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Puerto Escondido 바다거북 방사 프로그램
멕시코에서 얻은 첫 직장에 퇴사를 통보한 날, 일말의 섭섭함이나 아쉬움 없이 통쾌함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그리웠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계 여행자인 친구는 멕시코를 일주하고 있었기에,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리로 가겠다고.
그는 와하까(Oaxaca)를 거쳐 바다로 갈 예정이니, 그곳에서 보자고 전했다. 생전 처음 들어 본 해변 도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Puerto Escondido)는 ‘숨겨진 항구'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름마저 비밀스러운 그 바다를 마주하기 위해, 마지막 근무를 마치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흰 모래사장 위로 부드럽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파도가 부서지는 칸쿤과 달리, 멕시코 남서부에 위치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의 해변은 정글을 연상시키는 야생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래와 짙푸른 파도를 이빨처럼 드러내는 바다, 듬성듬성 거칠게 자란 야자수 사이사이를 능청스럽게 지나다니는 거대한 이구아나들.
피부가 오렌지빛으로 그을은 휴양객들은 비치타월 위에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즐기고, 가족 또는 친구들과 방문한 이들은 파도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노천 바에서 레몬과 소금을 바른 코로나 맥주를 들이켠다.
서퍼들의 블랙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파도가 온화한 멕시코 동부 카리브해 연안과 달리, 북대평양에 맞닿은 서부 해안은 서핑 명소로 유명하다. 우연히 이곳을 찾은 세계의 서퍼들이 비현실적인 풍경과 저렴한 물가에 반해, 몇 개월이고 눌러앉아 착한 가격에 퍼스널 서핑 강좌를 연다고 한다.
서핑을 여유롭게, 하지만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이라면 몇 주간 다양한 국적의 룸메이트들과 합숙하며 낮에 서핑을 배우고 저녁에는 파티를 즐기는 캠핑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좋을 듯하다.
수영은커녕 물에 뜨지도 못하는 필자는, 이곳에 묵는 닷새간 서핑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을뿐더러 바다에 두어 번 들어가는 데 그쳤다. 내게 바다란 거대한 풍경화를 보듯 멀리 두고 눈으로만 즐기고 싶은 존재이기에...
매일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해변을 맨발로 누비다 아무 노천 바에 앉는 것이었다. 신선하다 못해 갓 잡아 올린 듯한 해산물을 세비체(레몬즙으로 살을 익힌 생선회), 알 아히요(마늘을 넣은 기름에 자글자글 끓이는 요리법), 필레떼(생선살 구이) 등 갖가지 방법으로 원 없이 먹고 맥주와 마르가리따에 취한 채 시에스타를 가지면 그때만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에서 그쳤다면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는 파도와 술, 해산물을 여한 없이 즐길 수 있는 휴양지로 기억되었겠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이에게 더욱 뜻깊고 따뜻한 경험을 선물하는 이벤트가 있다. 매일 해질녘,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바다거북 방생 프로그램이 개최된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거북 방생 캠프
(Liberación de tortugas)
와하까 지역 출신의 멤버들이 2011년 설립한 NGO인 'Vive Mar'는 지역 생태계와 문화 보존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그 일환으로, 매일 오후 다섯 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의 대표 해변 중 하나인 바코초(Playa Bacocho)에서 바다거북을 알에서 부화시켜 바다로 방생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바다거북은 성체가 되기 전, 특히 알에서 부화한 직후 바다로 향하며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때문에 Vive Mar는 바다거북의 산란기에 조심스럽게 알을 채취해, 일곱 종의 거북을 직접 부화시켜 안전하게 바다에 풀어주는 활동을 펼친다.
행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관광객들에게 기부금 명목의 소정의 금액을 받고, 지역 환경보호 관련 짧은 교육을 진행한 후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성인의 엄지손가락 크기에 불과한 거북은 너무나 여려, 사람의 체온에 화상을 입을 수 있기에 절대 손대지 않고 매끈한 코코넛 바가지로 조심스레 옮겨야 한다.
받아 들자마자 '어떡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갓 태어난 바다거북은 상상 이상으로 작디작았다. 잘못 건들면 바스러질 듯한 생명체는, 이 세상이 익숙지 않음에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바다를 향해 날개 같은 다리를 쉼 없이 파닥였다.
햇빛이 온화해질 무렵,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바다를 십 미터 가량 앞둔 모래사장에 일렬로 앉아 본인이 맡은 거북을 살며시 놓아준다. 누가 경로를 알려주지 않아도 묵묵하게 파도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거북들.
좋은 취지로 참여하는 캠페인이기 때문에, 거북이 무사히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을 보면 마냥 뿌듯하고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거북들이 파도에 휩쓸려 물속으로 유유히 떠나는 모습을 보니, 이 작은 아이들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많은 위험들이 그려져 마음이 울렁거렸다.
응당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다는 듯 힘차게 바다로 향하는 거북들과 달리, 여행 이후의 삶을 설계하지 않은 채 편도 표만 끊고 무작정 떠나온 나.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났으니 매 순간 매 시간을 즐겨야 마땅할 백수 여행객 신분이었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막막한 마음에 눈앞의 풍경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오히려 새로운 시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부터 밤낮으로 이력서를 다듬고 면접을 준비해, 퇴사 후 3주도 되지 않아 더욱 좋은 환경과 직무의 일을 얻을 수 있었다.
경로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발길 가는 곳이 길이고 손 닿는 곳이 지도가 되었던 나의 멕시코 정착기.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의 잘 달궈진 모래사장을 거닐며 멕시코시티에서의 시작을 다짐했던 나는, 여행으로부터 한 달 뒤 몬테레이에서 멕시코시티로 이사해 Product Manager로서 경력을 쌓았다. 시간이 흘러, 이제 멕시코가 아닌 새로운 땅에서의 발돋움을 앞두고 있다.
멕시코시티로 이주한 후에도, 거대한 파도에 표류하는 듯한 불안정함에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다만 슬픔이 나를 짓누를 때면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서의 꿈결 같은 시간을 알사탕처럼 입 속에서 굴리며 그 달콤한 그리움으로 하루를 버티곤 했다.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고는 할 수 없으나, 순간순간 유리알처럼 빛나는 기억들이 가득하기에 더더욱 소중한 멕시코에서의 일 년 반. 라이트룸 스크롤을 올리다 우연히 발견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를 회상하며 멕시코 인생 소도시 포스팅을 마친다.
▽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Vive Mar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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