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폰 갤러리의 용량이 꽉 차서 저장이 어렵다는 메시지가 떴다. 현재 사진들이 6,000장 넘게 저장되어 있다. 클라우드에 저장되고 있지만, 핸드폰에서 삭제하지 않았던 사진들이 5년 전 사진까지 보였다. 작심하고 사진들을 거꾸로 돌려가며 삭제하기 시작했다.
흐릿한 사진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진들을 미련 없이 휴지통으로 보냈다. 사진을 찍는 순간엔 의미를 부여했던 장면들이 손가락 하나로 버려지고 있다. 지난 연말연시에 나흘 동안 농장에서 작업했던 내용들이 찍혀 있다. 1월의 강추위가 오기 전에 복숭아나무의 보온 작업을 해줘야 해서 신문지로 감싸던 모습, 땅을 파고 거름을 뿌려주던 모습도 보인다. 신문지를 돌돌 말고 중무장한 나무들이 동장군 앞에서도 위풍당당할 수 있도록 갑옷을 입힌 것 같아 든든하다.
그 앞부분에는 텃밭에 양파랑 쪽파가 뿌리를 내리고 튼튼히 자라는 모습도 찍혔다. 가을에는 들깨를 털었고, 반짝반짝 진홍색 송엽국도 빛났고, 토실한 알밤도 주웠다. 온갖 새들이 호밀밭에서 풍족히 먹고 놀았다. 여름엔 큰 장마로 농장 옆 냇가의 물이 넘실거렸고, 텃밭엔 상추와 열무가 푸르고 싱싱했으며 식탁을 풍성하게 해 주었던 오이와 가지도 보인다. 블루베리 나무를 심던 첫봄까지 되짚어갔다. 그 사진들 속에 땀 흘리며 묵묵히 농기계를 든 분주한 가족들이 있다.
남편은 퇴직을 앞두고 평생 꿈이었던 농부가 되겠노라고 선언했다. 농토를 구입하고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설계해 나갔다. 이젠 사회적 의무를 다했으니 여행도 다니고, 산책도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면 좋겠다, 조금은 쉬어가며 살아도 된다고 다소 느긋한 생각을 품고 있던 나는 느닷없이 농부가 되었다.
귀농·귀촌 영농교육을 150시간 이상 수강하고 복숭아나무와 블루베리를 주 작목으로 정해 농장주가 되었다. 올해 초부터 야심 차게 심어서 가꾸었던 블루베리 1,000주가 모두 죽어서 큰 아픔을 겪었다. 완전 초보 농부인 우리는 농업기술센터의 교육과 지도를 받았지만, 5월 초의 폭염과 물 조절에 실패해 피해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우스 안의 나무들이 서서히 죽어갔다. 경험이 일천한 우리가 욕심껏 많은 나무를 관리하다 그렇게 된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자식 같은 나무들을 살려내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한동안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낙담의 나날을 보냈지만, 다행히 복숭아나무가 튼튼히 자라 주어서 힘을 얻게 되었다. 비가림 하우스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로 하고, 블루베리 전용 하우스를 다시 짓고 자동화 시스템으로 설계했다.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만, 경험자들에게 “처음에 시작할 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다음에 보강할 때 비용도 힘도 더 든다”는 조언을 듣고 다시 힘을 내 준비하고 있다.
평생토록 농사일에서 헤어나지 못하시는 엄마 같은 삶은 살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했었는데 농사 한 번 안 지어 본 남편이 농부가 되겠노라고 선언한 이후 복잡했던 내 마음은 농사를 짓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뒤바뀌어 남편보다 내가 더 적극적으로 남편을 채근하고 있다.
연말연시의 강추위 속에 나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흘 연속 농장에서 일을 했다. 온몸이 아프면서도 나무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대비시켜 주었기에 ‘아구구’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와중에도 마음만은 뿌듯해서 웃게 된다. 일 년 내내 계절과 상관없이 농사일하는 가족들 사진은 도저히 버릴 수 없다.
아니, 농장 관련 사진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순간순간 흘렸던 땀방울들도 가슴속에 두기로 한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인생 삼모작을 준비하는 좌충우돌 초보 농군의 이야기, 나무처럼 살고자 농촌에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을 써 보기로 했다. 스마트 폰 속의 버려진 사진들처럼 근심도 사라지고 일상도 가벼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