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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OSONO Nov 05. 2023

밀라노에서도 김장을 합니다

  써머타임이 끝나는 10월 마지막 주에 다다르면 밀라노의 가을은 한층 더 춥고 우울해진다. 가을 하늘 높고 공활한데~라는 애국가 3절 가사가 찰떡인 한국의 쾌청한 가을과 달리 밀라노의 가을은 시종일관 비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이다.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지만 연일 내리는 비로 높아진 습도 탓에 으슬으슬한 추위까지. 이래저래 반갑지 않은 계절이다.


 한 줌의 해가 아쉬울 만큼 해가 짧아지고, 찬 기운이 스며들 때면 나는 김치 담글 생각을 하게 된다. 식성이 제일 바뀌기 어렵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해외살이 10년이 훌쩍 넘는 우리 가족도 김치는 식탁의 필수품이다. 갓 담근 김치에 흰 밥만 먹어도 얼마나 맛있는지. 살짝 익은 김치로 끓인 돼지고기 듬뿍 넣은 김치 찌게는 추운 겨울에 제격이다. 이래저래 김치만 몇 통 담궈놓으면 겨울 내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그러니 당장은 번거롭기 짝이 없는 배추와 무를 파는 시장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래도 10년 해외살이 짠밥이라고 이곳에서 토요일 오전에 청과물 도매시장이 일반인들에게 판매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곳에서 배추를 산다. 배추라고 해도 한국의 김장용 배추에 비하면 절반도 안되는 크기이다. 배추라기보다는 얼갈이에 가까운 크기이다. 무 역시 한국의 통통한 형태와 달리 길쭉한 단무지 무 밖에 구할 수가 없다. 그래도 배추, 무 사러 밀라노 차이나타운 야채가게를 휘젓고 다닌던 때에 비하면 얼마나 좋아진건가 싶다.



 토요일 9시, 현금과 장바구니와 휴대용 트롤리를 챙기고 청과물 시장으로 향한다. 이미 주차장은 만석이다. 한국의 새벽시장과 똑같이 부지런히들 흥정을하고 거래를 하는 모습이다. 도매시장이라 낱개로  팔지 않으니 무조건 박스로 사야한다. 많은 인파를 헤치고 오늘의 목표인 배추 두 상자를 샀다. 박스로 사기에는 너무 많은 무 때문에 고민했지만 단돈 5유로뿐이라 그냥 사기로 한다. 운 좋게 지나가던 중국인 부부와 절반씩 나누니 깔끔하다.

 시장에 온 김에 사과, 대봉감도 한 상자씩 사고, 옆 동 수산시장에서 푸른꽃게도 3kg 한 망 산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배추 절이고 김치 담그는 일만 남았다.

 배추를 깨끗이 씻고 소금에 절이고 마늘,양파,배,생강을 다듬고 한국에서 소중하게 들고 온 고춧가루와 액젓에 버무려 양념을 만든다. 찹쌀풀을 쑤고 육수도 끓여 양념 농도를 조절하며 적당히 되직하게 만들어둔다. 절인 배추의 물이 빠진 뒤 배추 하나하나 양념을 정성스럽게 묻힌다. 그렇게 한 시간 쯤 지나니, 4통의 김치가 완성되었다.

 끝나고 나니 양 어깨가 제법 뭉쳤는지 뻐근하고 묵직하다. 그래도 올 겨울 김치 걱정없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테니 뿌듯하다.


 17년의 해외살이는 된장찌개도 끓일 줄 모르던 새댁을 눈대중으로 김치양념을 만드는 주부로 만들었다. 삼십년 익숙한 입맛을 바꾸지 못하니 없는 재료가지고도 한국에서 먹던 음식을 꾸역꾸역 만들어갔다. 사람은 닥치면  하게 된다는 말이 진리임을 끄덕거리게 된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과연 지금 김치를 담글  알고 있을까? 아마 아닐  같다. 엄마가 차려주던 세 끼의 식사가 결코 당연한 것임이 아님을 내가 홀로 해외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하면서 깨닫는다. 이제는 쇼윈도 명품 대신 샛노란 배추속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내 아이들에게 맛있는 김치를 맛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는다. 한국에서 살면 평생 모른 채 살았겠지만, 이곳에서 살면서 하나 둘 깨쳐가는 게 많다. 내 삶을 온전히 내 스스로 영유해간다고나 할까. 내 몸이 다소 고되긴 하지만 말이다.


 쌓여있는 4통의 김치통을 보니 내 스스로가 뿌듯하고 기특하다.

청과물 시장의 모습(좌), 올해의 김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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