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mm를 찾아서

by 민휴

비닐하우스 안, 화분에 흙을 채워 블루베리 나무를 심을 계획이다. 며칠 전부터 풀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부직포를 깔고 화분 배치 작업 중이다. 내 역할은 화분에 흙을 채운 뒤쪽에서, 흘린 흙을 쓸어 담아 화분에 넣는 작업이다. 5mm 두께의 흙만 있어도 풀이 난다고 해서 빗자루로 싹싹 쓸어 담았다.

제재소에서 소나무 부산물인 우드칩을 사다가 10개월가량 발효시켰다. 호밀을 심어 갈아엎은 흙과 섞어 만든 블루베리용 흙은 바닥에 그냥 쓸어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나무를 키우기 위한 소임을 다할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버려지면 억울할 것 같았다.

단순한 작업이지만 몇 시간씩 일하다 보니 허리와 팔목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힘들지만, 쏟아져 나온 흙을 보고 있으면 합체해야 할 어떤 것이 해체된 것 같아 깨끗하게 쓸어서 화분에 옮겨 놓아야 마음이 놓였다. 흙이 블루베리 나무를 잘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심정으로 흙 쓸기 작업을 계속했다.

귀농을 결심하고 농장을 오가며 비닐하우스 안에 자그마한 텃밭을 만들었다. 거름과 상토를 섞어서 땅을 파 씨앗이 발아하여 뚫고 나올 수 있도록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 줘야 한다. 새싹이 나오는 일주일 정도 매일 물을 주고, 그 후부터 이삼일에 한 번씩 물을 줬다.

씨앗은 힘이 세다는 말처럼 자그마한 씨앗들이 흙을 뚫고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설레는 일이다. 지구를 뚫고 올라오는 그들의 안간힘은 대단하다. 초록으로 변해가는 잎들에 물을 줄 때가 제일 행복하다. 맑은 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채소들은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을 거는 듯 싱그러운 에너지를 준다.

상추와 열무는 된장만 있어도 푸짐한 밥상이 된다. 여름엔 열무김치를 담그느라 바빴지만 맛있게 먹어주니 보람이었다. 텃밭에 물을 주러 갈 때마다 갖가지 채소를 수확해서 돌아오는 즐거움은 단순한 먹거리의 해결이라는 차원을 넘어 내 손으로 길러낸 채소라는 자부심이 컸다. 텃밭 덕분에 지인들과 채소를 나눠 먹으며 기부 천사가 되었다.

그중에서 아욱은 국물을 좋아하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했다. 파종 시기에 따라 봄부터 가을까지 먹을 수 있다. 아욱을 다듬어서 소금을 넣고 초록 물이 나올 때까지 바락바락 주물러 두세 번 씻는다. 다시마와 멸치, 양파를 우려낸 물에 맛있기로 소문난 친정엄마 표 된장과 쌀가루, 아욱이랑 궁합이 최고라는 건새우를 넣고 끓이다가 아욱을 넣어 끓이면 구수한 아욱 된장국이 된다.

어느 날, 미처 수확하지 못한 아욱에 꽃이 피었다. 마트나 시장에서 아욱을 사 먹어 보기만 했지 처음 길러 보는 터라 아욱꽃도 처음 보았다. 앙증맞은 아욱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하얀색 둘레와 가운데 박힌 연노랑 꽃술까지 정말 예뻐서 친정엄마께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텃밭에 아욱꽃이 피었는데 진짜 예뻐요. 엄마도 아시지요?”

엄마는 아욱꽃을 자세히는 모르겠다고 하셨다. 세상 만물박사인 엄마가 아욱꽃을 모르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 어떻게 아욱꽃을 모르실 수가 있어요? 비닐하우스에 아욱 심으셨잖아요?”

엄마는 잠시 조용히 계시더니 말씀하셨다.

“옛날부터 아욱을 키우기는 했었지만, 열두 식구 해 먹이느라고 언제 꽃 볼 겨를이 있었겠냐?”

아차차! 나는 또 이렇게 속이 없는 딸이다. 대가족을 건사하시는 엄마가 식구들 먹을 것을 준비하시려면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땅에서 나는 온갖 작물을 엄마 손으로 다 길러서 식구들을 먹였을 것이다. 아욱이 꽃 필 때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철없는 생각을 한 것이 부끄러웠다.

엄마의 5mm의 설움을 건드린 것 같아 너무 죄송했다. 늘 농사일로 바쁘면서도 친정집 골목엔 꽃들이 먼저 반긴다. 개나리랑 남천, 장미, 사랑초까지, 마당 한쪽엔 화분들이 꽃을 한가득 안고 있다. 팔순의 친정엄마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젊은 날엔 꽃 키우는 호사를 누려보지 못하셨다. 아욱꽃 꽃말을 찾아보니 '은혜, 자애,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아욱꽃이 친정엄마 같은꽃 이었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살지만, 예쁜꽃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아욱꽃을 못 보셨다고 해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드렸다. 신기하다며 아욱꽃이 이렇게 예쁜 줄 처음 알았다고 아이처럼 좋아하신다.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5mm까지 소중하게 볼 줄 아는 그런 사람. 함께 아파하고 함께 나누고 다독일 줄 아는 사람 말이다. 버려진 흙에서 풀이 나듯이 나누고 다독이는 마음에서 사랑을 꽃피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