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여기당(如己堂)에서

나가이 다카시 박사를 추모하며

by 보현



나가사키 성지순례의 여정은 여기당(如己堂)에서 끝이 났다. 여기당은 ‘나가사키의 간디’라고 칭송되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죽기 전까지 머물렀던 작은 집이다. 이곳에서 나가이 박사는 그의 위대한 책들을 집필하였다.

나는 나가사키로의 성지순례에 앞서 나가이 박사의 전기를 몇 권 읽었기 때문에 꼭 여기당에 가고 깊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시작한 나의 나가사키 순례가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여기당에서 끝을 맺을 수 있어 나로서는 의미 깊은 여정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의 피해자로서 고통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그 고통조차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 더욱 닥아가게 만드는 축복이라는 다카시 박사의 말을 마음에 새기며 그동안 읽은 몇 권의 책 내용을 발췌하여 그의 일생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교수이자 의사였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은 우라카미 성당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어 원폭의 피해를 어느 곳보다 크게 받았다. 다카시 박사도 원폭에 피폭되어 원자병으로 힘든 인생을 살았다. 게다가 그의 전공이 방사선학이어서 방사선조사의 피해도 함께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일본에 만연하던 폐결핵 환자를 찾아내고 후학들에게 방사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동분서주한 사람이었다.


나가이가 방사선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그는 1932년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런데 졸업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그가 심한 중이염으로 갑자기 쓰러졌는데 알고 보니 뇌막염이었다. 수술 후 간신히 회복되기는 했으나 오른쪽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당시는 청진기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판별하던 시대여서 청력을 잃는다는 것은 의사로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할 수 없이 그는 그 당시 막 일본에 도입되기 시작한 방사선과로 전공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방사선과는 아직 유럽에서도 새로운 의학분야였으므로 일본에서는 설비나 지식이 많이 모자랐다. 방사선에 대한 보호장치가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여서 전문가들도 방사선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희생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에는 당시 결핵환자가 많았다. 따라서 방사선과의 역할은 중요했다. 나가이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나가이 박사도 방사선에 과다노출되어 백혈병에 걸리게 되었다. 2, 3년의 잔여 수명을 선고받았을 때,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은 폭심지에서 700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폭심지 근처의 건물들이 다 사라졌지만, 나가사키 의과대학 병원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 일부는 남았다. 이 폭격으로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환자와 직원 80%가 목숨을 잃었다.


나가이도 유리 파편 더미에 묻혔는데, 유리 파편이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 동맥을 절단하여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가 젖 먹던 힘을 내어 “살려달라”라고 외쳤을 때 저쪽 벽 뒤에 살아남아 있던 간호사 한 명이 살아남은 직원 5명을 데리고 나가이 박사 방으로 달려갔다. 모두들 침착하게 유리 파편 더미에서 나가이 박사를 구해내었다.

그때 병원 전체가 불타기 시작했다. 나가이와 직원들이 병동으로 달려가서 병동에 남아있는 입원환자들을 구하여 더 높은 산으로 옮겼다.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폭풍에 날아가버리고 벌거숭이의 몸에서는 피부가 분리되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기어 오며 물을 달라고 외쳤다. 살아남은 병원사람들도 공포에 빠져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나가이가 흰 천에 자신의 머리에서 쏟아진 피와 다른 이들의 피를 모아 국기를 만들어 세웠다. 임시 야전병원이 생긴 것이었다.

아무런 장비나 시설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의료진들은 환자의 몸에 박힌 유리파편이나 나무조각 같은 것을 빼주고 소독약을 발라주며 계곡에서 물을 길어와 환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 아비규환에서 살아남은 환자들이 병원으로 계속 밀려들었다. 나가이 박사는 환자들을 대피시키고 돌보는 일에 몰두하다 원자폭탄이 터지고 사흘째에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집에 남아있던 아내 미도리가 걱정되어 마음이 탔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아내가 이미 죽었다고 예감하고 있었다. 아내가 살아있다면 틀림없이 병원으로 자기를 찾아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내 미도리

나가이 박사의 아내 미도리는 나가이가 의과대학을 다닐 때 하숙을 했던 집 딸이었다. 그 하숙집을 구하게 된 배경도 기이하였다. 나가이는 고교시절은 물론 의과대학을 다닐 때에도 자연과학을 믿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일본인들이 믿는 신도(神道)도 서양 신도 그는 경멸하였다.


나기이의 실가는 시마네현(히로시마의 북동쪽)의 오지였다. 아버지는 성품이 강인한 의사였고 어머니는 자애로운 여성이었다. 그가 의과대학을 다닐 때 하루 세 번씩 울리는 우라카미천주당의 삼종기도의 종소리를 들었다. 성당은 나가사키 의과대학에서 북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무신론자인 그에게 하루 세 번씩 울리는 성당 종소리는 시끄러웠고 짜증스러웠다.


이런 나가이를 본질적으로 바꾸게 된 사건은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1931년 나가니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기 전 해에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가이는 어머니와의 이별이 너무 슬펐지만 이상하게 어머니의 영혼이 살아서 자기 곁에 머무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후 그는 영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파스칼의 <팡세>를 꺼내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파스칼이 말하는 은총이나 구원 같은 어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팡세>를 읽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파스칼이 절대 진리라고 일컫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알고 싶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그 길을 찾아 그가 취한 방법은 그 근방의 기독교 가정을 찾아 하숙을 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섭리가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가이가 하숙을 구했던 집은 오랫동안(300년 동안) 그리스도를 믿어온 숨은 기리시탄 집안이었다. 그것도 숨은 조직의 우두머리인 초카타 집안이었다.

우라카미는 나가사키 북부에 위치한 조그만 우라카미 강이 나가사키 만으로 흘러드는 험한 골짜기에 있었다. 오지에 속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들어와 몰래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오우라천주당을 찾아가 쁘띠장 신부를 놀라게 한 부인들이 바로 이 우라카미 신자들이었다. 2세기 반동안 그리스도인의 비밀본부였던 그 집안으로 나가이가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1933년 나가이는 중국 전선으로 소환되었다. 미도리는 나가이가 중국전선으로 떠나던 날 그에게 두툼한 털스웨터를 선물하며 “선생님의 무사귀환을 위해 매일 기도하겠어요”라고 하였다. 나가이는 군대의 잔혹성이 그를 깊은 고뇌에 빠뜨릴 때마다, 전선에서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미도리의 약속을 생각했다.

그가 중국전선에서 돌아오자 곧장 미도리를 찾아갔고 그 후 미도리와 결혼하였다. 전쟁 중이었지만 짧은 행복을 누린 시기였다. 그동안 아들 마코토(1935년)와 딸 이쿠코(1937년)가 태어났다.


나가이는 미도리를 찾아 집으로 향했다. 깨어진 기왓장과 재 밖에 없는 곳에서 그들의 집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타다만 검은 덩어리를 발견했다. 아내의 오른손 뼈마디 사이에서 타다만 묵주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내 미도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흐느끼면서 우그러진 양동이에 아내의 유골을 담았다. 두개골과 엉덩이뼈, 척추 외에는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미도리는 헌신적인 아내였고 250년간 신앙을 지켜온 우라카미의 거룩함이 몸에 배어있는 여인이었다. 나가이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아내를 생각하며 슬펐다. 그녀는 아픈 남편을 위해 혼코오치까지 가서 루르드의 샘물을 길러 오곤 하였다. 그는 미도리의 뼈에게 용서를 빌었다. “당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 곧장 가지 못해서 미안하오”라고 혼자 말을 하였다. 그가 걸을 때 뼈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아니에요, 절 용서하세요. 용서를 구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고 저예요” 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미도리의 유골을 가족 묘지에 묻었다.


폐허에 움막을 짓고

1945년 8월 들어 나가사키에 공습이 잦아지자 나가이 부부는 세 살짜리 딸 기야노와 10살짜리 아들 미코토를 외할머니와 함께 안전한 시골로 피신시켰다. 6킬로 떨어진 북동쪽에 있는 고바의 시골집이었다.

아내를 묻은 나가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겨우 고바의 아이들에게로 갔다.

마침내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해 9월 초부터 나가이에게는 원자병으로 인한 심각한 여러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가 더 이상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장모가 혼코오치의 샘물을 가지고 와서 나가이에게 먹였다. 그때 나가이는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에게 기도를 청하여라”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콜베신부님에게 기도를 청하자 그의 고통이 나았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아이들이 아빠와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나가이는 장모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고 해야 폐허더미였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타버린 집터 축대에 검게 그을린 통나무를 기대어 세운 후 우그러진 양철조각으로 지붕을 얹어 움막을 지었다.

우라카미로 돌아온 나가이는 개미와 지렁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가을비에 낙진이 씻겨나갔음을 확신했다. 들에는 푸른 풀도 돋기 시작하였다. 나가이는 사람들이 폐허 위에 정착하도록 격려하기를 쉬지 않았다.

우라카미 성당에서는 죽은 신자들은 위한 위령미사가 열렸다. 나가이에게 조사가 부탁되었다. 정말 어려운 과제였다. 나가이는 원자폭타 투하의 의미를 찾느라고 무척 고심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위령미사가 열리던 날, 나가이는 ‘우라카미에서 죽은 8천 명의 그리스도인은 제2차 세계대전과 연루된 모든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하느님의 제단에 바쳐진 번제물’이라고 연설하였다. 슬픔에 잠겨있던 사람들이 번제물이라는 말에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도 3세기의 긴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지켜온 나가사키의 그리스도의 양 떼가 하느님 앞에 바쳐진 흠 없는 어린양이라는 나가이의 연설을 받아들였다. 그 번제물로 인해 세상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고 나가이가 연설을 맺자 깊은 침묵이 흘렀다.


<나가사키의 종>

나가이는 원폭 환자를 돌본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인류 최초로 당한 원폭에 대한 보고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펜과 잉크를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연필로 썼다.


우라카미천주당에는 두 개의 종탑이 세워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박살이 났고 나머지 하나는 종탑밑으로 떨어져 돌더미에 묻혀있었다. 그해 12월이 되자 나가이는 우라카미의 젊은 생존자들을 격려하여 파묻힌 종을 파낼 계획을 세웠다. 종은 12월 24일 늦은 아침에 윗부분이 드러났다. 오후가 되어서야 종이 건져졌다. 종은 금 간 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들은 노송나무로 만든 삼각대에 조심스럽게 종을 달아매었다. 오후 6시가 가까웠다. 그들은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을 울리기로 하였다.


IMG_4223.JPG 우라카미 성당 종의 발굴 모습


그 무렵 우라카미의 신자들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자신들의 움막에 앉아있었다. 바로 그때 성당의 종소리가 댕~댕~ 울렸다. 일대에 높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종소리는 어느 때보다 맑게 울려 퍼졌다. 그들은 밥을 먹다 말고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다시 눈물이 그들의 볼을 타고 내렸다.


나가이는 원폭의 참상을 기록한 자신의 책 제목을 <나가사키의 종>으로 정했다. 처음 이 책을 출간하고자 했을 때 나서는 출판사가 하나도 없었다. 아무도 그 비참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책 부르스 마샬의 고전 <세상, 육체 그리고 스미스 신부>의 번역 책과 <영원한 것>을 쓰기 시작했다. 유명한 여성 월간지에 그가 번역한 <세상, 육체 그리고 스미스 신부>가 연재되면서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른 잡지사에서도 원고 청택이 쇄도했다. 처음 고전을 면치 못했던 <나가사키의 종>도 발간 3년 뒤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져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나가사키 대학은 인접한 새 도시의 건물을 빌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가이는 방사선학을 가르쳤다. 그러던 1946년 7월, 나가이는 나가사키 기차역에서 쓰러졌다. 그해 11월에 병상에 누운 나가이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병상에서 지내야 했다.

꼼짝없이 병상에 드러눕자 집필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비장이 심하게 부어 엎드릴 수 없었으므로 누워서 글을 썼다. 머리 위쪽에 나무로 된 책받침을 고정시켜 놓고 글은 연필로만 썼다. 나가이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을 아이들을 자립시키는 데 쓰기로 하였다.

1947년 미도리의 친척 한 사람이 나가이 가족을 위해 나은 판잣집을 지어주었다. 판잣집은 다다미 여섯 장 크기로 대충 12평방미터에 해당하였다. 이곳에서 나가이박사와 장모, 두 아이가 함께 생활하였다. 그즈음에는 원고료가 넉넉히 들어왔지만 그는 꼭 필요한 생활비만 빼고 모두 병원을 제건하는 등 공익사업에 썼다. 거액을 들여 벚나무 묘목 천 그루를 사서 폐허가 된 성당 주변, 학교운동장, 도로변에 심었다.


여기당

1947년 12월, 성빈첸시오 바오로 회원들이 나가이 박사에게 그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집필할 수 있는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한 평 남짓한 방 한 칸짜리 집이었다. 나가이는 이곳을 ‘여기당(如己堂)’이라고 불렀다.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복음서의 말씀에서 온 말이었다.

1948년 봄 그는 여기당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의 남은 여명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글로 남기고자 하였다. 1945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51년까지 그는 모두 20권의 책을 썼다. 그의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IMG_4207.JPG 여기당


IMG_4228.JPG 나가이 박사의 저서들


여기당으로 오는 방문객이 점점 늘었다. 일본전역에서 그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민을 안고 거룩한 사람의 충고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그를 찾아왔다. 1948년 10월 18일은 헬렌 켈러가 그를 찾아 여기당으로 왔다. 1949년 5월에는 나가사키를 방문한 천황이 그를 만나러 왔다. 1949년 8월 15일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온 지 4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길로이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의 특사로 나가사키에 온 길에 나가이를 방문하였다. 1949년 10월 21일에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일렉산드로 모길레브스키가 여기당을 방문하고 나가이를 위해 바이올린 연주를 하였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였다. 나가이는 이 자리에 근처 소학교의 피폭어린이들과 맹아학교 학생들을 초대하여 함께 그 연주를 들었다.


그리고 1951년 5월 초하루, 나가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미도리 곁으로 떠났다. 나가이는 자신의 시신을 나가사키 대학의 백혈병 연구용으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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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박사의 장례식 모습


나가이 박사의 일대기를 쓴 가타오카 교수는 “나가이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스며 나오는 사랑에 감동받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여기당에서 나가이 박사의 전기가 담긴 5분 짜리 비디오를 보는데 바짝 마른 그의 몸에도 불구하고 눈이 얼마나 맑은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가타오카 교수의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IMG_4225.JPG 병상의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모습


나가이 박사는 평소 환자들을 위로하며 “육신의 고통은 천국에 보물울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나가이 박사의 백혈병의 고통, 원자병의 고통이 그에게 천국의 보물로 쌓여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여기당 앞에는 그의 고향 시마네현에서 가져다 심은 초록 벚꽃이 피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했을 때 이 나무에 신비한 녹색 벚꽃이 피어있었다. 이 녹색벚꽃을 나가이 다카시 박사를 보듯 흠모하며 보았다.


IMG_4200.JPG 여기당 앞에 핀 녹색의 벚꽃


후기

소설 <침묵>을 읽다가 나가사키를 가 보고 싶었다.

소설 속 페레이라 신부의 탄식처럼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엄청난 박해를 통하여 그 싹이 잘려버렸고 일본이라는 늪 속에 잠기고 말았다. 살아남은 그리스도교 신자 비율도 0.4%도 안된다.

그러나 일본의 그리스도교를 얕잡아 보아서는 안된다. 특히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삶을 보면서 더욱 더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영성의 깊이는 신자 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가톨릭 신자만 8천명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에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였다. 로드리고 신부가 하느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가난한 농부들이 당하는 고난을 보며 하느님의 <침묵>을 원망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나가이 박사의 조사를 읽으며 다시 고개숙여 생각한다.

300년 넘게 기리시탄의 삶을 이어온 그들을 나가이 박사는 ‘모든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하느님의 제단에 바쳐진 번제물’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들을 대신하여 당신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켜온 기리시탄들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받으셨다. 그들이 가장 흠 없었기 때문일 것일까?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하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고난 중에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한 길이 나가사키 성지순례의 길이었다.

하느님은 <침묵> 중에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이번 여행길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아멘!

그러면서도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하는 의문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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