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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덕 Aug 22. 2022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그날, 부산의 기록(3): 하지 못한 말

비가 갑자기 무지 내렸다.


갑자기. 그냥. 불쑥. 세 단어를 품고 시작한 여행이어서였나. 갑자기 불쑥 그냥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아침이었다. 그래서였나. 먼저 연락이 오는 법이 잘 없는 사람에게서 '진짜 많이'로 시작하는 톡을 받았다. 비가 와서 조금은 걱정에 잠기려다 덕분에 또 얼마간을 웃었다. 참 다양한 인연을 운 좋게도 맺은 내게도 이 하나의 인연은 낯설고 조심스럽고 또 마냥 좋기만 한 요상한 존재다.


삼일 내내 지하철 다 놓친 운 다 여기다 써달라고 쏟아지는 비에다 억지를 부려서였을까. 마법처럼 약속시간에 비가 사그라들었다.


버스를 타고 그 유명한 구프 앞을 지나쳐 조금 들어가서 있던 식당. 창문 밖에 조금만 비쳐오는 모습인데도 바로 알아봤다. 내 요상하고 특별한, 연이 되어주는 사람이라 그랬는지도. 금방 정리된 자리에 앉아 가만히 얼굴을 보는데 어떻게 이렇게 계속 만나지 싶어져서 새삼 신기했다.


식당을 나서고 이내 다시 오기 시작한 비에 우산을 나눠 쓰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서 찾은 카페. 과감히 아이스크림 크로플과 최근에서야 마시기 시작한 커피를 시켰다. 아메리카노는 못 시켜도 시그니처는 포기 못했기에 모카를 시켰는데 지나고 보니 그 카페 샷이 꽤 들어갔던 거 같다. 카페인 덕에 조금 어지러워서 나중에 고생했으니. 이 카페인이 아쉬움을 가져올 줄도 모르고 마냥 즐겁게 다 마셔버렸다.


아이스크림 크로플 위에 잔뜩 얹힌 브라운 치즈만 맛보고는 '이거 짠... 아니 쓴 치즈인데?' 하는 심각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치즈만 입에 넣고는 '이건... 짠 치즈야.' 했는데 생각해보니 누가 우리 둘을 봤으면 이상하게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근데 뭐. 아무렴 어떤가. 우리만 즐거우면 그만인 거지. 진지하게 취업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크로플을 자르려다 실패한 나 대신 칼을 쥐고 잘라주기도 하면서 웃기도 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비가 멎을 것 같지 않아서 무작정 노래방으로 나섰는데 전에 같이 왔었던 기억이 나서 꽤 즐겁다가 비가 너무 와서 금세 지웠다. 넓지 않은 3번 방. 너 하고 싶은 거 다 예약해. 내가 불러줄게. 하는 귓속말이 설렜다. 나 이거 잘 몰라. 한 마디에 근데 왜 예약했어 하면서도 다 불러주 마주치는 눈빛이 좋았다. 같은 노래 취향, 내가 부르는 노래를 금방 따라 부르며 즐거워하는 목소리. 마냥 즐거웠다. 렌즈를 빼고 흐린 눈으로 힐끔 옆모습을 훔쳐보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괜히 잔망 부리다 눈이 마주쳐서 동시에 웃음이 터진 건 아마 잊긴 힘들 거 같다. 눈 마주치면 게임 끝이지. 어 수 없어 태생인걸 하며 웃 나를 내가 볼 수 없어 다행지도. 좋다는 말 빼고 그 순간을 수식할 말이 있을까. 노래방도 비도 좋았지만 같이 있는 사람으로 인해 그 시간은 가득 빛났고, 가득히 좋았다.


저녁시간이 지나버리고 애매한 시간이 되어버려서 괜히 보내줄 생각도 없으면서 '이제 가야 되나?'하고 물으니까 '집에 못 가겠는데' 하기에. 옷이 불편하니 사러 가자고 붙잡았다. 저녁을 먹으러 갔어야 했나 했지만 카페인이 나를 괴롭혔기에 뭘 먹을 엄두가 안 났다.


아까 지나친 만화카페를 가볼걸. 비가 여전히 많이 오는구나 등등 생각에 잠기다 보니 피곤해 보인 건지 집에 배웅해주겠다고 했다. 괜히 아쉬워서 지하에 있는 액세서리를 구경했는데 둘 다 귀를 안 뚫어서 볼 게 없어 괜히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같이 있을 시간을 더 길게 끌진 못했다. 나 좋자고 너무 오래 붙잡는 거 같아 순순히 가면서도 걸음 속도를 늦추는 이상한 짓도 했다. 출구까지 데려다주고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 잘 보고 가라는 말로 배웅하던 모습이 여행을 되새기는 지금까지 생생하다. 서울에 놀러 오라는 말을 진심을 듬뿍 담아 남기긴 했어도 다시 언제 보지 싶어서 좀 서펐다.


작은 비밀을 말하자면, 집에 들어가다 우산에 구멍이 뚫렸던 건지 결국은 온통 젖었는데도 잘 들어왔다고 연락해줘야 걱정을 안 한다며 톡을 먼저 보내려다 살짝 혼나기도 했다는 사실 하나.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솔직한 내가 되어보기였으니까. 또 그런 거 치고 얼굴 보고도 '보고 싶었어, 보니까 좋다' 이 한 마디를 못해서 아쉬웠기도 하고.


그렇게 밤을 보내고 정신없이 기차를 타고 돌아오고 오늘에야 글을 쓴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쓰게 될 줄이야. 보고 싶었고 보고 싶었던 걸 봐서 좋았으니 그냥 그걸로 되었던 5일간의 여행 이야기 여기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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