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B 글로버씨가 일본 근대화를 이끌다.
오우라천주당 옆에 나가사키의 유명한 관광지인 구라바엔(글로버 가든)이 있다. 일본 내 가톨릭의 역사를 찾아 나가사키를 찾았던 나에게 구라바엔에의 여정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오우라천주당을 둘러보고 나오는 나에게 가이드가 구라바엔 관람을 권하였다. 오우라천주당에서 가깝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여 한 번쯤 둘러볼 만하다는 가이드의 추천이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푸치니의 유명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가 된 곳이라고 하여 구라바엔으로 발걸음을 돌려보았다.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언덕을 조금 올라가자 나가사키의 바다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웅장한 서양식 목조 저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서양식 저택들과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고 무엇보다 나가사키의 고요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풍광이 나를 사로잡았다.
거기다 잘 자란 녹나무 무리들이 4월의 하늘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소설 <침묵>에서 산속을 헤매던 로드리고 신부에게도 나가사키 근방의 녹나무들이 지켜섰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 다른 곳에도 녹나무는 자라고 있겠지만 큐슈지방에 특히 녹나무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여행에서 녹나무를 실컷 볼 수 있었던 것도 내게는 큰 소득이었다.
처음 구라바엔(園)이라고 들었을 때에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그런데 실인즉 이곳에 살았던 영국인 글로버(Glover)씨의 저택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자 실소가 터졌다. 서양식 용어를 일본식으로 소화하는 일본인들의 놀라운 재주에 또다시 감탄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일본화한다. ‘숨은 크리스천’을 ‘가꾸레 기리시탄’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글로버 씨가 일본의 근대화에 미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 듣게 되자 나의 호기심이 급발동하였다. 토마스 B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는 어린 나이에 스코틀랜드에서 중국 상하이로 왔다가 21살이 되던 1859년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온 인물이었다. 이때가 영일통상조약(英日通商條約)이 막 발효되었을 때였다. 상하이의 JM상회 나가사키 지사에 부임하였던 그는 도쿄로 이주하기 전까지 10여 년간을 나가사키에서 살았다.
서구와의 통상조약 체결로 나가사키 이외에 요코하마(橫浜), 홋카이도의 하코다테(函館) 등이 개항장으로 선포되었고 1860년, 나가사키의 오우라 야마테 지구에 외국인 거류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데지마에 한정되어 있던 외국인들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글로버 씨, 링거(F․Linger) 씨 등이 나가사키의 전망 좋은 언덕에 넓은 집과 정원을 짓고 옮겨갔다.
글로버 씨는 무역상으로 활약하면서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역할로 인해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사실은 그가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개혁세력을 지지하여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시대를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나가사키에 온 글로버는 2년 뒤에 JM상회를 사직하고 글로버 상회(Glover Trading Co.)를 설립하게 된다. 그는 일본의 차(茶)를 수출하는 일을 하였지만 사쓰마 번(薩摩藩), 조슈 번(長州藩)의 요청으로 총기류, 화약, 함선류의 수입을 주선하면서 일본의 중요 역사적인 사건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현 지역)은 과거부터 규슈의 주요 다이묘로서 시마즈 가문이 번주로써 지배해 왔는데, 에도시대에도 가가 번(加賀藩) 다음 가는 대형 번(藩)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쓰마 번과 야마구치의 조슈 번이 중심이 되어 도막운동(倒幕運動, 막말에 일어난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신정권 수립을 목표로 움직인 정치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글로버는 1860년대 중반부터 함선, 소총, 폭약 등을 수입하여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 제공하였다. 이 무기들은 미국 남북전쟁 시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미국의 무기 제조업체들은 1861년에 시작된 남북전쟁이 오래갈 것으로 예상하고 윈체스터 연발 소총 등의 신무기를 다량으로 제조하였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예상보다 빠르게 종결(1865년)됨에 따라 상당한 분량의 총기류가 중국 시장에 나돌았다. 글로버는 JM 상하이 지사를 통해 이들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 상당한 이윤을 붙여 팔아넘겼다.
이 신식무기들은 일본에서 벌어진 1864년의 전쟁에 사용되었다. 1864년의 전쟁은 야마구치의 조슈 번 세력이 아이즈 번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켜 교토 시내에서 대규모 시가전을 펼친 사건을 말한다. 이 전투에서 조슈 번은 패배했고 이후 조슈 번은 ‘조적(朝敵, 조정의 적)’ 세력으로 몰려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조슈 번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며 사쓰마 번과 ‘삿초 동맹’을 맺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실권을 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서는 많은 정치가를 배출하여 일본정치의 양대 파벌이 되었다.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의 일본 국내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데 조슈 번이 일본 제국 육군을 장악했다면 사쓰마 번은 일본 제국 해군을 장악하면서 유력한 일본 우익 정치세력의 빅 2(BIG 2)를 형성했다. 현재의 일본 현대 정치에서는 조슈 파벌의 대표로 아베 신조가 있다면,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사쓰마 파벌을 대표해 오고 있다.
이들이 메이지 천황을 무력화시키고 일본을 군국주의로 내몰아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고 이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미국까지도 적으로 삼아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글로버가 우리나라와 관계없는 인물도 아니라는 사실에 접목하게 된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때 글로버는 무기만 일본으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에 필요한 기간 설비를 수입하여 일본에 선보였다. 1865년에는 나가사키의 오우라 해안에 일본 최초의 철도를 부설하였고 또한 일본 최초의 선박 수리소, 일본 최초의 근대적 시설을 구비한 다카시마 탄광 개설 지원, 일본 최초의 등대 건설, 일본 최초의 조폐기 수입 등 그야말로 그는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영국 유학을 지원하고 새로운 개혁을 꿈꾸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지원하여 메이지유신이 성공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하였다.
글로버가 활약하던 나가사키에는 가메야마 조합(龜山社中)을 세워 활동하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도 있었고 훗날 미쓰비시중공업을 일으키게 되는 이와사키 야타로도 '개성관(開成館)'의 나가사키 상회(商會)에 주임(主任)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자연히 이들은 글로버로에게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개혁 방안을 구하였다.
글로버가 지지한 도막파(倒幕派)가 승리하여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으나 이들에게 신용거래로 조달해 준 무기대금을 받아낼 수가 없었던 글로버 상회는 결국 1870년 8월 파산하고 만다. 그는 나가사키를 떠나 도쿄로 갔다. 메이지 정부의 초대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는 동료들과 함께 힘을 모아 글로버에게 동경의 미나토구(港区)에 근사한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마침 그때 미국인과 독일인이 합작으로 설립한 스프링 밸리(Spring Valley) 양조장이 매물로 나왔다. 글로버는 친구와 함께 이를 매수하여 1885년 일본맥주제조회사(Japan Brewery Co.)를 설립했다. 3년 후, 1888년 5월 '기린'이라는 브랜드로 시판에 들어갔고, 이 회사는 1907년 미쓰비시에 매각되어 '주식회사 기린맥주'로 회사명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우라 야마테에 1863년에 완공된 글로버 저택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서양식 건물이었다. 높은 천장, 바다로 향해 배열된 방, 일본의 전통적인 흙벽, 일본식 기와를 얹은 지붕, 서양풍으로 꾸민 실내 등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하여 만들었다. 이곳에는 글로버 저택뿐만 아니라 링거 저택, 올트 저택 등이 건축되었고 이들은 현재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나머지 여섯 동의 건물은 구라바엔이 조성될 때 시내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한 것들이다.
글로버는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내인 이야지와 쓰루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는데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푸치니는 미국인 작가 존 롱이 1897년에 쓴 소설 <나비부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의 명작 오페라 <나비부인>을 탄생시켰다고 하는데 이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존 롱이나 푸치니는 한 번도 일본에 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구라바엔에는 푸치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푸치니 동상의 건너편에는 미우라 다마키상(像)이 세워져있다. 그녀는 일본의 프리마돈나로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여주인공 초초상 역할을 가장 많이 맡았다고 한다.
나도 푸치니 동상 옆에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의외의 수확이었다.
글로버 부부는 영국계 일본인 도미사부로를 아들로 입양하였다. 글로버 2세인 구라바 도미사부로(食場富三郎)는 나가사키의 상류층 인사들과 외국인들의 사교장인 '나가사키 내외 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가사키 앞바다에 미쓰비시중공업이 나가사키조선소를 운영하게 되면서 구라바 도미사부로의 인생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38년 3월 말부터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에서 전함 ‘무사시(武藏)’ 가 극비리에 건조되기 시작하였다. 선채 길이 263미터, 최대 폭 38미터, 톤수 7만 3천 톤, 승조원 2천5백 명을 수용하는 세계 최대급의 전함이었다. 무사시의 건조 과정을 국외자들이 볼 수 없도록 독 주변에 3미터 높이에 약 3만 평에 달하는 함석 담을 설치하고 위를 종려나무줄기의 털로 꼰 커튼을 드리웠다. 또한, 강 건너편에는 당시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시를 숨기기 위해서 차폐용 창고를 건설하였다.
글로버 저택은 미쓰비시 조선소는 물론 나가사키 항만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무사시를 숨길 수단을 강구하던 일본 해군은 고지에 있던 글로버 저택이나 홍콩상하이은행 나가사키 지점을 미쓰비시 중공업이 매입하도록 하였다. 결국 도미사부로는 전함 무사시의 진수식을 반년 앞둔 1939년 6월 30일, 군 당국의 압력으로 저택을 미쓰비시에 넘겨주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저택은 사실상 폐쇄되어 헌병대의 감시소로 전용되었다. 그 후 미쓰비시는 도미사부로부터 인수한 글로버 저택을 창업 1백 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57년에 나가사키시에 기증하였고, 시에서는 이를 수리하여 1958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도미사부로는 이차대전 중 일본 경찰에 의해 스파이 혐의를 받고 1945년 8월 26일 자살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할 밖에 없다.
전함 무사시는 1944년 태평양전쟁 중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군의 폭탄과 어뢰를 맞고 침몰하였다. 무사시의 잔해는 2015년에 발견되었는데, 수중 폭발로 인해 두 동강이 난 상태였다.
미쓰비시(三菱) 그룹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 1834~1885)는 시코쿠(四國)의 도사 번(土佐藩, 현재의 고치현(高知縣)에서 말단 무사인 향사(鄕士)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4년 그가 태어나던 무렵에는 부친이 향사직마저 친척에게 팔아넘기고 지하낭인(地下浪人)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14세 때에 도사 번의 번주(藩主)인 야마우치 도요테루(山内豊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21세 때 그의 후원으로 에도 유학을 떠났다.
1867년에 도사 번에서 경영하는 상사(商社)인 ‘개성관(開成館)’의 나가사키 상회(商會)에 주임(主任)으로 파견되었으며, 이때 나가사키에서 사카모토 료마와도 교류하였고 글로버와도 교류하며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익혔다.
야타로는 그 후 글로버와 상의하여 1873년 3월 미쓰비시 해운을 설립하더니 미쓰비시상회(三菱商會)로 규모를 키웠다. 미쓰비시 상회는 1874년부터 1877년까지 정부의 해상 운송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으며 규모를 확장하였다. 1874년 메이지 정부가 대만(臺灣)을 침략했을 때 병사들과 군수품의 운송을 맡아 정부의 신임을 받았으며, 그 후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난이나 1875년 일본이 한국의 강화도(江華島)를 침략할 때에도 미쓰비시 상회의 배들이 군수품을 운송하였다.
이렇게 정부의 해상 운송을 독점한 결과 처음 2척의 배로 시작된 미쓰비시 상회는 1877년에는 61척의 기선을 소유하는 규모로 빠르게 성장했으며, 조선업·은행업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강제 노역의 섬 군함도(軍艦島)가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의 본래 이름은 하시마(端島)이나 남북 약 480미터, 동서 약 160미터, 주위 약 1.2킬로미터, 면적 약 6.5헥타르의 바위섬으로서 군함처럼 생겼다 하여 속칭 군함도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섬의 해저에 석탄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되면서였다.
1890년, 이곳을 미쓰비시가 매입하여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하였다. 1974년 폐광될 때까지 이곳에서 양질의 석탄을 야하타제철소 등에 공급하여 글자 그대로 일본 근대화 기간산업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문제는 지하의 탄광채굴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1925년부터 1945년 사이 군함도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21년간의 사망자 1,295명 중 일본인이 58명, 조선인이 1,222명, 중국인 포로가 15명으로 되어 있다. 사망진단서에 의한 사망 원인을 보면, 조선인은 압사, 질식사, 폭발사고사, 변사 등이 압도적으로 많아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는지를 짐작케 한다.
우리나라에서 2017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국민의 공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서는 길에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글로버 씨 같은 외국 근대화세력의 협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라웠다. 거기다 미쓰비시 그룹이 나가사키에서 태동하였고,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전함을 만들어 전쟁준비에 앞장섰고, 군함도에서는 석탄을 채굴하여 제철소에 제공하므로서 군비생산에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왜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졌는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