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떨어지다.
마침내 이 글이 종점을 향해간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 이야기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왜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는지 그게 궁금하였다.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육군본부가 있었고 주요 병참 기지였으며 군사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런데 왜 두 번째 목표지가 나가사키였을까?
나가사키에서 가장 큰 원폭 피해를 입은 곳이 우라카미 강을 따라가는 우라카미 계곡이었다. 앞에서 우라카미 계곡에는 기리시탄들이 숨어 살며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원자폭탄이 우라카미 성당 가까운 것에서 폭발하여 우라카미의 기리시탄 신자 8,500명이 사망했다. 우라카미 신자들이야말로 250년을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왜 이런 비극이 벌어진 것일까? 과연 하느님의 섭리는 있는 것일까?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은 서구의 여러 제도 중에서 좋아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도입했다.
해군은 영국의 모델을 따왔고 교육제도는 프러시아 방식을 도입했다. 막부의 엘리트계급으로서 일본 사회를 이끌어 왔던 사무라이들은 새로 조직된 육군과 해군에서 장교와 제독이 되었고 일부 사무라이들은 유력한 정치가, 실업가 그리고 재계의 거물이 되었다. 여전히 사무라이들이 일본 사회를 이끄는 주류 집단이었다.
서양으로부터 새로운 제도와 학문을 열심히 익히던 일본은 점차 ‘식민지 약탈’이라는 서양 흉내에 가담할 태세를 갖추었다. 자기들이 서방세력과 동등한 힘을 기르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들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아시아제국을 식민지화하며 일본 제국의 영토 확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여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을 넘어 인도로 가겠다는 꿈과 유사하게 허황하였다. 그러나 사무라이 나라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꾸었던 허황한 꿈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번에도 제1의 희생양은 우리나라였다. 일본은 대한제국과 만주를 삼키고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촉수를 뻗치더니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세계대전에 뛰어들게 되었다.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벌이던 미국은 일본인들의 가미가제식 옥쇄나 집단자살 방식에 당황했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함락하는데 3개월이 걸렸고 미군 12,500명이 전사했다.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일본군인들이 전원 옥쇄했을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에게까지 옥쇄명령을 내려 주민 12만 명이 사망한 사실이었다. 미국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일본식 항전 의지에 질려가고 있었다. 이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항복을 위하여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1945년 미군 B29 폭격기는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한데 이어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탄 '팻 맨(fat man)'을 투하하였다. 세계 최초로 위용을 드러낸 원자탄의 모습은 세계인들을 아연케 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였다. 일본의 두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전체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일본 내 원자 폭탄 투하 목표 후보 지점으로 정한 도시는 당초 6곳으로써 교토, 히로시마(AA급 표적), 고쿠라, 요코하마(A급 표적), 니가타(B급 표적), 도쿄의 황궁(등급 외)이었다(5월 11일). 그러다 7월의 2차 회의에서 추가로 나가사키가 후보지에 올랐다. 나가사키가 후보지로 오른 데에는 미쓰비시의 대규모 조선소를 위시하여 7개의 군수공장이 나가사키에 있다는 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에서 제조되는 어뢰는 미국 해군을 괴롭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히로시마는 조슈 번 번주였던 모리 가문의 근거지이며, 나가사키는 메이지 유신의 배후였던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본거지였다는 점이다. 조슈번과 사쓰마 번이 중심이 되어 글로버의 무기 지원으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음은 앞에서(구라바엔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두 번(藩)은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는 명분으로 천황을 앞세웠지만 이후 메이지 천황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실제적으로는 일본의 권력을 자기들이 장악하였다. 조슈 번 출신들이 일본 육군을 장악했다면 사쓰마 번 출신들이 해군을 장악했다. 사실상 일본이 세계대전으로 뛰어든 것은 군국주의자들의 욕심 때문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은 이 점을 날카롭게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들어 미국이 최후로 후보지로 정한 도시는 히로시마와 고쿠라였다. 히로시마는 대규모 산업도시며 중요 군사 거점이었다. 일본 영토 남쪽 전체 방어를 지휘하는 제2 육군 사령부가 설치돼 있었으며 병사들의 승선 지점이었다. 그리고 일본 최대 군사항구인 구레항에 인접해 물자와 부품을 공급하는 배후공업도시였다. 그래서 히로시마는 AA급 표적이었다.
고쿠라는 규슈와 인접한 도시로서, 일본 최대의 군수품 제조 시설 중 한 곳이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8월 9일 아침, 팻맨을 실은 B-29가 고쿠라에 다다랐을 때 고쿠라에는 구름이 짙게 깔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초기의 핵폭탄들은 크고 무거웠다. ‘리틀 보이’의 무게는 무려 4.4톤이었고 ‘팻 맨’은 4.6톤에 달했다. 무겁다는 것은 연료 소모도 많다는 것을 뜻한다. 도시 상공을 3회 배회한 소령은 보조 가솔린 파이프가 막혀 연료가 부족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즉시 제2의 목표지점인 나가사키를 향해 기수를 남서쪽으로 돌렸다.
그리하여 ‘팻 맨’은 일본 현지 시각 11시 02분, 나가사키 약간 북쪽에 있는 미쓰비시-우라카미 어뢰제작공장 위에 투하되었다. 폭탄은 도시 위 상공 439 미터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인구 20만의 도시에서 7만 명이 죽고 많은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쓰비시-우라카미 어뢰 제작공장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가사키의 원폭 낙하 중심지 지도를 보면 우라카미 계곡을 중심으로 우라카미 강이 이어져있고 이 강의 양 옆으로 미쓰비씨 공장 일곱 곳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최대 피해를 입은 우라카미 천주당과 천주당 건너편에 나가사키 의과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우라카미 계곡에 있던 모든 것들이 날아갔다.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B-29가 거대한 폭탄을 토해내는 순간 1분쯤 지나자 무시무시한 빛이 번쩍이더니 온천지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고 한다. 이어서 거대한 연기 기둥이 위로 치솟았고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면서 집이며 건물이며 나무들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고막을 찢는듯한 폭음과 함께 온갖 사물이 날아갔는데 풀 한 포기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폭심지 가까이에 있던 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살가죽이 벗겨지면서 꺽꺽대는 소리를 내었는데 그것은 ‘물, 물’이라는 소리였다는 것이었다.
폭발반경은 약 1-2 킬로미터로 측정됐고 폭심지에서 1킬로미터 안에 있는 모든 건물지붕은 녹여 내렸다. 4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의 피부는 즉시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고 3, 4킬로미터 안에 있는 전신주나 나무, 집들은 새카만 숯으로 변해버렸다. 이어서 화재가 북쪽에서 남쪽까지 3킬로미터 정도로 퍼졌다.
폭발지점에는 순식간에 섭씨 3,900도의 열이 달아올랐으며 초속 2킬로미터의 초고속 강풍이 일어나 집이란 집은 모조리 쓸어버렸다. 이것이 폭심지를 진공상태로 만들면서 또 다른 역풍이 불어왔다. 먼지 흙 파편 연기 같은 것이 날아드는데 이 때문에 버섯구름의 색이 검게 보였다. 구름 아래 지역은 어둠 속에 갇혔다. 버섯구름에서 연달아 섬광이 번쩍이더니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나면서 이어서 세찬 바람이 몰아쳐왔다.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로 인해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인구 24만 명 중 73,884명이 사망하고 74,909명이 피폭되어 고통받았다. 그중 절반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당일에 화를 당했다.
나가사키를 방문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가사키는 평지보다 언덕이 많은 도시이다. 나가사키의 주요 부분은 언덕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고 또 나가사키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그나마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점은 다행이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원폭피해를 다룬 보고서인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책에서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60%가 섬광화상으로, 30%가 건물 잔해물로, 10%가 기타 원인으로 죽었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이 최단기에 가장 많은 시민을 죽였다고 평가하였고 15%에서 20%가 피폭으로, 20%에서 30%가 섬광화상으로, 50%에서 60%가 질병과 부상으로 죽었다고 분석했다.
우라카미 지역에서 가장 피해를 크게 입은 곳은 우라카미천주당이었다. 천주당의 500미터 상공에서 폭탄이 폭발했기 때문에 성당은 일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마침 8월 15일이 성모승천기념일이었으므로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위해 성전에 모여있었다. 이들 12,000명의 신자 중 8,500명이 희생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라카미의 4번째 박해(우라카미 4 쿠즈레)에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우라카미 신자들은 맨손으로 성당 건설에 나섰다. 그리하여 5천 명의 신자가 한꺼번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동양최대의 거대한 벽돌 성당을 세우며 기뻐한 것이 불과 30년 전이었다.
성당에는 두 개의 종탑이 있어 하루 세 번 울리는 삼종기도의 종소리는 우라카미 마을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이 종탑도 무너졌다. 우라카미천주당의 신자들의 마음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우라카미 신자들은 또다시 성당 재건에 나섰다. 이에 앞장선 사람이 나가이 다카시 박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움막의 최저생활을 견디면서도 제일 먼저 성전을 지었다. 어떤 산을 소유한 독지가가 나무를 아낌없이 희사하겠다고 나섰다.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나서서 벌목한 나무를 운반하고 나무를 자르고 고르고 다듬어서 교회를 지었다. 이리하여 우라카미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공공건물이 우라카미 성당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교회는 다시 건축 계획을 세웠다. 신자들의 모금 및 해외모금 등을 합쳐 1958년 콘크리트조의 성당 건립에 착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년 반이 경과한 1959년 10월에 현재의 새 성전이 완공되었다.
이곳은 1962년 이래 가톨릭 나가사키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며 신도수는 약 7천 명으로 건물 및 신도 수 모두 일본 최대이다.
나가사키 시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 폭심지에 나가사키 평화공원을 만들었다(1955년).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공간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히로시마의 평화공원이 워낙 강조되다 보니 나가사키의 평화공원은 인지도에서 약간 떨어지는 감은 있지만 그러나 이곳은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꼭 둘러보아야 하는 곳이라고 여겨진다
평화공원 주변은 평화공원과 원폭낙하중심지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의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먼저 평화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화공원은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트가 있는 입구 옆에 큰 녹나무가 지키고 있었다.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평화분수대가 보인다. 원폭피해자들이 극심한 탈수증세로 죽어가면서 '물, 물'을 계속 찾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24시간 물이 품어져 나온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분수가 이곳에 있는 분수라고 생각되었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가사키 형무소 우라카미 형무소터가 있다. 폭심지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건물이었다고 한다. 원폭이 떨어졌을 때 이곳에서 18명의 직원, 관사 거주자 35명, 수용자 81명(중국인 32명, 최소 13명의 조선인) 등 134명이 즉사하였다는 슬픈 곳이다. 지금 이곳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제비꽃만 가득 피어 있었다.
공원 맨 안쪽에는 거대한 남자 모습의 푸른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1955년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가 제작한 <평화기념상(平和祈念像)>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 남성의 오른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얼굴은 전쟁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였다고 한다. 강인한 남성의 건강미를 나타내되 이 남성은 인종을 초월한 인간, 때로는 부처, 때로는 신의 모습을 가진 인류 최고의 희망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이 푸른 거대 동상에서는 괴이함만 느껴질 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초인, 부처, 신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기타무라 세이보씨! 안목이 없어 미안해요.
원폭자료관은 나가사키 원폭이 발생한 당일의 상황과 이후 피해 참상을 유해와 물건, 사진과 비디오 등 다양한 자료와 기록으로 보여준다. 이곳에는 원폭 투하 시각인 11시 2분에 멈춰진 벽시계가 보인다. 전시는 다리가 휘어진 급수 탱크, 무너져 버린 예배당, 열에 의해 녹아내린 유리병과 사람의 뼈, 완전히 폐허가 된 거리, 방사선의 영향으로 비정상적으로 변한 신체 등 끔찍한 피해 실상을 보여 준다. 그 외에는 도시 재건 과정과 핵무기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평화공원을 나와 길 하나를 건너가면 원폭낙하 중심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나가사키 원자폭탄피해구역도가 걸려있다. 다행히 폭발은 우라카미 계곡에서 한정되어 일어나 나가사키의 주요 부분은 보호를 받았다. 원폭낙하중심지 공원에는 당시 파괴된 우라카미 교회의 콘크리트 벽 일부가 남아있다. 5천 명 규모의 거대 성당이 일시에 무너지고 뼈대 일부만 남아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비감과 함께 원폭의 위력에 몸서리치게 한다. 이 뼈대는 한순간에 사라져 간 우라카미 신자들의 비명을 간직한 듯 보인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강제징용으로 나가사키에 끌려간 한국인들도 1만 명이 사망하고 1만 명이 피폭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원폭기념관 가는 길 모퉁이에 원폭으로 희생된 한국인을 기념하는 희생탑이 조촐하게 세워져 있다. 물을 찾아 헤매던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가 계속 물을 놓아 둔다고 한다. 역시 슬픈 곳이다. 그 억울한 원혼들을 위하여 잠시 묵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