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과 연민의 가면으로 나를 소유하려 했던
16화 - 우상의 황혼
울긋불긋한 계절이 왔다. 성당은 자연과 어우러져 동화되었다. 마침 진이 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말이 길어질 게 분명했다. 조용히 성당에 들어와 헝겊을 물에 적셔 이곳저곳을 닦았다. 먼지는 한없이, 한없이 쌓이는 거 같았다.
“잠깐 이리 와.”
진은 마당으로 불러낸 뒤,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집기들을 가져왔다.
“은 집기들을 좀 닦아서 창고 안 알지? 거기에 정리 좀 해줘.”
녀석의 말에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게 내가 할 일이야?”
“그냥 하라면 해! 내가 하라고 하는 거잖아!”
이상 말이 길어질 거 같아, 덧붙이진 않았으나, 미사 예배가 끝난 후에도, 다음 미사에도 그다음 미사에도 녀석은 명령했다. 부쩍 퉁명스러워진 진은 많은 것을 강요했다.
진의 태도에 달래줄 생각이 없었다. 반응이 없을수록, 그럴수록 진은 더욱 괴롭게 했다.
그런 모습은 양구이란과 같게 보인다. 아니, 양구이란보다 더 치졸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고 낙엽이 떨어질때에도 그 녀석은 강요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네가 무슨 성직자의 길을 걷는다는 거야!”
화가 나 손에 쥐고 있던 은 접시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너.... 너! 이씨!”
“진!”
낯선 이의 부름에 둘 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또 왜 온 거야!”
“내가 오고 싶어서 오냐? 너 때문이지.”
진의 누나는 사지가 멀쩡한 본인의 동생이 천주교 신부의 길을 걷는 것에 탐탁지 않아 한다. 진의 가족은 북경에서 나름 유복한 집안이었고, 형 두 명과 누이 셋이 있었으며 진이 집안의 막내이다. 남매 중, 둘째 형은 자신이 어릴 때 죽었다고 했다. 자세한 건 말해 주지 않았다.
“어머, 이 아가씨는 누구야? 정말 이쁘네?”
그녀는 고운 말과 달리 눈을 흘겼다.
“아. 몰라도 돼. 왜! 무슨 일인데!”
“이놈아! 너 자꾸 그럴래? 이 누나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보러왔는데! 이게 무슨 말본새야?”
“왜? 무슨 일 있어?”
“흠흠. 너 이제 정말 들어와. 이제 집에서도 참을 만큼 참아줬다. 아버지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어.”
“내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 이미 인륜이란 건 없는 거야.”
“병신아! 인륜이 아니라 천륜이야. 천륜!!”
냅다 소리를 지른 두 남매는 씨익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먼저 물꼬를 튼 건 진의 누나였다. 그녀는 말하지 않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은접시를 들었다.
“네가 이런 걸 닦는 거야?”
“무슨 말이야.”
“너! 마치 노비를 마냥, 여기를 쓸고 닦고 하냐고! 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데! 왜!!”
누이는 악을 쓰며 소리쳤다.
“뭐?! 우상? 네가 믿는 그 누군지도, 얼굴도 모르는 놈! 그 새끼 모르던 시절에도 다~ 잘 먹고, 잘 살았다. 너! 그거 알지? 뭐, 네가 지껄였잖아~ 네가 믿는 그거. 안 믿으면 천국에 못 간다며~ 근데 그러려면 노비 짓해야 하는 가보네? 그럼, 우리 집에서 노역하는 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선한 사람들인가 봐? 밤마다 놀음이나 계집질하는 것들이?”
진은 혹시라도 주변에 사람들이 볼까 싶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누이를 붙잡고 옷을 끌어당겨 밖으로 내보냈다.
“이 세상에 라헬 같은 여인은 없나 보네.... 아버지께 전해. 곧 돌아갈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