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펀에 이어 '남들 하는 거 다 해보자'의 2탄은 고궁 박물관이었다. 궁금한데 미루고 미루었던 거 보면 확실히 내 취향은 현지인의 삶에 가까이 들어가는 거였는데, 고궁 박물관을 안 가는 건 역사 속으로 들어갈 타임머신을 스스로 놓치는 기분이라 결전의 마음을 안고 스린역으로 향했다. 박물관행 버스는 수시로 도착해서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다만, 주위에 마땅한 식당, 카페가 없는 게 흠이었는데, '박물관 내부는 비싸고 분명 이따가 배고파서 버티기 힘들 텐데…' 하는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해외만 나가면 애국자, 아니, 학습자가 되어버리는 성향 탓에 머릿속에 박히지도 않는 오디오 설명을 끝까지 듣느라 에너지가 급속도로 방전되었던 것이다.
버스 투어할 때 가이드가 고궁 박물관은 무조건 해설자 동행으로 하라더니 돈 들이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인솔자 없이 우리끼리 돌아다니려니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와야 하는지도 헷갈리고, 방금 나왔던 전시관도 '여기, 둘러본 거 맞지?' 하며 확인 사살해야 할 만큼 동선 정하는 데 애를 먹어서 가이드를 앞세운 사람들이 부럽게 느껴졌다. 물론 우리도 투어를 고려했었지만, 그놈의 돈, 돈이 문제였다. 2시간 투어하는 데 인당 3만 원, 도합 9만 원(입장료, 수신기 별도)이 드는 옵션을 놓고, 자유로운 관람을 명분으로 지출을 아꼈던 것. 결국, 1시간 만에 관람 포기 선언을 외치고 박물관에서 탈출했다.
"아그들, 일단 밖에서 뭐라도 먹고 재정비하자!
아… 그런데, 보이는 건 편의점이요, 먹을만한 건 아이스크림뿐이었으니…. 박물관에서 먹고 싶었던 큰아들을 밖으로 끌어낸 탓인지 '안 먹어'로 가엾은 시위를 하는 녀석은 두고, 둘째와 나만 아이스크림 하나씩 집어 들었다. 녀석은 1+1 제품임에도 재고가 없어 혜택을 못 본 국산 아이스크림을. 나는 붉은 팥이 들어간 대만 아이스크림을. 그러다 나와 간식 입맛이 비슷한 큰아들이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는지, 한입 달라기에 선뜻 내줬다가 다 털리고 말았다. '먹을 때 건드리면 싫어하는 거 알 텐데?' 하며 쏘아보긴 했으나 어쩌겠는가. 박물관의 고물가에 심리적 굴복을 당한 내 잘못도 있는걸.
예상은 했지만, 자력으로 중국 유물을 감상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선생님 설명을 듣고 필기하는 것보다 스스로 학습 계획을 세우고 공부하는 게 몇 배의 체력을 요구하듯 말이다. 결국, 인당 150NT나 주고 빌린 오디오 가이드는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버리고, 가장 중요한 유물이 모여있다는 3층을 얼추 다 둘러보았을 때는 나부터 박물관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이건 뭐 설명이 귀에 박혀야지 말이다. 확실히 기계란 것들은 인간 육성만 못해서 괜스레 다른 팀 설명에 이리 힐끔, 저리 힐끔하게 되는 것도 시간을 배로 잡아먹었다.
일부터 남의 설명을 엿듣고 훔치려는 생각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수시로 수신되는 언어가 한국어이기에 익숙한 소리를 찾아 귀가 마중 나갔을 뿐. 때로는 한적한 곳에서 고요히 유물을 응시하고 있으면 단체객이 내 주위를 180도로 에워싸고 강체 청취하게 만드는 바람에 '지금, 이 구역은 우리가 접수한다'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무리들이 낯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한편, 투어 가이드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어떤 가이드는 집중하기 좋은 속도, 발성으로 지식을 풍성하게 전달하는 데 반해, 어떤 가이드는 박물관 최고 히트작인 상아탑 앞에서도 "인간의 솜씨가 대단하죠" 하고는 끝이라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설마, 지금 낮술 드시고 일하는 건가? 혀도 살짝 꼬부라진 것 같은데? 돈 10만 원 내고 저런 가이드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이지 '이건 아니잖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가이드를 만난 후 잠시나마 투어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물론, 그냥 패키지여행의 가이드가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긴 했다만, 어쨌거나 가이드 없이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다음에 비슷한 기회가 생기면 제대로 알아보고, 제대로 투자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되었다. 제대로 된 값어치만 한다면야 돈 10만 원이 큰돈이 아니거늘 우리끼리 고군분투하다가 하루를 꼬박 쏟아버렸으니 얼마나 미련 맞던지. 더구나 이토록 화창한 날에 말이다.
딱히 한 것도 없이 박물관에서 보내버린 낮 그리고 오후. 무엇을 할까 하다가 다시 한번 목적 달성을 위해 '호계수호전매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연복 셰프의 그곳, 우라이에 갔던 날 도전했다가 메인역에서 폭발해버린 그곳. 아니나 다를까. 출구 찾기에 능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상황은 여전했다. 일단 아무 출구로 나와서는 로또 번호를 확인하는 심정으로 식당을 검색했다. 그런데, 도보로 30분?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의심하지 않았다. 새우만두를 먹고 말겠다는 간절함, 문 닫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일말의 의심도 틀어막아버린 듯했다.
자유여행이 처음도 아닌데, 이토록 구글맵에 의지해 다닌 여행은 처음이었다. 자고로 여행은 현지인에게 묻고 현지인과 소통하며 다녀야 특별한 무언가가 생긴다고 믿는 데이터 차단형 인간이었는데, 어쩌자고 폰만 믿고 폰에 의지하는 인간이 되었는지. 그렇게 오류를 수정할 기회도, 타인과 접속할 기회도 차단하고 말았는지. 점선을 따라간 길 끝에서 눈에 익숙해진 노란색 간판을 발견하고 '왔노라. 보았노라. (문) 열었노라' 하고 즐거워하던 것도 잠시였다.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은 아예 없고, 일렬로 나란히 앉을 수 있는 10석 규모의 좁은 공간을 보고 긴가민가 했다. '여기에 이연복 셰프님이 오셨었다고?!'
어차피 후퇴할 여지도 없었기에 새우만두 두 접시, 만두는 안 먹겠다고 꼬장 부리는 둘째를 위해 자장면 대 사이즈를 주문했다. 그 사이, 테이블에 놓인 소스를 연구하다 대만 커플에게 대리 제조를 부탁하기도 하고 말이다. 물어보는 척, 깨달음의 미소를 띠고 자연스럽게. 만두가 먼저 나왔고 한 입 먹는 순간 맥주 생각이 간절해 편의점으로 냅다 뛰어갔다. 그런데… 없네?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금방 다녀왔건만 반쯤 비워진 접시. 만두 거부하던 녀석은 어디로 가고 내 몫까지 점령해버렸는지. 소식할 것인가,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반 판만 더 주문했다.
호계수호전매점의 자장면은 자장면을 잘 안 먹는 내 입맛에도 딱이었다. 유산동 우육면을 소환해서 미안하지만, 그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에, 무엇보다 간이 적당해서 좋았다. 칼로리를 계산하지 않는, 그저 맛있게 먹고 싶은 그런 맛. 새우만두는 말해 뭐해. 우리나라에도 널리고 널린 게 냉동 만두라지만, 새우가 꽉 들어찬 풍미로운 식감은 그 자체로 여행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반전은 있었다. 한국에 들어올 즈음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힘들게 찾아갔던 가게는 이연복 셰프님과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지점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코앞이 시먼딩이더라니. 진실을 파악하고 어이없음과 허탈함에 공격당하려는 순간 나를 구출한 건, 나보다 한 뼘 더 성장한 아들의 한마디였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잖아! (어깨 토닥토닥) "
그래. 그래도 당시에는 맛있게 먹고 시먼딩으로 가서 밤거리를 즐겼다. 드디어 위시 리스트 하나 해결했다는 만족감에 번화가를 걷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침 거리에서 펼쳐치는 행위 예술을 보기도 했는데, 공연 그 자체보다는 아들과 '몸 쓰는 자'에 대해 얘기 나누는 시간이 더없이 좋았다. '저게, 그렇게 힘든 동작이야?' '코어 힘을 많이 사용해야 해' 같은 말들. 사춘기 아들 키우는 부모님들은 아시지 않을까. 갈수록 접점이 줄어들고 있다는걸. 아들의 마음을 열어두려면 내가 흥미 없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서라도 그들과의 교집합을 확대해야 한다는 걸. 내가 늘 아들들 데리고 여행하는 것도 부모와 자식이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보다는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렸다.
어쩌다 시먼딩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쉬워 망고 빙수로 이름난 곳을 찾았다. 삼형제 빙수였나, 삼형매 빙수였나…. 여행 책자에 나와있길래 간 곳인데, 출판사에서 제대로 일을 안 한 건지, 가게가 초심을 잃은 건지는 몰라도 맛이 영 실망스러웠다. 달다, 달아서 시원하지 않다…. 아무리 남의 떡이 커 보인다지만, 쟁반 타고 날아다니는 다른 빙수에 비해 양도 턱없이 적었고, 내게는 다디단 시럽 맛이 전부였다. 물론 이건 내 주관적인 평가이고, 아이들은 숟가락에 아쉬움을 묻혀가며 싹싹 비웠지만 말이다.
'좋아. 너희들이 좋으면 된 거야. 그럼, 이제는 내 차례. 우리 숙소까지 함께 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