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놀던 내가 전북인이 된지 어언 15년 차. 교보문고에 목말라하는 건 여전하지만, 도시를 그리워하면서도 도시를 못 견디는 인간으로 변형되어서인지 이틀 만에 타이베이를 벗어나고 싶었다. '고기압이면 고기 앞으로'와 같은 지침만큼이나 내 일상을 보호하는 철칙이 '날씨가 좋으면 산으로'였기에, 화창한 날씨를 도시 한복판에서 소비하는 건 마음을 단단히 거스르는, 미련 곰탱이 같은 일이었다. 자발적 미니멀리스트가 다시없을 할인이라는 말에 휘둘려 물건을 쌓아두는 행위보다 더더욱.
그래서 선택한 곳이 양명산, 양명산이었다. 여행책자에서 양명산국립공원이 소개된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초록빛 평원에 마음을 빼앗겼고, 날씨 좋은 날 내릴 수 있는 넘버원 선택이었다. 다만, 양명산이 어떤 곳이냐, 어떻게 이동할 것이냐를 연구하지 않은 게 우왕좌왕의 시작이었다. 일단 양명산행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까지 지하철로 이동하긴 했으나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기나긴 줄에 '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을 줄 끝에 세워놓고 도대체 어디가 시작점인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부정승차 방지 위원회에서 나온 듯 탑승을 진두지휘하는 분이 계시길래 조심히 예상 탑승 시각을 여쭤보았다.
"지금 이 정도 줄이면 버스 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15분마다 한 대 오고 앉아서 갈 수 있는 정원은 25명이라 최소 1시간 이후에나 탈 수 있어요."
그 사이 버스가 한 대가 와서 사람들이 차곡차곡 올라타기 시작했고, 나는 버스를 놓칠세라 아이들 이름을 다급하게 불러 젖혔다. 하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긴 대기 줄에도 불구하고 입석을 선택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으니, 갈 길은 멀고 그 길마저 고불거렸다는 사실이다. 0.1평 남짓한 공간에 몸을 의탁한 둘째는 '봐라! 엄마가 늘 급하게 움직이는 덕분에 우리가 고생하고 있다!'하고 시위하는 모양새로 안쓰럽게 잠들었고, 힘들게 서 있느라 게임조차 못하는 첫째에게 미안해하며 어서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누가 알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 환장 파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걸. 양명산 순환 버스를 타면 된다는 것, 한번 탈 때마다 15달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책에서 본 '60달러를 내면 무제한으로 탑승 가능한 티켓'이 '이미 사라진 유물'임을 알게 되기까지 이리 묻고 저리 묻고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아… 이 출판사 사람들!) 그렇게 1차 관문을 넘자마자 맞이한 건 보면 볼수록 헷갈리는 버스 표지판이었다. 1번부터 13번까지 정류장이 나열되어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내리고 무엇을 돌아보라는 거지? 그 와중에 다른 버스가 와서 '000까지 가시는 분들 나오세요!' 하면 뒤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나가곤 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왜? 왜! 무슨 일이야? 우리가 맨 앞에 있었는데!'
이런 장면이 몇 차례 반복되자 잠들어 있는 조급함을 깨우기 시작했다. 앞으로 튀어나가 우리 버스는 어데로 갔나, 언제나 오나 목 빼기를 10여 분. 그때 바닥으로 상체를 수그리는 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독립군이 암호를 주고받듯 '이것이 너의 자금이냐?' 묻는 그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긍정의 신호가 달려나갔다. '그렇소만…' 그렇게라도 럭키드로우 실패를 만회하고 싶었던 내면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튀어나갔던 것이다. 약간의 아쉬움과 실망 한 방울 섞인 얼굴로 "다음에는 안 주워준다" 하며 내미는 그의 손에는 참을 수 있는 지폐의 가벼움이 있었다. 천 달러 둘, 백 달러 하나, 약 8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예상치 못한 획득으로 어디로든 좋다, 아무래도 좋다의 마음 상태가 되자 드디어 뇌 회로가 정상 가동되기 시작했다. 양명산은 몇 군데 관광 구역으로 개발되어 있고, 그 사이사이를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시스템이 장가계와 닮아있던 것이다. 오직 하차 지점을 선택하는 게 나의 몫. 그렇게 40분 가까이 기다려 놓고 기껏 내린 곳이 출발지에서 가까운 '죽자호'라는 곳이었는데, 정류장에 내린 후에도 어디가 어딘지 몰라 한참을 걸어야 했기에 낯선 땅에 불시착한 파병 군인이 따로 없었다. 뭐가 보이긴 보였다. 양열 종대로 늘어선 식당과 가게가 등장하면서 관광지가 맞기는 맞구나 싶었는데, 어째 내가 예상한 그림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헤매고 있는 게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젊은 대만 커플에게 물어도 본인들 역시 낚였다는 반응이고, 한 조각 미소, 한 마디 말조차 말라버릴 즈음 품목이 꽤 다양한 과일 가게를 발견했다. 맞다. 허기질 때 예민해지는 건 인류 공통의 문제일 것. 상큼하고 달달한 과일로 긴급 비타민 지원을 한 덕분에 생기가 되살아났고, 곧이어 사진과 비스무리한 풍경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우리가 과일 먹으러 온 거였구나, 싶은 소박한 풍경. 아이들을 마운틴 뷰에 세우고 사진으로 박은 뒤 미련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 끝에서 콘 아이스크림도 야무지게 먹고 말이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2시. 아직 하이라이트는 가보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잘만 흘러서 남은 하루를 결정지을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이자평, 소유갱을 들러, 말아?' '경천강으로 직진해?' 그 이전에 안 해본 짓에 용기를 내야 했는데, 바로, 지나가는 차를 잡는 일이었다. 이미 헤맬 대로 헤매서 정류장까지 이어지는 긴 오르막길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오르막길 시작점에서 대기했다가 옆길에서 빠져나오는 차량을 향해 손 흔들기를 잠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서서히 멈추길래 재빨리 간절한 마음을 낭송했다.
"저희 좀 정류장까지 태워주시면 안 되나요?"
오케이 사인을 확인하자마자 잽싸게 올라탄 우리. 오히려 이 상황을 지켜보던 현지인이 더 놀라서 "너희들 진짜 운이 좋다!" 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선의를 믿기에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나 역시 예상보다 빠른 성공에 '얼씨구나!' '기분 짱 좋음' 수치가 상승한 건 물론이고. 뒷좌석에는 운전자분의 아내, 아들이 동승하고 있었는데, 아내분이 이런 경험은 본인들도 처음이라며 우리만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밝히기를, 남편분이 양명산 순환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님이며, 그날은 휴무라 우리를 태울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정류장에 다다랐을 즈음 마침 108번 버스가 도착하여 서둘러 내릴 수밖에 없었는데, 작은 선물 하나 건네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선량한 마음들이었다.
누가 명절 아니랄까 봐 버스는 이미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최선의 최선을 다해 3인용 공간을 확보하고 장시간 버티기에 돌입! 그렇게 고생 끝에 경천강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양명산 입구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었는지 알았다. 처음부터 이 산의 하이라이트인 '경천강'으로 갔어야 하는 거다. 원하는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서 쭈욱! 그런데 모진 기다림 다 견뎌내고 일찌감치 하차했다가 장장 30여 분을 콩나물시루 속에 빽빽하게 갇혀있었으니 얼마나 아쉽던지. 그래도 다른 뷰 포인트는 다 포기하고 경천강으로 직행해서 이만하면 다행인 선택이라 여겼다.
'드디어 경천강이다! '
실제로 본 경천강의 드넓은 초록빛 평지와 산세는 기대했던 만큼 멋졌고, 우리나라 소백산을 닮은 듯한 부드러운 능선이 내게 더없이 평온한 마음을 주었다. 아… 이곳만으로도 충분했구나, 하는 후회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그만큼 탁 트인 자연 경관이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신비한 땅 경천강'이었다. 곳곳에 돗자리 펴고 데이트 즐기는 청춘 남녀 사이에 앉아 우리도 눈 호강을 즐기기 시작했다. 날씨는 어찌나 좋은지, 아이들 얼굴에도 미소가 둥둥 떠다니는 걸로 보아 꽤나 만족스러운 듯 보였고, 드러누운 채 자연을 만끽하는 그들을 보는 내 마음도 이대로 좋다, 완벽하다, 더없이 감사하다는 문장으로 꽉 채워졌다.
그대로 더 머물렀어도 좋았겠지만, 시선에 닿는 영토만큼은 발 도장 찍어야 하는 성미를 어쩌겠는가. 여기 가도 예쁘고, 저기 가도 예쁜걸. 어느 지점에서는 안 따라오겠다는 아이들을 놔두고 홀로 정상석까지 다녀오기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도시 뷰를 마주하고 '강제 동행이라도 할걸 그랬어'하며 홀가분함과 아쉬움이 교차했더랬다. 어느새 최고의 여행 메이트로 성장한 우리 아이들…. 대신, 빙 둘러 내려가는 길에 세계 축구 선수들의 역사와 근황을 원 없이 들어야 했는데, 나는 나의 둘째가 이렇게까지 투 머치 토커인 줄은 처음 알았다.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파고드는 덕후인 건가? 아니면, 자연이 주는 평온함이 마음은 물론 입도 열게 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나, 너와 함께 양명산에서 보낸 하루가 너무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