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수지 Apr 08. 2023

반려동물을 책임진다는 것

이 어려운 걸 우리가 해야 합니다



반려자, 반려식물, 반려동물 등 ‘반려’가 붙는 단어에는 책임감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반려동물의 경우라면, 함께하기로 결정한 순간 우리는 그들에게 적절한 식사를 주고, 산책도 하고,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가고, 마지막 헤어짐의 순간까지 보살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5~20년의 반려동물의 생을 두고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삶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않는 문제들로 인해 반려동물을 데려올 때의 상황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진료를 보다가 고민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렸다. 보호자 개인 사정으로 더 이상 고양이들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세 마리 중 건강한 두 마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냈지만 아픈 한 마리는 데려갈 사람이 없어서 안락사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심장 질환이 있어서 위험한 상황이 또 닥칠 수 있고, 남은 생애 동안 약을 계속 먹어야 하니 입양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보호자 신변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갈 곳 없는 고양이를 안락사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게 허용이 된다면, 보호자가 처한 상황에 변화가 생길 때면 책임이라는 명목하에  안락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재차 안락사를 해달라고 했으나 안 된다는 나의 말에 “그럼 애를 길에 버리라는 거냐”라는 절망스러운 말을 남기고 진료실을 떠났다. 정말 길에 버릴까 봐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렇다고 안락사를 택할 순 없었다.



한 달 뒤쯤 그 보호자의 친구가 다시 안락사를 문의했다. 친구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고양이를 데려갈 사람이 없으니 안락사를 해주면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 나를 찾아왔던 시기에 이미 그 사실을 알았던 건지 사고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때 안락사를 요청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어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친구의 문의에는 직접 키우는 반려동물이 아닌 경우이기에 더더욱 안락사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고, 그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떠난 보호자의 심정이 이해 안되는 건 아니다. 돌보던 고양이가 심장 질환이 심해서 1년도 못 살 거라고 들었기 때문에 전처럼 함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일이 편하게 보내주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가끔 뉴스에서 보는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부모가 없으면 미성년 자녀가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 발생하는 비극이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독립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 없이 남겨진 자녀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리는 없다.



반려동물 역시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차라리 길에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이 말을 쓰기까지 엄청난 망설임이 있었다). 책임을 다한다는 것과 소유는 다른 개념이다. 소유한다는 의미에서 애니멀 호더도 멀지만 같은 선상에 있다. 애니멀 호더는 자신을 동물의 생존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보호자나 주인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이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을 보면 기함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누가 봐도 동물을 위한다고 보기 힘든 생활 환경이기 때문이다. 소유하고자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고, 사랑하기에 발생하는 문제들도 많다.



부모 사망 후 남겨진 미성년 자녀에게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하듯이, 반려동물의 사회적 안전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보호자의 삶에 변수가 발생하면 파양이 되어 여러 집을 전전하는 경우도 생기고, 휴가지에 버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유기견 수가 늘어나고, 일부는 좋은 곳으로 분양을 가기도 하지만 많은 수가 안락사로 귀결 되기도 한다. 결국 ‘안락사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새 보금자리에 정착하는 경우도 많고, 휴가지 펜션에서 머물게 되어 펜션 고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도 있고, 안락사 직전에 극적으로 입양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피해오지 않았던가. 죽기 직전까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사람 가족에게도, 동물 가족에게도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사람에게도 취약한 안전망을 동물에게까지 어떻게 신경쓰냐’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동떨어진 일이 아니며 따로 또 같이 개선되어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 들여다보면 그 나라의 도덕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에게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동물을 동등하게 대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생명체로서 그들의 존엄성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누구라도 반려동물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길 수 있고,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반려동물을 어떤 이유로든 떠나보낸 보호자들은 대부분 죄책감을 가슴 한구석에 가지고 있다. 그런 일이 우리의 경솔함인지 정말 어쩔 수 없었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경솔하게 결정된 일이었다면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일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우리 중 하나가 사라져도 세상은 잘 돌아가듯이 반려동물 역시 우리 없이도 잘 살아갈 것이다. 그들 역시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에 대한 의지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보다 나은 존재들일 수 있다. 이 말이 심심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일은 이렇게 험난한 여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을 넓혀주는 멋진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귀여운 녀석들과 함께라니, 해볼 만하지 않은가. 힘내시라.


작가의 이전글 반려동물 간병의 고단함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