가방만이 남았다. 어둠 속에서 가방을 바라보는 나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절대 반지...아니 절대 폰을 지키는...나는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사방이 울렸다. 한 번도 못 들어본 음악 소리는 제법 음산했다. 이게 뭐지? 눈을 뜨니 낯선 곳. 아 맞다. 나 수련회 왔지? 광광 울리는 이 소리는 누군가의 휴대폰 알람 소리다. 대체, 지금이 몇 시? 새벽 1시 40분이었다. 어느 ㅅㄲ야...살의를 느끼며 어둠 속 거실 바닥을 최대한 빨리 기어가 소리가 나는 가방을 더듬었고, 그 속에서 번쩍이는 폰을 찾아 간신히 알람을 껐다. 하...ㅅㄲ...내일 두고 보자. 일단 다시 잠을 자도록....그런데, 또 알람 소리가 들린다. 몇 시? 새벽 2시 30분. 죽이고 싶다. 이번엔 다른 가방이다. 다시 소리가 울리는 가방으로 기어가서 폰을 꺼냈는데, 이 폰은 뭔가 어렵다. 아...아이폰이구나. 난 정직하고 성실한 40대 직장인의 표본이라 지금껏 얌시롱한 아이폰 따위는 써본 적이 없다. 알람을 꺼도 연이어 울리는 알람, 이러다간 밤을 샐 판이다. 이거...전원을 어떻게 끄지?      


 결국 나는 역시 정직하고 성실한 40대가 가장 즐겨 찾는 검색 방식으로 네이버 앱을 열어 ‘아이폰 전원 끄는 법’을 입력한 후,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한 글자씩 읽어나갔다. 요는, 한 쪽 버튼을 꾹 눌러 전원을 끄는 갤럭시와 달리 아이폰은 양 쪽 버튼을 동시에 누르라는, 생각도 못한 변태 같은 방식이었던 것. 어둠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양 옆 버튼을 눌렀다. 성공.      


 이게 끝이었을까? 흑흑. 140개의 폰은 개성이 강했다. 주인님과 떨어져서 잔뜩 성이 났다는 듯 이 녀석들은 그 이후로도 벌떡벌떡 울어댔다. 새벽 1시 40분 첫 알람소리를 들었을 때 모든 가방을 다 열고 일일이 전원이 꺼졌는지 확인하기에 나는 너무 졸렸고, 안일했다. 그리하여 이번 수련회는 실패였다. 대실패. 디지털 디톡스는 무슨, 학생들이 디지털 디톡스를 체험할 동안, 내 몸 속엔 분노와 독기만이 가득 쌓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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