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쇄국에서 개국으로:방방곡곡에 성당이 세워지다.

가쿠레 기리시탄이 나타나다.

by 보현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일본으로 미국의 흑선 페리호가 내항하면서 막부의 쇄국정책은 막을 내렸다. 에도 막부는 1858년 미국, 영국 등 5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등 5개 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에서는 나가사키항 입구에 위치한 오우라 야마테(大浦山手) 지구에 외국인 거류지가 만들어졌다. 오페라 <나비부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지금의 글로버 저택도 이 근처에 세워졌다.


오우라천주당의 건설과 신자 발견

이에 일본의 재선교를 위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이 일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나가사키에는 1863년 퓌레(Louise Theodore Furet) 신부, 1864년 쁘티장(Bernard thadee Petitjean) 신부가 도착했다. 이들은 나가사키에 머무르는 프랑스인을 위해 성당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쇼군은 구미인들에게만 교회 출입을 허가했다. 그러나 쁘티장 신부는 비밀리에 은신하고 있을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기대하면서 천주당(天主堂)이라는 한자를 성당 정면에 걸었다. 나가사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서양식 성당이 들어서자 이를 <프랑스절>이라고 부르면서 엄청난 인파의 구경꾼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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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라천주당


그런데 천주당 입구에 세워져 있는 우리나라의 박해로 숨진 네 분의 유해가 이곳에 13년간 봉안되어 있었음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다블뤼 주교와 성 루카 위앵 신부, 성 베드로 오 매트르 신부 및 성 장 주기 요셉이 그들이다. 이들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후 신자들에 의해 서짓골로 이장되어 모셔졌다가 서짓골 성지가 파해쳐질 위기에 처하자 잠시 일본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블랑주교 때의 일이었다. 이곳에 모셔졌던 네 분의 유해는 1894년 용산신학교를 거쳐 1900년 명동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현재는 절두산 순교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이곳에서 한국 천주교 박해의 흔적을 만나다니 일본이 우리나라와 얼마나 가까운 나라 인가 하는 상념에 잠시 잠겼다. 네 성인을 위해 기도하였다.


IMG_4518.JPG 오우라 성당 마당에 세워져 있는 한국 갈매못 순교자기념비


오우라천주당은 우라카미의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비밀 공동체에서 나가사키 만 쪽으로 6km 아래쪽에 있었다. 자연히 우라카미의 가쿠레 기리시탄들에게도 오우라천주당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세 번이나 박해를 받은 우라카미 지역인지라 신자들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그중 한 여성이 그곳에 산타 마리아(성모 마리아) 님이 계신다면 그곳에 계시는 외국인은 빠데레(신부) 임에 틀림없다고 하자 신자 15명이 정탐을 위해 조심스럽게 오우라천주당에 도착하였다. 성당 앞에는 ‘이 교회는 외국인을 위한 것이며 교회 안에서 발각되는 일본인은 누구든지 반(反) 그리스도교 법령에 의해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IMG_4121.JPG 우라카미 성전의 신도발견 기념 부조


쁘티장 신부가 그날의 성무일도 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성당을 구경하는 척하고 있던 부인 세 명이 신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중 한 부인이 속삭였다. “산타 마리아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신부에게 또 다른 여인이 “우리의 믿음과 당신의 믿음이 같습니다.”라고 속삭였다.

신부는 그제야 깨달았다. 숨은 그리스도인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정말입니까? 당신들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하고 쁘티장 신부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자 그녀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우라카미 사람입니다. 우라카미에는 거의 모두가 우리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재차 “산타 마리아 상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가쿠레 기리시탄의 존재가 밝혀진 ‘신자 발견’의 날이었다. 1865년 3월 17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오우라천주당의 봉헌식이 있고 일 개월이 지난 때였다.

신부는 농부로 가장하여 어두운 밤에 우라카미로 신자들을 찾아갔다.


1868년, 일본에서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神道)를 정신적 지주로 하여 국가통합을 이루고자 하였기 때문에 금교령은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쁘티장 신부와 우라카미 신자들의 은밀한 교류는 당국의 감시의 눈에 걸리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1867년에 벌어진 ‘우라카미 네 번째 박해’로 연결되었다. 이 박해로 신자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앞 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박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영사, 프로이센 공사와 미국 공사가 나가사키 부교에게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항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막부가 붕괴되어 가던 시점이라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신자들은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1871년 메이지 정부의 사절단이 서구문물의 시찰과 불평등 조약 개정의 예비교섭을 위해 구미제국으로 떠났다. 사절단은 가는 곳마다 박해에 대해 거센 항의를 받았다. 구미각국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탄압중지와 선교의 자유가 불평등조약 개정의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하였다. 결국 메이지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기독교에 대한 정책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일본의 기독교 금교령은 1873년에 가서 폐지되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선포되어 <침묵>에 나오는 페레이라 신부의 독백처럼 일본을 가톨릭 전교의 늪으로 만들어버렸던 금교령이 250여 년 만에 폐지된 것이었다.


우라카미성당의 건설

1873년 3월, 유배되어 갔던 우라카미 신자들은 석방되어 귀향하게 된다. 처음 유배된 3,394명 중 662명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그들이 우라카미 마을에 돌아오자 농기구며 가구 배, 낚시용구 등 조금이라도 값나가는 물건은 모조리 탈취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때 잘 정돈되어 있던 논밭은 황무지로 변해있었다.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눈물을 닦고 깨진 기와조각과 깨진 사금파리로 잡초가 우거진 논밭은 일구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탄압을 ‘여행’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고향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성당터로 눈독을 들였던 곳은 언덕 위의 웅장한 저택이었다. 바로 자신들을 심문하고 수용소로 보낸 정부 관리의 집이었다.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예처럼 열심히 일했다. 마침내 이 저택을 사들인 그들은 그 자리에 목조 성당을 지었다(1879년).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한 끝에 1895년 목조건물을 허물고 프레노 신부의 설계로 돌과 벽돌을 사용한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거의 모든 신자와 그 가족들이 성당 건축에 참여했다. 마침내 착공한 지 22년이 지난 1917년 성당이 완공되었다. 동양 최대규모의 붉은 벽돌 양식인 <우라카미 성당>이었다. 1925년에는 쌍탑도 만들어졌다.


우라카미성당 최초.png 1917년 완공된 우라카미천주당의 모습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지는 성당들

금교령이 해제되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경쟁하듯 성당을 건설해 나갔다. 신자들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해안에서부터 높은 부지까지 스스로 돌을 짊어지고 나무를 잘라 성당 건설에 나섰다. 메이지 후기에는 일본인 도편수들이 설계부터 시공까지 직접 만든 성당들이 늘어났다.

나가사키의 성당 건축에 크나큰 공적을 남긴 대표적인 건축가가 데쓰가와 요스케(鐵川与助)였다. 그는 가미고토(上五島) 출신으로서 프랑스인 퓌레 신부와 드 로 신부로부터 건축학의 기초를 배웠고 정성을 다해 성당을 지었기 때문에 요스케의 작품은 보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고 한다. 이 글의 3장에서 야마다성당과 데쓰가와 요스케의 관련성을 언급한 바 있다. 세계유산후보에 포함시킨 10개의 성당가운데 5개의 성당을 그가 지었다니 대단한 건축가임에 틀림이 없는듯하다.


타비라성당

히라도섬에 가까운 타비라에는 금교령이 해제될 무렵 10 가구의 신자들이 숨어 살았다. 금교령이 해제되자 구로시마와 소토메로부터 온 이주자들이 본 성당을 완성시켰다. 구로시마와 소토메 지역은 모두 농지가 적고 척박하였으므로 구로시마 성당의 라케 신부가 타비라의 들판을 자비로 구입하여 1886년, 3 가구를 이주시켰고 시츠성당의 드 로 신부도 토지를 사서 4 가구를 이주시키면서 점차 신자 수가 증가하였다.

1914년에 부임한 나카다 신부는 본격적인 성당건설을 결심하고 자금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프랑스인 독지가로부터 기부를 받아 1918년에 본 성당을 완성하였다. 설계 시공은 데쓰가와 요스케가 하였다. 건축 시 신자들의 노동봉사도 대단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지역에서 채집한 조개껍질을 불태워 건축재료인 석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소각지가 현재에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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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비라성당 전경(왼쪽)과 조개껍질 소각장(오른쪽)


나는 저녁 무렵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짙은 붉은 벽돌성당의 아름다움과 위용에 압도되고 말았다. 데쓰가와 요스케는 빼어난 성당 건축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더니 과연 타비라성당을 보고 왜 그런지 연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신자들이 조개를 태워 석회를 만들었다는 소각장도 흥미롭게 살펴보고 아름답게 꾸며둔 성모동산도 둘러보며 뭔가 흥이 나서 오래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이곳에는 마음을 강하게 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다만 성당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겠다.

타비라 성당은 2003년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드 로 신부의 시츠 성당, 오노 성당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드 로(Marc Marie de Rotz) 신부가 나가사키의 소토메 지역에 파견된 시기는 1879년이었다. 드 로 신부가 소토메에 부임했을 때 그곳에는 가톨릭으로 복귀한 신자가 2,913명에 달해 있었다. 신부는 도착한 후 얼마 안 있어 시츠 성당 건축을 시작하였다. 위치는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가 선택되었다. 스스로 설계하였고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봉사가 이어져 1882년에 완공되었다. 이 성당에서 2명의 추기경이 선출되었고, 사제성소를 받은 사람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현재 신자는 800명이 넘으며 140년 이상 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2011년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세계유산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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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츠성당


드 로 신부는 소토메 신자들의 삶이 너무나 곤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토메는 궁벽한 벽지인 데다 농지가 거의 없고 그것도 위험한 경사면의 메마른 밭에 불과했다. 그는 소토메 신자들을 곤궁에서부터 구해내기 위한 여러 사업에 착수하였다.


1883년 부녀자와 실업자에게 일을 주고 생활의 길을 열게 하려는 목적으로 지원 시설인 <시츠 구조원>을 열어 빵과 마카로니, 식물 등을 생산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었다. 1885년에는 성당 바로 옆에 <정어리 그물 공장>을 건립했는데 지금은 <드 로 신부 기념관>이 되어 있다. 같은 해, 장티푸스가 유행하자 몸소 자신의 의학지식을 살려서 진료소와 약국을 열고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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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로 신부가 마을 신자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만든 도구들


1884년부터 1901년에 걸쳐 드 로 신부는 시츠 가까이에 있는 오다이라(大平) 지역의 벌판 2 정보를 구입하여 개척하였고 층층의 밭에는 프랑스로부터 가지고 온 우수한 품종의 소맥을 중심으로 감자와 면, 토마토와 딸기 등을 키웠다. 차나무도 재배하여 녹차뿐만 아니라 홍차도 만들어 외국인 거류자의 상인을 통해 수출했다고 한다.


IMG_4024.JPG 드 로 신부 기념비


시츠지구와 가까운 곳에 오노(大野) 지구가 있다. 이곳에는 이키츠키의 고테다 일파 600명이 히라도번의 탄압을 피해 나가사키에 망명할 때 그 일부가 이곳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 처형된 후 히고(肥後) 지역의 그의 신하들도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1893년, 드 로 신부의 지도에 의해 26 가구의 신자가 힘을 모아 오노성당을 건설하였다. 성당은 하나의 방으로 만들어진 작은 성당으로 민가처럼 보인다. 이 성당의 특징은 현지의 돌을 이용한 외벽에 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현무암을 이용하여 비바람에 강한 공법(드 로의 벽)으로 벽을 만들었다. 성당자체도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나지막하게 지어졌다. 2008년 국가중요 문화재에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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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성당


드 로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집안 출신으로 본국의 집안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액의 사재를 들여와 소토메 사람들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행하였다. 인쇄, 의료, 토목, 건축, 농경, 수산, 양잠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영역은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는 39세에 착임한 후 74세로 선종할 때까지 35년간 한 번도 프랑스에 되돌아간 적이 없이 소토메를 위하여 전력의 삶을 살았다.


소토메에는 오노성당(세계유산후보), 시츠성당(세계유산후보) 외에 <드 로 신부 기념관>이 남아 있다. 엔도 슈사크의 ‘침묵의 비’가 <드 로 신부 기념관> 길 건너편에 있다. 거기서 한 고개를 넘어가면 바닷가에 <엔도 슈사크 문학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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