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화지에도 식후경, 을 했으니 이번엔 서점 여행에 나섰다. 건축. 예술, 역사에 대해서는 뭣도 몰라도 100년 된 건물과 서점의 콜라보는 놓칠 수 없는 즐거움.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인 듯하여 현지 상인들에게 묻고, 구글이 답하는 방식으로 서점을 찾았는데, 근처에 다다랐을 때 서점의 아우라를 느끼고는 마음의 준비부터 했다. '아… 설렌다. 설레' 아니,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대만의 한자가 번체자라고는 하지만 내가 이다지도 한자에 까막눈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중국 원서는 네이버 사전의 도움을 받더라도 책 한 권 읽어내는데, 대만 서적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아…. 게다가 책 편집이 세로라고? 일본만 그런 거 아니었어? 덕분에 책 구경하려던 마음은 반쯤 포기하고 독특한 서점 구조를 살피는 건축 기행으로 주제를 전환했다.
이때 즈음엔 나도 조금씩 피로가 누적되었나 보다. 서점 1층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는데, 아동 도서가 진열된 책장 앞에 넓은 마룻바닥이 있어서 아이들 따라 나도 잠시나마 눕고 싶었다. 둘째 녀석이 내 허벅지를 베고 눈 감은 동안 그림책 한 권 보려니 졸음은 쏟아지고, '이대로 하루를 꿀꺽 삼켜버릴까?'하는 나른함마저 몰려들었다. 다음엔 어디로 갈지,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이 조용히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정신줄 잡고 있는 두뇌 한편에서 '이제 엉덩이 떼!'라고 소리친 덕분에 올라왔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었는데, 내 마음은 그저 서점 내 커피숍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눌러앉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여행이고 내가 바라는 여행이었다.
밖으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사람들이 한쪽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 저기가 따다오청이구나. 가까운 거리임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디화지에 한복판에서 바로 연결될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앗싸! 다음 일정 해결!' 하는, 일정 날로 먹겠다는 소리가 마음에 울려 퍼졌다. 그곳은 떠오르는 핫플임을 입증하듯 푸드코트에서 칵테일 마시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농구하는 사람들의 자유로움으로 가득했는데, 생각보다 인파가 많고 혼잡해서 술 생각은 나지 않았다. 코리안 치킨과 떡볶이는 더더욱. 그렇게 사람과 음식 사이를 빠져나와 한적한 곳으로 걷다가 부둣가의 일몰 포인트에 다다랐는데, 머릿속엔 온통 '한강이 더 예쁘네' '좋은데 뭔가 아쉽네'하는 생각만 가득한 내가 노을의 아름다움에 취할 턱이 있나? 아무 감상이나 떠올리지 말고 일단 노을 한번 지켜봐, 하는 명령어를 입력하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따로 정해진 일정이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이들이 서양인 주최 배구 놀이에 끼고 싶어 얼쩡대는 사이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딱히 번득이는 장소는 떠오르지 않고, 전날 스린 야시장에 이어 두 번째 4대 야시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시간이 없어 단 한곳만 방문해야 한다면 랴오허제를 추천한다는 여행서 속 글귀가 인상적으로 남은 곳. 그렇다면, 타이베이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동선의 효율 따위? 처음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그까짓 동선은 계획형 J들이나 가져가버려라 하는 심정으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고? 랴오허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동의 자유가 박탈되더니, 한 줄로 서서 앞뒤 사람과 밀착해 걸어야만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 와중에 타이완 대표 간식인 후추빵을 발견해서 적당히 위를 채우고, 밀크티에 관심 많은 아드님께 차 한잔 바친 뒤로는 마땅한 먹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대왕 오징어볶음, 지파이는 스린에서 먹어봤고, 버섯볶음도 스린 야시장이 더 맛있어 보이고, 고구마 맛탕은… 이처럼 비교 한 방이면 끝나는 즐거움을 비교로 날려버리니, 어서 복잡한 이 시장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가득. 타인의 추천은 타인의 추천일 뿐, 나의 취향과 일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값진 헛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