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먼딩에 있는 '천천리'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식당 앞의 긴 대기 줄이 맛집임을 인증했고, 하얀 쌀밥이 간절하던 터였다. 식당 오픈 시간은 10시 반. 일찍 밥 먹고 하루를 길게 사용하고 싶은 여행자에게는 애매한 시간대인데, 지하철 타고 가기에는 1시간이 붕 떠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동먼에서 시먼딩까지 가는 길에는 중정기념당, 얼얼바 평화공원, 대만 총통부 등이 있어서 걷는 맛이 좋은 편인지만, 실상 시간 때우려 하는 짓이라 '이 아까운 시간에 뭐 하고 있나'하는 내면의 심사위원이 불쑥 끼어들기도 했다.
나름 첫 오픈런이었는데 40분 가까이 일찍 도착한 정성이 부족했는지 선두 자리는 대만 젊은이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단 두 명이었던 인원이 조금씩 규모와 부피를 확장하기에 물어보니 모두 일행이라고…. '그거 아니? 니들, 에버랜드 푸바오 줄이었으면 난리 났어. 눈앞에서 재료 소진, 영업 마감 소리라도 들었으면 전쟁 각이라고!' 그러는 우리 아이들은 줄 서기에 동참하고 있었느냐? 그럴 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앉을 자리 찾아 게임하고 계시더라. 지 애미는 한 끼 식사를 위해 이토록 비생산적인 오전을 보내는 게 맞는지 후회화 자책 사이를 오가는 와중에 말이다.
천천리의 대표 메뉴는 돼지 조림 덮밥과 굴전. 덮밥은 계란 추가해서 두 그릇 시키고, 굴전은 어디서 읽은 대로 1인 1접시 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굴전에 대한 기대가 매우 높은 상태. 하지만, 아쉽게도 덮밥은 내가 김치 들고 다니는 중년 한국인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맛이었고, 굴전은 소스가 다 망쳐놓았다. 계란과 굴의 조합만으로도 충분한 팀에 난데없는 소스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장악했달까? 먹을만 하나 여러 입은 못 먹겠다, 가 내 총평이었다. 하지만 둘째도 제 할당량의 굴전을 반도 비우지 않아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음식 남기는 걸 돈 낭비로 연결 짓지 않던 나, 이제 정말 아줌마 대열에 진입한 건가?
잠시 스타벅스에서 정비를 마치고 단수이로 향했다. 단수이는 지하철 레드 라인의 종점에 있는데, 그간 같은 구간을 몇 번이나 왕복했는지, 얼마나 비효율적인 동선이었는지를 자각하게 만드는 위치였다. 아무리 남들이 계획이라는 걸 세워도 나는 나만의 여행을 하겠다며 버텨왔는데, '단수이랑 고궁 박물관, 스린 야시장을 한 코스로 묶을걸' '조금 더 시간의 밀도를 높여서 더 다양한 곳에 가볼걸' 하는 미련이 따라붙었던 것이다. 아니다. 후회 하나 없는 완벽한 여행이란 게 가능하기는 한가…. 아쉬움을 데려오기엔 날씨가 너무나 완벽해서 다시금 마음을 오늘로, 이 순간으로 되돌려놓았다.
사실 대만 여행 카페에 가입하기 전까지 단수이는 내게 생소한 지명이나 다름없었다.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니라 촬영지, 세트장에 무덤덤한 까닭에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촬영지라는 소개가 나의 기대를 끌어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단수이 역에 도착하자 '아, 이것은 여행 속의 여행이 되겠구나'하는 직감이 선명했다. 지하철 타고 40분 만에 베이징에서 칭다오로 넘어온 느낌?! 타이베이 도심과는 사뭇 다른 풍경에 설렘이 한 줌 채워지면서 즐기려는 마음도 조금씩 세력을 확장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홍마오청. 입구는 비록 여타 관광지와 다름없는 느낌이었지만, 고도를 10미터 정도 상승시킨 순간, 우아한 건축물, 아름다운 정원, 청량한 하늘이 만들어내는 광경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자고로 감동은 '멈춤'과 '지연'에 있는 법. 홍마오청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알고 가자며 아이들에게 기본 정보를 열심히 숙지시켰는데, 지금에 와서는 '폐기처분된 얇은 지식'이 되어버렸고, 여행을 만끽하는 데 지면에 적인 작은 활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원을 걷다가 나무 아래 앉아서 선명한 초록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위안이자 축복. '패키지여행이었다면 30분 자유 시간으로 끝났을 곳이었을 텐데…' 후에 당도할 이들에게 가상의 위로를 건네며 '시간 제약 없음'의 프리미엄을 더 누리기로 했다.
홍마오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진리 대학도 여행자의 감성을 돋우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특히나 지방 대학에서 캠퍼스의 낭만, 아름다움 따위 누려본 적 없는 나에게 와닿는 감성 포인트가 있었는데, 우아한 예배당과 연못, 그리고 울창한 나무였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나무! 언제부턴가 해외에 가면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분위기의 나무에 빠져들곤 했는데, 모두가 사진 찍기 바쁠 때도 나는 한 그루의 나무만 깊이 응시하며 쉽게 증발되지 않는 단단한 에너지를 채우려 했다. 어디서든 놀 거리를 찾아내는 둘째 아들은 물통에 남아있던 물을 제 몸에 털어 넣더니 그것으로 물고기를 잡겠다고 나서고….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흐르는 시간이 좀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예쁜 골목길 따라 걷다 보면 마주하는 소백궁. 어떤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인가는 긴가민가하기만 한데, 이름처럼 새하얀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새하얀 단층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연둣빛 잔디가 '백'의 의미를 더 돋보이게 했던 곳. 그보다 이곳에 작은 수치심과 민망함을 새겨둔 일이 있었는데, 소백궁까지 다 돌아보고 나자 석 장의 입장권이 살짝 아까워진 게다. 그래서 아직 표를 구매하지 않은 한국 관광객에게 동포애를 발휘할 목적으로 두리번거렸는데, 나와는 다르게 표준 FM의 피가 흐르는 아들에게 단박에 제지당하고 말았다.
"엄마. 그러지 마."
"왜, (멀리 있는 3인방에게) 주면 안 돼?"
"이 나라에서도 수입 얻기 위해 표 판매하는 거잖아."
아우 쪽팔려. 여행 떠나는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를 알아가는,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라는 식의 포부를 밝히곤 하는데, 정말이지 이번 여행만큼 나와 아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 시간이 드물었던 것 같다. 이제 내 몸은 더 이상 20대의 여행을 할 수 없다는 사실과 아이들은 내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무시무시한 사실까지. 어리석은 행동을 하면서도 그 영향이 아이들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를 바람은 얄짤없는 희망 사항일 뿐이고, 아이들이 '정직'과 '성실'이라는 기본 무대에서 살아가게 하려면 나의 충동적 욕구부터 자제해야 함을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다.
미련을 버리고 길을 건너 강가로 갔다. 배를 타고 강 너머에 보이는 빠리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전 세계의 명당자리는 다 차지하고 있는 스타벅스 발견! 가고 싶었던 장소이긴 하나 매표소를 찾는 게 우선이라 눈길만 주고 지나갔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사람들이 배에 탑승하고 있었는데, 앞에 있는 어르신이 반값만 내고 표를 구매하시길래 현지인 우대인가 싶어 여쭤보니, 다름 아닌 경로 우대권. 그런데, 내 속물적 근성이 너무 투명하게 드러난 걸까? 어르신이 몇 장 필요하냐고 물으시길래 설마 했지만, 정말로 일반 표 석장을 사주시는 게 아닌가. 속으로는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기쁨에 흥얼거리고, 겉으로는 돈 드리려는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면서 겉과 속이 따로 놀았는데, 대만 어르신은 그저 한마디만 남긴 채 바삐 사라지셨다.
"서비스!"
어쩌다 공짜로 건너간 이웃 마을 빠리는 무료가 아니었다면 분명 괜히 왔다고 후회했을 분위기였다. 강가에서 유바이크 타는 게 이 동네 베스트 상품인데 반해 자전거가 지나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사람이 많았고, 딱히 입맛을 돋우는 먹거리도 많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대왕 오징어튀김은 직원이 주문을 받고 중량을 재는 모습을 보니 신뢰도가 떨어졌고 말이다. '대왕 오징어답게 크고 통통한 몸통이 아니라 싹둑 잘라낸 끄트머리만 먹을 수 있겠군'하는 예민함이 발동한 것. 나에겐 '손해 보는 게 장기적으로는 이득이다' 같은 말을 실천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돈 들인 만큼 최선의 것을 누리지 못하면 '경직'이란 모습으로 얼굴과 몸에 나타나곤 했다. 결국, 재주문을 하고서야 예상 범위 안의 오징어튀김을 받아들고 아이들에게 넘겼다.
비싼 건 너희들 먹어. 엄마는 소식하는 게 좋아. (번역: 두 개는 못 시키겠으니 나눠서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