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를 여행하는 법, 대도시를 사랑하는 법을 잊어서일까. 도심과 외각을 번갈아가며 여행하던 틀에서 벗어나 우라이에 다녀온 다음날을 지우펀 투어 날짜로 지정하자마자 하늘에 변화가 생겼다. 5일 동안 화창한 날이 지속되었기에 흐리고 비바람 부는 날씨는 예상한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말이다. 다른 날이었으면 여행 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직감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을 텐데, 왜 하필 취소할 수도 없는 버스 투어 날 변덕을 부리는지. 지우펀 만나러 왔다가 막상 타이베이에 있으니 더 웅장하고 수려한 것에 마음 뺏길 걸 알아챈 걸까? 잠시 투어 비용을 포기할까 하다가 약간은 축 처진 기분으로 모임 장소로 향했다.
만원 값을 하는구나.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든 첫인상이었다. 오직 다수의 인원을 수송하겠다는 기능에 충실한 의자, 연식이 드러나는 실내 장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딱 3만 원어치의 하루를 보내겠구나, 하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젊은 남자 가이드가 내뿜는 기운도 마찬가지. 일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쏙 빠진듯한 기계적인 말투, 목소리에 비가 와도 슬퍼하지 않겠다는 다짐마저 싹 달아나면서 뇌 전체로부터 집중 경보 문자가 쏟아졌다. 왜 오늘을 선택한 거니, 왜 포기하지 못한 거니.
아니나 다를까. 예류에 도착하니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무슨 배짱인지 남들 다 사는 우비는 사지 않았다. 우비를 사면 마치 남은 일정 동안 흐리고 비 오는 날씨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확정하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오늘 하루'에 대한 기대를 접어서인지 예류지질공원에 대한 감상은 '바닷가에 모여든 독특한 돌기둥'으로 정리되었다. 가이드 말이 맞았다. 호기심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보면 공주도 보이고 하트도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돌덩이라고. 내가 후자에 속하리란 건 앞서 짐작했고 말이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건가? 예류에서도 핫플 중의 핫플인 여왕 바위 뒤편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말이다. 기껏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데 기꺼이 타인의 배경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 대신 나서서 흩어놓으려다 사뿐히 내 갈 길을 갔다.
사실 나는 이날의 투어가 정확히 어디를 가는지도 몰랐다. 대만에서 현지 유심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가입, 인증 불가로 상품을 구매하기 어려웠고, 적당한 걸 골라 남편에게 대리구매를 요청했을 뿐. 분명 '예스지' 상품을 고른 것 같은데 어쩌다 '예스폭진지'가 되어버린 지는 모르겠지만, 내리라면 내리라는 대로 도착한 다음 목적지는 스펀 폭포였다. 아… 폭포…, 또… 폭포? 하지만,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말처럼 괜히 패키지 관광지가 아닐 터. 알고 보니 이곳엔 소시지 맛집이 있었는데,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야채 고기 말이, 소시지에 홀려 폭포 구경은 안중에도 없었다. 모두의 동의를 받아 가게로 직진!
주인아저씨께 고기 말이 야채 하나를 콕 집어서 '큰 거'로 달라고 주문하고, 혹여나 바뀌지 않을까 예의주시하며 빨리 익기를 바랐다. 예류에서 버스 타기 전, 편의점에서 산 빵을 급하게 먹는 바람에 체기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 맛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눈, 코, 입을 사로잡은 야채 고기 말이. 나에겐 오직 먹으러 스펀 폭포까지 간다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게다가 막힌 속도 뚫어줄 만큼 최고의 간식이었다. 소시지는 큰애의 요청으로 하나만 추가 주문했는데, 소시지 맛집으로 알려질만한 근거가 있는 맛이었다. 생마늘을 까서 같이 먹으면 완벽한 안주 그 자체. 속만 괜찮으면 소시지도 하나 다 먹어치울 수 있었는데 빵에 굴복한 소화력이 못내 아쉬웠다.
스펀으로 향하는 길에 가이드가 옵션 조사를 시작했다. 천등 날리기, 닭날개 볶음밥, 땅콩 아이스크림, 광부 도시락 등등등. 살짝 졸음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천등 날리기를 제외하고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들을 떠밀리듯 주문하고 싶지 않아 자는 척 모른 척하며 척척 둘러댔다.
"아무것도 선택 안 했네요?"
"네. 잠자느라 신청 못 했네요."
대신 안내받고, 건네받는 시간만큼의 여유가 확보되었는데, 남들이 천등 날리는 것만 구경하는 우리가 궁색해 보이긴 했으나, 글로 적을 만한 간절한 소망을 창작하고 붓질하는 것도 일이라 깔끔하게 포기! 한편, 자유시간 1시간에 맞춘 속도로 걷고, 먹다가 천등이 하천 여기저기에 처박혀 있는 걸 보고는 내심 안 하길 잘했다고 위안하기도 했다. 저 천등 주인은 알까? 그가 염원하는 건강, 행복, 사랑이 잠시 날아오르다 맥없이 뒹굴고 있다는걸….
사전 준비 미흡으로 인한 대가는 진과스에 도착할 무렵 받게 되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단체 행동에 따라야 했고, 어쩔 수 없이 가이드 뒤를 쫓는 걸 포기해야 했다.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는 게 급선무. 그러고는 진과스가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한 채 몇 시까지 모이라는 정보만 듣고 돌아다니다가 곧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남은 시간 대비 박물관 입장료가 아까워 진입을 포기했는데, 비는 내리고 밖에서 할 것도 없는 마당에 실내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말이다. 신발 젖는 것도 피하고. 게다가 비 와서 더 운치 있던 일본식 가옥에 들어가 보고 싶어도 입장권이 있어야 했으니, 정보에 취약하면 이렇게나 경험의 폭이 좁아진다. 돈 아끼려는 마음도.
날씨 탓인지 대망의 하이라이트인 지우펀을 앞두고 기대, 설렘 지수가 0 이하로 떨어졌다. '투어 성공'이란 말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음 기회에'를 노리고 있었기에 우산 쓴 채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면서까지 사진 찍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끝! 그러고 보면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람들인지. 사진 한 장에 여행의 민낯은 다 담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사람. 희뿌연 안개로 가득한 경관 보는 건 1분 컷으로 마무리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먹거리 복습을 시작했다.
마치 단합이라도 맺은 듯 모든 한국인 가이드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 새우 완자 튀김, 밀크티, 누가크래커 맛집을 찾아 출석 도장을 찍었다. 새우튀김, 합격! 밀크티, 불합격! 누가 크래커, 너무 한국인 전용 특별 판매 구역인 게 마음에 안 들어 패스! '추천'과 '좋아요'가 여행의 실패를 줄일 수는 있겠다만, 이건 뭐 공장에서 찍어대는 공산품도 아니고 모두가 같은 가게에 가서, 같은 메뉴를 먹고, 사는 게 어딘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은 가이드가 알려준 장소로만 세팅되어 있어서 새로운 것을 보고, 먹고 할 호기심을 잃다 보니, 다른 거리에서는 분명 짧다고 볼멘소리 했을 1시간이 조금은 여유롭게 느껴졌다. 시간 때우듯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대왕 오징어튀김 하나 사 먹고 복귀. 버스가 타이베이 시에 근접하니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멈추고, 버스에 실려 다니던 하루도 잘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