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아직도 하고 있어요?
나는 언제나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성적을 평가하는 시험에서는 내가 공부한 것보다 1문제만 더 맞히기를 바랐다. 사회에 나가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자소서를 제출할 때면 실수로라도 내 자소서가 통과되기를 간절히 빌었으며, 뜬금없이 길을 걷다 돈을 줍는다든지(?) 아무튼 로또나 주식 같은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소소한 행운이 따르는 인생이 계속되기를 원했다. 사회에 나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면서도 그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축구에 투영되는 건, 골 찬스에서였다. 팀 워크로 움직이는 축구의 경우 팀원들이 각 포지션에 어떻게 포진하는지가 경기를 좌우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승부처에서 내 욕심 하나가 경기의 승패를 가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매끄럽게 경기를 리드하는 주장님과 구슬땀을 흘리며 뛰는 팀원들 사이에서, 내가 한 발 더 뛸 생각보다는 자연스레 골문 앞 어떤 ‘기회’를 기다렸다.
인생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요행을 바라는 순간이면 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야심 찬 기대는 번번이 무너졌다. 1문제를 더 맞히고 싶었던 시험에서는 기대했던 1문제에 1문제를 더 틀려 아쉬운 점수를 맞았고 미치도록 간절했지만 어딘가 부족했던 이력서 지원의 결과는 서류탈락이었다. 우연히 돈을 주운 적도, 로또에 당첨된 적도 없다. 결국 나는 꾸준함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라운드에서의 나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었지만 딱 한 가지 자랑할 만한 것이 있었다. 바로 출석률이었다. 정규 클래스가 있는 수요일에는 웬만하면 약속을 잡지 않고 꼬박꼬박 수업에 나갔다. 정규 수업에는 나 말고도 매번 반가운 얼굴이 보였는데, 바로 우리 팀의 캡틴이었다. 캡틴은 언제나 우리 팀에서 한 골을 더 만들어 내거나(공격 포지션) 한 골을 더 막아내는 사람(수비 포지션)이었다.
우리는 같은 수업에서 같은 것을 배우는데,
나는 왜?
자연스레 그라운드 안에서 주장님의 움직임과 마인드를 좇기 시작했다. 한 골 더 만들어 내는 사람 또는 한 골 더 막아내는 사람과 나의 차이가 궁금했다. 풋살 경력과 기본 운동신경을 차치하고, 내가 본 캡틴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성실하고 차분히, 자기 것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었다. 경기가 끝나면 촬영 영상을 복기하고, 풋살 관련 유튜브를 즐겨보며 주말 아침에는 새벽부터 바지런히 연습을 나가며 축구인들과 꾸준히 교류하는. 다시 말해 축구에 대한 애정을 행동으로 맘껏 표출하는 사람.
이를 깨닫고 나니 신기하게도 풋살에 대한 애정이 조금 더 커졌다. 정확히는 풋살에 가졌던 안일한 마음가짐을 반성하게 되었달까. 내가 그라운드에서 요행을 바랐던 이유는, 풋살을 대하는 마음이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성실함은 자발적으로 택하는 실천. 나에게 '성실'은 '요행'과 반대선상에 있는 단어이다. 풋살에 성실하지 않았던 나는 점점 더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어쨌거나 겉으로 보이는 성실함의 징표들과는 별개로, 성실함은 '성취'가 아니라 차라리 '견딤'에 가까운 개념이다. 가파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의 흐름에서 소외되거나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남다른 열정으로 숨 가쁘게 적응완료하기보다 조금 늦되더라도 시간의 힘을 믿어가며 제대로 나에게 맞는 한 발자국을 신중하게 내딛는다. 휘말리거나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서있기 위해 두 다리로 꿋꿋이 주변의 저항을 견뎌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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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나의 방식대로 삶을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 그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성실함'의 유일한 의미다.
남다른 열정으로 숨 가쁘게 적응완료하기보다 조금 늦되더라도 시간의 힘을 믿어가며 제대로 나에게 맞는 한 발자국을 신중하게 내딛는 것. 이런 태도가 결국 내가 축구에, 넓게는 살아가며 가져야 할 삶에 대한 지향점이 아닐지.
내세울게 열정밖에 없었던 모습을 뒤로하고, 내 성장 속도와 맞는 노력을 다짐하며. 그렇게 요행을 꿈꾸던 나는 요행을 바라지 않는 '성실함'이라는 단어에 한 발짝 다가가 본다.
[다음]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