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남겨진 성 콜베 신부님의 족적
이번에는 나가사키 북서쪽 히코산 기슭의 혼고우치에 있는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폴란드인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일본과 연고가 있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솔직히 놀랐다.
콜베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연행되었고 거기서 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자청하여 순교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고 말씀하셨는데 콜베 신부야말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삶을 실천한 성인이셨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콜베 신부 이야기를 알고 있던 터라 나가사키 성지 순례를 준비하면서 콜베 신부가 머물렀던 <성모의 기사 수도원>도 방문 리스트에 넣었다. 그리고 신부가 만든 ‘루르드의 샘’에도 가서 샘물 한 모금을 마셔보고 싶었다. 아니 남편에게 꼭 마시게 해주고 싶었다. 나가사키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나가이 다카시 박사도 마지막 임종의 순간 이 루르드의 물을 마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남편은 하인두암이라는 희귀 암에 걸려 4년째 힘들게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참이다. 암과의 싸움으로 피폐해진 남편이 콜베 신부의 ‘루르드의 샘’ 샘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소망도 가지고 갔다.
콜베 신부는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하였고(1912년), 1915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1915년), 성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1919년). 그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나라 전주교구의 오기순(吳基順) 신부가 일본 나가사키에 와서 콜베 신부로부터 철학을 배웠다고 하니 그의 높은 학문은 근방에 소문이 자자했던 모양이었다.
콜베 신부가 <성모 기사 수도원>을 설립한 배경에는 그의 성모님에 대한 지극한 신심이 작용하였다.
콜베는 1894년 1월 8일 당시 러시아제국령이었던 폴란드의 주둔스카볼라에서 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12살이었을 때 콜베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성모님이 그에게 나타났던 것이었다. 콜베 신부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밤 성모님께서 내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를 물었다. 성모님께서 흰색과 빨간색 두 개의 왕관을 가져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물었는데, 흰 왕관은 내가 동정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빨간 왕관은 내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두 개 다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예고한 것이었던가 보았다.
그는 190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고 1911년 첫 서원을 하면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가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프리메이슨의 주동으로 많은 이들이 교황을 비난하며 조롱하는 격렬한 시위운동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였다. 콜베는 이에 대항하여 1917년 10월 16일, 6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로마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를 결성하고, 소책자와 월간지를 출판해 그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콜베 신부는 1918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폴란드로 돌아왔다.
폴란드로 귀국한 후 콜베 신부는 원죄 없으신 성모 신심 전파에 힘썼다. 또한 좌익, 특히 공산당 운동에 적극 반대했다. 콜베 신부는 크라쿠프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1927년에는 바르바샤 인근에 <니에포카라노프 수도원(원죄 없으신 성모 마을)>을 설립하는 등 열렬히 움직였다.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은 1935년 5월 《작은 신문 Maly Dziennik》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는데, 훌륭한 편집에 저렴한 구독료, 무보수 독지가들의 판매 봉사 등으로 신문은 신속히 그리고 널리 유포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콜베 신부와 일본의 인연은 1930년에 시작되었다. 그가 일본에서의 전교를 위해 1930년 상해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에 오게 된 것이었다. 검은 수염의 제노 수사를 동행하고서였다.
처음 그는 오우라천주당 바로 가까운 곳에 거점을 두고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931년, 히코산 기슭의 혼고우치에 '원죄 없으신 성모원'이라 불리는 <성모 기사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으로 옮겨갔다. 6년 동안 청빈을 지키며 선교와 교육 사업에 몰두하였는데 그는 특히 성모 신심의 고양에 전력하였다.
그는 일본에서도 일본어판 ‘성모의 기사’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어판 ‘성모의 기사’는 1933년 월간 5만 부의 발행부수에 이르는 잡지가 됐다. 1932년 인도 말라바르에 수도원을 세웠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1933년 잠시 폴란드에 들렀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때 콜베 신부는 잠시 한국에서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1936년, 니에포카라노프 수도원 원장에 선출된 그는 폴란드로 돌아갔다.
당시 유럽은 나치의 위협 속에 있었고 폴란드 역시 1939년 9월 나치의 침입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콜베는 유대인 2천 명을 포함한 난민들에게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을 은신처로 제공해 주었다. 그 이유로 1941년 2월 17일 콜베는 독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그해 5월 28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죄수번호 16670이었다.
1941년 7월 말, 수감자 중 한 명이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건이 벌어졌다. 수용소장 프리츠는 죄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수용인 열 명을 끌어내서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중 한 명이 자신은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한 여자의 지아비라며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콜베는 그 사람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자원했다.
이로서 콜베는 다른 아홉 명의 수인들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 프리츠는 이들이 “튤립구근처럼 말라죽을 때까지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일체 주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신부는 기도하며 같이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보름이 지나도록 콜베 신부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결국 나치는 독극물을 주사하여 그를 살해했다. 1941년 8월 14일이었다. 콜베 신부의 시신은 성모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콜베 신부를 복자로 시복 하였으며, 1981년 로마교황으로서 최초로 일본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의 기사 수도원>을 방문하여 그의 위업을 칭송하였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콜베 신부를 시성하였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 되려면 기적 사건이 입증되어야 한다. 콜베 신부가 시성 된 계기는 1948년 7월 창자결핵을 앓던 안젤라 테스토니와 경화증을 앓던 프랜시스 라이너가 콜베 신부에게 전구를 청하여 병이 말끔히 치유된 일이 기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이자면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원자폭탄의 후유증인 원자폭탄증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그는 혼미 중에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에게 기도를 청하여라”라는 환청을 듣게 된다. 그가 콜베 신부님에게 기도하자 그의 출혈이 거짓말처럼 나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나는 성 콜베와 관계있는 땅으로서 공식 순례지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을 갔다. 그리고 루르드의 샘으로도 갔다. 나는 나가이 박사를 구한 그 루르드의 생수를 남편에게 권했다. 물론 나도 마셨다.
“콜베 성인이여 남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소서!”하고 경건히 기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