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초마녀 Oct 27. 2024

송산 문창원구, 타이베이 101에 가면



여행 기간 내내 에버비앤비에 숙박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점이 매일의 아침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숙소 가까운 곳에 현지인들의 단골 식당이 있었지만, 나흘이 한계. 그렇게 해서 새로 발견한 곳이 루이자 커피였다. 아침마다 커피 수혈하던 버릇이 있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간절했는데, 음료와 샌드위치가 포함된 모닝 세트가 단돈 3500원인 걸 알고 원통해하며 아이들 몫의 커피까지 단숨에 흡수했다. 다만 세트메뉴를 구입하려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어야 했는데, 현지 유심으로 가입이 어려웠던 나는 자주 올 법한 사람을 잘도 골라내서 그들을 앞세웠다.





대만 여행도 후반부에 접어들 무렵, 타이베이의 랜드마크를 방문했던 날 역시 루이자 커피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건 아니나, 나쁘지 않은 선택. 그리고 아껴두었던 송산 문창원구로 향했는데, 시작부터 급똥에 휩싸인 녀석 덕분에 진행이 원활하지 않았다. '왜 꼭 움직이려고 하면 화장실 간대? 구경하고 있을 때 슬쩍 다녀오면 안 되는 거야?' 스스로 정말 재능 없다고 한탄하는 분야가 인내인데, 특히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에 발작하는 유형이라 10분이 넘어갈 즈음부터 시동 걸기 시작했다. "아직 멀었어?" "빨리 안 나와?" 결국 나의 압박에 굴복한 녀석을 픽업해서 건물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아기자기한 게 많아도 내 눈에는 '무 쓸모의 향기'로 가득한 것들이라 구매로 이어지진 않았다. 내심 메이드 인 코리아의 멋과 미, 우수성을 추켜올리면서 말이다.





아무리 비싸도 참을 수 없는 끌림은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맛보기 힘든 리얼 100% 망고 아이스크림과 우롱차 아이스크림. 특히, 차 문화가 발달된 나라여서 차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어찌나 맛있는지, 흔하지 않은 귀한 단맛이었다. 게다가 편하게 앉아서 먹으라며 자리와 차까지 내어주니, 대만인의 친절이 온몸에 스며드는 기분. 공간이 주는 멋스러움 만큼이나 그 안에 깃든 다정한 마음이 더 돋보이는 곳이었다. 그렇게 숨은 공간 찾기 하듯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애서가들의 성지인 청핀서점으로 향했다.





교보문고 하나만 바라보고 지방에서 서울까지 가는 내가 대만의 대형 서점을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그즈음 내게 지적 욕구를 방해할 만한 내부 사정이 있었으니…! 책도 좋고 공간도 좋고 다 좋은데, 배가 고팠다. 급똥 위기에 처한 또 한 명의 아들을 화장실로 보내고, 책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서점 내 카페를 어슬렁거렸다. 타이베이 101 건물이 정면에 보이는 탁월한 뷰에 반해서 책이고 뭐고 그곳에 앉아 근사한 한때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만, 파스타, 피자, 샐러드 류의 메뉴와 가격이 마음에 걸렸는데, 여행 시작부터 소비 수준을 '기본'으로 설정해두어서 그런지 '고급'에 해당하는 것들을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따져보면 우리나라 물가와 비슷하거나 조금 높았을 뿐인데 말이다.





결국, 이성적 욕구와 본능적 욕구의 줄다리기 끝에 다른 대안을 찾으러 다녔다. 지하 식당가부터 문창원구 내 이탈리안 레스토랑까지. 이탈리안 식당에서는 메뉴를 넘겨보며 '내가 원하는 건 파스타가 아니야!'하고 절규하고 있으려니, 주위에 있는 모든 직원이 합류하여 배고픈 한국인에게 식당 찾아주기 작전을 짜기도 했다. 내가 원화는 조건으로, 브레이크 타임까지 세심히 확인하면서. 그렇게 싸고 맛있는 곳과 비싸지만 인기 맛집을 각각 한 군데씩 추천받았는데, 후자는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서 아쉽게 놓치고 우선 5분 거리에 있는 로컬 식당으로 향했다.





'아… 이건 아니다…' 한국어 메뉴판이 있는 걸로 보아서 한국인 취향임은 알 수 있겠는데, 샌드위치로 때운 위를 소박하게 보충하기는 싫었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 모양. 여행에서만큼은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불호'를 크게 드러내지 않던 녀석들도 다른 데 가자는 의사를 밝히고, 식당 찾아다닐 기력과 체력이 바닥날 즈음에야 머릿속에 저장해둔 히든카드가 떠올랐다. 그래, 철판구이가 있었지! 타이베이 101 지하에 있는 카렌 식당에서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는 후기가 떠올라 더는 물러날 수 없는 비장함으로 101을 향해 걸었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자리를 잡고 첫 입을 맛본 우리의 반응은 극찬으로 가득했다. 일단 앞에서 즉석으로 요리해 주는 모습에 기분이 한껏 고조되고, 무엇보다 밥, 밥이 나와서 너무 기뻤다. 계란 볶음밥 말고 그냥 밥, 하얀 쌀밥 말이다. 그뿐인가? 애들은 안 먹을 게 뻔하고 나 혼자 먹자고 주문하기 아까웠던 야채를 이곳에서 원 없이 먹었다. 다 2인 세트메뉴에 포함된 것이었는데, 야채, 스테이크, 새우, 닭다리살, 생선구이를 6만 원 선에 먹을 수 있었으니, 그간 생각보다 높은 물가에 마음껏 주문하지 못했던 경험에 비하면 놀라운 만족도였다. 이 좋은 기분에 술이 빠질 수 있나. 한껏 들떠서는 맥주 한 캔을 주문하고 아이들에게도 스프라이트 하나씩 마실 것을 권했다.



"하나씩… 사준다고?"


"응. 마셔 마셔!"





이전까지는 천 단위 넘어가는 액수의 체감률이 상당히 높았다가 맛있는 음식과 함께 알코올이 급물살을 타고 들어가면서 '이 정도면 완전 저렴하다'라고 느끼기에 이르렀다. 마치 그간의 소심한 소비를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딱히 부족하지도, 아이들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선심을 팍팍 썼다.



"너희들, 스테이크 하나 더 먹을래?"



덕분에 대만 도착 후 전례 없는 카드 액수를 찍었는데, 1760NT, 그래봤자 한국에서 4인 가족이 삼겹살 외식 한 번 하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간 왜 소심하게 굴었어? 정말 알다가도 모를 마음의 변화였다. 그렇다고 갑자기 소비가 화끈해진 것도 아니었다. 궁색한 마음이 잠시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을 뿐.





먹었으니 둘러봐야지? 미리 정보를 수집한 덕분에 입장료가 비싼 89층 전망대 대신 88층 카페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좌석은 예약이 마감된 터라 입석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TO GO라 적힌 작은 종이를 건네받았다. 보안 직원에게 확인증을 보여주어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시스템. 막상 도착하니 로비에서도 전망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고, 커피숍 내 서서 마시는 공간에서 잠깐 둘러보는 것으로도 충분하겠다는 견적이 나왔다. 그때부터 눈과 머리, 마음과 몸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도시 전경을 보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그냥 내려갈까?' '그래도 올라왔으니 약속한 금액만큼은 주문해야지'하는 갈등이 싹트고, 마음은 이 순간을 즐기는 듯해도 몸은 조금씩 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체한 시간이 10여 분 지났을까. 카운터 직원의 레이더망에 우리 일당이 포착되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훅 들어온 주문 압박. 그동안 먹튀한 인간들의 데이터가 상당수 누적되었는지, 1층에서 올라간 인원과 주문한 인원을 대조한다며 즉시 주문을 요청할 때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주문한 것이 아이스크림 두 개! 전망대 바로 아래서 먹는 디저트답게 한 컵에 만 원이 넘는 금액은 정말이지 철판구이와 비교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이거 6컵 먹으면 카렌에서 스페셜 세트 먹은 거랑 똑같은 거지? (티스푼으로) 서너 번 뜨면 사라지는 이 아이스크림을?' 차라리 티라미수나 먹을걸, 하고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어찌하리오. 잠시나마 상도덕을 어기려 한 내 탓이려니 하고 당당히 퇴장했다. 안녕, 타이베이 101.






이전 10화 고궁에 갔다가 만두 먹은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