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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초마녀 Oct 27. 2024

우라이, 에라이, 도라이

유산동 우육면, 우라이 볼란도 스파


우리 가족에게 백이면 백 오케이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여행지가 있다면 단연코 온천일 테다. 탄생 8개월 만에 캐리비안베이에 입문해 물에서 놀며 자라서 그런지 어느 물가에 내놓아도 적응이 빠른 아이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에게 "너네 온천 갈래?" 하는 제안은 내 귀에 캔디, 아니 완벽한 자유로 들렸을 테고, 그들의 열정적 지지에 힘입어 타이베이에서 1시간 거리인 우라이 행을 택했다. 여러 선택지 중 내가 가기로 한 곳은 우라이 볼란도 스파. 사실 공들여 찾아본 건 아니었고, 블로그에서 상위 노출되던 글을 참고해 우발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물놀이도 아침식사부터. 우라이로 가는 버스를 메인 역에서 타야 했기에, 이참에 '유산동 우육면'에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가수 성시경의 우육면 맛집으로 알려진 곳인데, 아침부터 면발을 흡입하는 게 달가운 선택은 아니었으나 타이완의 명절 연휴 내내 배우지 않았던가. 나의 아침 식습관이 어쨌건 여행지에서는 그때그때 먹을 수 있는 걸 먹어야 한다는 걸. 그래서 혹여나 양이 많거나 남길 수 있는 사태를 대비해 두 그릇을 주문했고, 밀가루 반죽이 그대로 느껴지는 면발에 '어딜 봐서 미슐랭?' '어쩌다가 인생 맛집?'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타이베이 메인역은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지하철은 아주 편리하게 설계돼서 감탄스러운 반면에, 메인역은 출구 하나 찾기 힘든 구조로 어찌나 내 밑바닥을 자극하던지. 이날도 아침부터 출구를 찾아 헤매다가 친절한 스타벅스 직원의 도움으로 M8 출구를 찾을 수 있었는데, 대만 여행 중 8할의 쓴맛을 다 맛본 곳이 타이베이 역일 만큼, 메인역이라면 학을 뗄 일이 추후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849번 버스 정류장은 블로거 님들의 친철한 설명 덕분에 무난히 찾고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으니, 오… 블로거님들이여.





대만 도착 후 줄곧 지하철만 타고 다니다가 버스에 앉아 도시 풍경을 즐기자니 그제야 여행하는 기분이 났다. 버스에서 책 잘 읽는 사람인 내가 책 꺼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스마트폰은 더더욱.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주어진 시간만큼은 계획하고 생각하는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도시에서 자연으로의 장면 전환을 감상하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치는 바람에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데, 나조차 '걸어서 온천 속으로' 들어가는 일에 현타가 와서 다시금 우리를 구원할 천사표 대만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한 번 현지인의 도움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는, 한국인에게 호감이 많은 중년 부부였다. 덕분에 우리가 내리는 순간까지 특급 친절로 대해주신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렇듯 '대만인들은 친절하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릴 때가 많았고, 이것이야말로 여행 중 발견하는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 복권 당첨만 행운인가? 여행 내내 날씨 좋은 거, 호의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거야말로 복 중의 복이지. 돈은 써버리면 그만이지만, 날씨와 사람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 말이다.





우라이 볼란도 스파는 소문대로 괜찮았다. 수질의 퀄리티까지야 등산 다니며 누렇게 뜬 피부가 뽀얗게 변하지 않는 이상 비전문가가 논할 바는 아니지만, 시설만큼은 어느 정도 돈값을 했다. 작디작은 탈의실에서 대중탕으로 내려가는 길의 고급스러움이 초반 기분을 장악! 정작 실내외 대중탕의 규모가 비교적 작아서 약간의 심심함과 지루함이 따라오기도 했는데, 일주일에 서너 번은 오신다는 대만 사모님(우와, 돈이 많으시군요. 입장료가 저렴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딸이 눈치 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끊임없이 화련 예찬을 펼치는 귀여운 아주머니를 만나 리스닝 훈련으로 시간을 채웠다.



아이들과 재회한 건 제한된 4시간을 꽉 채우고 나서. 더 어렸을 때는 2시간이 한계였던 남아들이 자라 이제는 4시간까지 가능하다니… 감개무량하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물론 휴게실에서 게임한 시간도 다수 포함되었겠지만, 처음 한 시간 반 정도는 본인들이 전세 내고 놀았다며 구체적 활동 사항을 서술하길래 '그럼 프라이빗 온천을 즐긴 셈이네?'하고 내심 흐뭇해하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목욕 한번 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인당 35000원)이라 목욕이 끝난 후에도 머릿속이 덜그럭거리곤 했다.





스린 야시장에 지파이가 있다면 우라이에는 소시지가 있다! 대만에서 가장 호평받는다는 소시지를 먹을 생각에 온천을 나서는 발걸음에 속력이 붙었다. 일단 시원한 맥주를 준비하고, 소시지는 1인당 하나씩. 평소엔 적당히 맛만 보고 절제하는 편이나 소시지는 열외였다. 블로그에서 얻어걸린 얘기일 뿐이지만, 대만에서 가장 맛있는 소시지라니까. '응? 그런데 이거 1등 소시지 맞아? 기대에 못 미치는 식감도 그렇지만 내 입맛엔 달아도 너무 달았다. 오히려 맞은편 가게에서 장인의 손맛이 느껴졌는데, 남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이 얼마나 새로운 선택 기회를 차단하는지 보여주는 뻔한 소시지였다.



가볍게라도 배를 채웠으니 '먹고 움직이자 파'다운 코스로 이동했다. 바로, 우라이 관광의 주전 멤버인 꼬마 기차. 사실 이다지도 관광지스러운 기차는 탈 마음이 없었는데, 제법 속력을 내서 움직이는 기차가 '뻔하지 뭐'에서 '의외로 재밌네?'로 격상하는 순간 잠시나마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폭포는 뭐… 자연의 손길이 아닌, 국가 지정으로 소량 생산해낸 듯한 흔한 폭포이고 말이다. 그렇게 굵고 짧은 관광을 마치고 걸어서 내려오는데, 아무래도 볼란도 스파에서 대만 달러가 아닌, 미화로 카드 결제를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복잡한 숫자 싫어하는 인문계 머리로 착각한 것일 수 있으나, 금액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났기 때문이었다.





3인 일체로 스파까지 왕복하기엔 기동력이 떨어지고, 녀석들은 버스 대기 줄에 합류시켜 놓고 나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다음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그때, 어떤 리조트의 셔틀버스가 손님을 내려주는 걸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다가가 뻔뻔한 부탁을 했다. "시간이 없어요. 볼란도 스파까지 좀 태워주세요. 네?" 보통 사람들이라면 걷거나 택시 탈 법한 상황에서 나는 어쩜 이렇게 외국인 프리미엄을 잘만 활용하는지. 우리 아이들이야 나와 여행 다니며 '될 일은 된다' 정신을 수없이 목격했다만,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인상적이긴 했나 보다. '이게 된다고?'하는 눈빛으로 어느 스파인지 명함 받으려 하는 걸 보면.



기사님 덕분에 무사히 재결제를 하고 서둘러 이동하니, 서두르지 말라고, 타이완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시며 오히려 기다리게 한 나를 안심시켜주셨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일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데, 그럼 또 할아버지 미소로 사양하셨겠지. 타이완 사람들은 모두가 다 친절하다고 하시며. 이렇게나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하루였으면 좋았으련만, 숙소 근처에서 여유롭게 마무리하려던 계획을 뒤집으면서 역대급 환장할 쇼를 펼치고야 말았다. 이연복 셰프가 추천한 새우 만둣집을 찾아가겠다고 나선 길에서 배터리 방전으로 구글맵이 중지되고, 지하철 상가에서 아무리 충전을 부탁해 보아도 거절당하기 일쑤라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가게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각. 마음이 초조해질수록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이야!'하고 혼자 절규하다가 말없이 뒤따르는 아이들을 향해 분노의 질주를 해댔다. 들고 있던 여행책을 바닥으로 내던지면서 왜 그렇게 따라오기만 하냐고. 엄마가 힘들면 너희들이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거 아니냐고. 옆으로 지나가던 사람이 움칫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창피하고 말 것도 없었다. 어차피 뭉개진 기분, 더 망가뜨리고 싶었달까. 그래도 새끼들 밥은 먹여야겠기에 오래 끌지는 않았는데, 동먼역 근처의 식당도 9시면 닫는 곳이 대부분이라 1분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한 집중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다행히 라스트 오더 직전에 식당 진입에 성공해서 최악의 결말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대만 화폐 단위, 그리고 200만 넘으면 비싸 보이는 효과로 먹고 싶은 걸 양껏 주문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했지만 말이다. 대만에 다녀오고 나서 누군가 "여행에서 무엇을 깨달았나요?" 같은, 공자 왈 맹자 왈의 끝판왕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여행이 끝나갈 무렵 몸에 새겨진 확실한 깨달음이 있긴 했다. 이제 아끼는 여행은 그만하고 쓰는 여행을 하자. 돈에서 자유로우면 더 즐겁고 행복할 수 있던 많은 순간들이 돈을 아끼고 따지느라 고행담으로 남았으니, 이 정도면 작고 소중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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