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여름 바캉스를 가려고 알아보는데 이미 왠만한 이탈리아의 바다는 모두 full book이다. 그럼 다시 산으로 갈까 싶었지만 그래도 여름은 바다 한번은 가줘야지 하는 마음이다. 몇 년전 갔던 크로아티아의 포레치 지역이 생각나 살펴보니 1주일에 1,700유로 가격이다. 이쪽 지역으로 갈거면 좀 더 아래로 내려가보자는 심산으로 찾아보았더니 허름한 리조트 하나 눈에 들어온다. 5일에 850유로 가격대이다. 바다로 바로 내려갈 수 있고 수영장도 있고 조리도 가능하다. 투룸에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 어차피 물놀이하러 가는건데 룸 컨디션이 크게 중요치 않다 싶어 부리나케 예약을 했다. 출발 일주일 전에..
출발 전 날 대충 물놀이 장비며 수영복, 짐가방을 대충 챙겨놓고 기분좋게 잠들었다.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폭포소리에 잠이 깨어 거실에 나가보니 거실 천정에서 비가 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밖은 이미 아비규환이다. 엄청난 바람소리와 함께 엄청난 폭우가 같이 쏟아지고 있어 천정이 다 뚫릴 것같은 기세이다. 온갖 대야를 꺼내고 수건들을 가지고 비 떨어지는 곳에 갖다대고 바닥에 흥건한 빗물을 닦아댄다. 지금 시각이 몇 시인지 보고 싶은데 이런 정전이다. 이런 난리라면 전기가 나가는 것은 당연하지. 한시간 정도 지났을까 빗소리가 잦아들고 바람도 그치는 것 같다. 물의 공포이다. 30분 만에 어떻게 이렇게 물이 찰 수가 있을까 싶다. 쪽잠을 자고 일어나 다음 날 마당을 나가보니 무슨 전쟁통 같다. 마당에 나무들이 쓰러져 있고 군데군데 물이 고여있다. 이 난리 속에 바캉스를 떠나려니 돌아오고나서 내 할 일이 한 가득인 것 같아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예약을 했으니 어쩌겠는가. 떠나야지. 미래의 내가 좀 고생을 하겠지.
400km가 채 되지 않는데 슬로베니아도 살짝 걸쳐져 있고 5시간 30분으로 구글이 말해준다. 자자 어쩄든 떠나보자. 다행히 고속도로는 차가 많지않아 예정시간에 도착했다.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저 그런 평범한 오래된 리조트이다. 대충 짐을 풀고 리조트 내를 산책을 하는데 서향의 아드리아해를 마주하고 있어 석양이 끝내준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 하나 없이 바다가 시야에 있으니 눈은 물론 내 단전 끝까지 다 트이는 것 같다. 바다는 언제봐도 몰입하게 하는 희한한 힘이 있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수평선 저 너머 지는 해를 보고 있자니 새벽의 물난리는 이미 머릿 속에서 사라졌다. 모든 고민도 걱정도 현실도 다 잊게 된다. 아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한참을 바다와 석양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사실 큰 애가 10학년이고 이제 11학년에 올라가기 떄문에 GCSE 준비 때문에 따로 휴가 일정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 큰 애 친구들 대부분이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이탈리아 아이들은 섬과 바다로 장기 휴가를 떠나 밀라노에서 머무는 것이 멋쩍어졌다. 며칠 바다에서 바캉스를 한다고 큰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게다가 한창 놀아야하는 막내가 계속 집에만 있는게 안쓰러웠다. 바다를 보고 큰 애도 마음이 풀어지는지 동생들과 장난도 치고 즐거워한다. 여행은 우리 가족들에게 이런 의미이다. 장난치고 농담하고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것. 평소에 각자 방에서 각자의 시간만 갖고있지만 여행을 오면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으로 변한다. 근사한 호텔을 가지 않아도 집을 떠나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의 본딩타임을 갖게 된다. 이번에도 매일 밤 형이랑 같은 방을 쓰면서 장난치고 얘기하던 막둥이의 얼굴이 말해준다. 여행 잘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