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데지마(出島)에서

일본 근대화의 숨구멍 데지마

by 보현



다음은 나가사키의 무역과 관련하여 유명한 데지마를 방문하였다. 데지마는 해외무역을 수행하되 해외에서 유입되는 나쁜 사상(그리스도교)을 차단하기 위한 막부의 고심의 결과로 탄생한 곳이다. 막부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을 돕지 못하도록 그들을 이곳에 거주시키고 감시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이 쫓겨난 후에는 네덜란드 상관인들이 메이지유신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면서 일본의 문화에 깊은 영향은 미쳤다.

소설 <침묵>에서 작가는 일본의 기리시탄 탄압의 역사를 설명하는 도구로 데지마를 출입하는 네덜란드 상인의 일기를 사용하였다. 나도 발길을 데지마로 돌려 16, 17세기 일본 근대화의 숨구멍 데지마의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하였다.


데지마(出島)

데지마라는 용어는 해안지형 중 바다로 돌출된 반도 모양의 땅을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그런데 나가사키의 데지마는 기독교 포교를 차단하기 위하여 포르투갈인들을 한 곳에 모아 살게 만든 인공섬을 일컫는다. 나중에는 이곳에 네덜란드 상관인들이 모여 살았다. 네덜란드인들은 메이지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이곳에 거주했으므로 나가사키의 데지마에는 네덜란드인들의 정취가 진하게 묻어있다.

18세기 데지마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 데지마는 나가사키의 바다를 향해 돌출된 부채꼴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 바다를 메워 시내 한복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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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모형도(왼쪽)와 현재의 데지마(오른쪽)


도쿠가와막부는 포르투갈인들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하여 1634년 나가사키의 유력 상인 25명에게 공사비를 갹출시켜 데지마라는 인공 섬을 만들어 시내에 흩어져 살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을 이곳에 수용토록 했다(1636년). 5천 평 정도의 인공 섬 주위에 높이 3미터의 철책을 둘러치고, 주변의 해상에는 '접근금지'라고 쓴 기둥을 12개나 박아 놓고 상관원의 외출과 외부인의 접근을 엄격히 통제하였다니 가히 감옥이나 진배없는 곳이 데지마였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단절하면서(1639년) 데지마는 비어있었는데 1641년,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을 이곳으로 옮겨오게 했고 이후 메이지유신 때까지 이곳에는 네덜란드 상관원만이 거주했다.


데지마에서는 에도막부 시대 이곳에서 일어난 무역관행이라든지 상인들의 숙소, 네덜란드인들의 생활 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로운 곳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데지마이다.

일본은 가톨릭의 유입을 막기 위해 철저한 쇄국정책을 취하면서도 데지마라는 작은 숨구멍을 통해 세계정세를 아시아의 어떤 나라보다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선진화에 데지마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알면 이곳이 단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곳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데지마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호기심으로 가득하였다.


데지마는 16~17세기 일본의 해외 교역 관련 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다. 특히 나가사키를 통해 포르투갈의 남만문화가 전달될 때 설탕이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간 과정을 그린 슈가 로드(sugar road)는 흥미로웠다. 이 설탕을 이용하여 카스텔라나 빵, 과자 등을 만드는 기술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나가사키의 카스텔라가 왜 그렇게 유명한지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나중에 오우라 성당 앞에 가서 한번 맛볼 참이다(오우라 성당 앞 상가에 카스텔라를 많이 팔고 있다고 한다).


IMG_4652.JPG 슈가 로드: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전역으로 퍼져나가다.


포르투갈의 시대

1550년, 포르투갈 상선이 처음으로 히라도에 들어오면서 일본인들이 만난 최초의 유럽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 상선들은 일본 다이묘들의 환대 속에서 1561년에는 히라도에 포르투갈 상관을 개설하였다. 1584년에는 에스파냐도 히라도에 상관을 개설하였다. 이들 이베리아반도 국가들은 가톨릭 선교사를 등에 업고 일본에 진출했다.

유교의 주종관계에 익숙한 일본의 권력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은 사회 기강을 어지럽히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방의 뛰어난 첨단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교역을 원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에서 인도양을 거쳐 마카오, 나가사키로 이어지는 장대한 무역항로가 열렸다. 이 교역로를 통해 수많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최초의 가톨릭 다이묘였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기증하면서 포르투갈의 상관도 나가사키로 옮겨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방과의 교역 중에도 늘 서양 식민지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고 있었다. 에스파냐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자(1565년) 일본은 에스파냐를 더욱 경계하게 되었으니 산 펠리페호 사건으로 인해 이 염려가 폭발한 사건이 바로 에스파냐 유래 수도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26인 순교사건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일본이 에스파냐 무역 루트에 끼어들기 위하여 에스파냐와의 교류에 노력하였으나 결국은 포교 활동을 식민지 획득의 전 단계로 인식하고 가톨릭의 선교를 금지하는 금교정책을 강화하면서 1624년 에스파냐 선박의 일본 내항을 금지하고 상관을 폐쇄하였다.


포르투갈은 상관을 설치하고 80여 년간 히라도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역을 하였지만 막부는 포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포르투갈 선의 기항지를 나가사키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1636년에는 데지마를 건설하여 나가사키 시내에 흩어져 있던 포르투갈 상인들을 데지마로 옮겨 살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637년에 발생한 ‘시마바라의 난’ 이후 포르투갈선의 내항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1639년) 이후 포르투갈과의 교역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일본의 교역품

전국시대를 겪었던 일본은 처음에는 서방의 조총이나 대포 등 앞선 무기를 수입하기 위해 서방과의 교역을 원했다면 통일시대 일본의 교역은 점차 일반 물품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열도에 평화가 찾아오자 일본의 지도층이나 상류층 여인들은 화려한 비단옷 입기를 즐겼다. 무사들의 갑옷도 비단으로 짰다. 이에 일본이 가장 원하던 물품은 중국의 생사와 비단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재빨리 중국의 생사를 구입해 일본에 파는 중개무역에 나섰다.


이에 비해 일본의 주수출품은 은, 구리, 유황 등이었다. 특히 일본에는 은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1545년에는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대규모의 은광이 발견되었다. 당시 중국은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의 수요가 많았다. 이 포토시의 은광에 비교될 정도로 일본의 이와미 광산에는 은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1533년, 조선으로부터 은 제련 기술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은 산출량이 획기적으로 늘게 되었다. 마침 포토시 은광이 고갈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은은 전 세계로 수출되게 되었다. 명나라는 당시 도자기, 비단, 차의 수출대금으로 은을 받았다. 포르투갈은 이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또한 일본의 구리도 중요한 무역상품이었다. 일본에서 구리를 생산하면 중국 왕조에서는 완성품인 동전을 만들어 수출하는 무역 구도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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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요 수출품 구리(왼쪽)와 구리를 달던 저울(오른쪽)


동남아시아의 니혼 마치

포르투갈은 독점무역의 특혜를 이용하여 중국의 생사를 일본에 비싸게 팔았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해외로 나가 중국과 직접 교역에 나섰다. 이는 1557년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거점을 마련하면서 16~17세기에 많은 유럽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또 많은 일본인들이 마카오를 거쳐 전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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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무역로(왼쪽)과 일본의 주인선(오른쪽)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국의 배에 대해 주인장(朱印状)을 발부해 해외무역에 나서는 일본인들을 허용하였다(1592년). 주인장 제도란 해외 도항을 허락하는 서류(붉은 도장이 찍힌 문서)로서 이를 가진 배를 주인선(朱印船)이라고 하였다. 각 다이묘들은 무역상의 막대한 이익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인선을 아시아 각지로 보냈다.


이 주인선 제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막부는 1601년 이후 베트남(安南), 스페인령 마닐라, 베트남 남부의 참파, 캄보디아, 태국(아유타야 왕조), 말레이 반도의 파타니(Pattani) 등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주인장이 없는 일본 상선과는 무역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쉽게 외교관계를 맺게 된 데에는 일본인들이 상인 또는 노예가 되어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등으로 퍼져나간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1604년부터 30년간 해외에 나간 일본인은 10만 명에 이르고 동남아 지역 20여 곳에 일본인 마을(니혼 마치)이 세워졌다. 그중에서 중요한 곳이 네덜란드령 바타비아, 베트남 남쪽 구이엔의 호이 안, 필리핀의 스페인령 마닐라, 캄보디아 프놈펜이었고 특히 중요한 니혼 마치는 다가야마 우콘과 그의 가족이 머문 마닐라의 파코(Paco)였으며, 가장 유명한 곳은 태국의 아유타야였다.


동남아시아에 니혼 마치가 성행한 이유는 일본의 모험 상인들이 밀무역에 나서기도 했고 일본 국내의 가톨릭 탄압을 피해 해외로 나간 일본인들도 많았으며 포르투갈의 용병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일본인 로닌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다룰 것은 아니지만 사무라이 나라 일본의 주요 수출품에 로닌(낭인)도 있었다니 참으로 그럴듯하여 무릎이 쳐진다. 로닌이라고 하면 명성왕후의 슬픈 죽음이 함께 떠오른다. 그 이전에도 일본의 왜구들은 해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약탈과 살상에 나서 주변국이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선교사들이 주인선을 타고 일본에 몰래 건너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막부는 더 이상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1633년 도쿠가와막부는 1차 쇄국령을 내려 허가장 발급을 까다롭게 하고, 동남아에 5년 이상 거주한 일본인의 귀국을 금지시켰다. 1635년에는 모든 일본인에게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도항과 귀국을 전면금지했다. 그 결과 주인선 제도는 막을 내렸고 니혼 마치도 쇠퇴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시대

일본 지도자 중 해외무역에 가장 고심을 많이 한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보인다. 이에야스는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수장급 인물들을 잇달아 만나 포르투갈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면서 당시 최강국이던 에스파냐의 식민지 무역 루트에 일본이 동참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다 1600년 규슈 해안에 표착한 네덜란드 선의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와 네덜란드인 얀 요스덴(Jan Joosten)을 만나면서 이에야스는 새로운 무역파트너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막 동방무역에 나선 참이었다. 이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일본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1609년 5월 31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 두 척이 히라도에 도착하게 된다. 예수회는 해적질을 일삼는 네덜란드인들을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인들이 어느 항구로 들어와도 좋다는 슈인죠(朱印状)를 내주었다. 이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히라도에 무역사무소인 상관을 열었다.


IMG_4644.JPG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


예수회에서 네덜란드 선박들을 해적선이라고 부를만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무역회사이자 전투집단이었다. 무장한 채 여차하면 해적으로 변신하였고 바타비아나 향신료의 고향인 몰루카제도에서 무지막지하게 현지인을 몰살시킨 전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역에서 오는 이익이 워낙 컸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일본과 중국 두 나라의 눈치를 보았다. 당시의 히라도 상관은 무역 거점이라기보다는 포르투갈,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히라도에서 수출되는 일본상품은 은, 철, 조총, 도검류, 노예, 선원, 용병 등이었는데 특히 이 용병들은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에서 에스파냐와 싸우는 데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포르투갈, 스페인, 중국은 네덜란드와 영국을 일본에서 추방하라고 막부를 압박하였다. 막부는 1621년 7월 28일 네덜란드와 영국 상관장에게 일본인 노예, 용병 수출 금지, 군수품 수출 금지, 일본 근해에서의 해적 행위 금지라는 3개 조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1623년 히라도에서 철수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명령에 순응하며 히라도에 남았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막부의 명령이라면 언제나 군소리 없이 신속하게 실행하였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때에도 네덜란드 상관은 반군 진압에 참가하여 반군이 농성 중인 성을 향해 대포를 4백여 발이나 발사하였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내외의 비난을 받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일본 막부의 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전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무역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언제나 막부에 인식시켰다. 네덜란드인들은 교역을 통한 실익 추구에 전념하였다.


애덤스의 요청으로 영국도 1613년 일본에 무역관을 개설하였다. 초대 영국 상관장 리처드 콕스는 슨푸, 에도, 오사카, 쓰시마에 상관원을 주재시키고 시암, 코친, 통킹 등과의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막부로부터 앞으로는 히라도에서만 교역을 하라는 조선을 제시받은 데다 무역에서도 네덜란드에 거듭 패하자 영국동인도회사는 1623년 히라도의 상관을 폐쇄하고 일본을 떠났다.


이렇게 하여 일본과의 무역에서 최종 승자는 네덜란드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613년 히라도에 상관을 개설한 이래 1867년까지 7백 척 이상의 선박이 일본에 내항하면서 일본과 유럽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의 배는 일본에 들어올 때마다 ‘네덜란드 풍설서’로 불리는 해외 정보 보고서를 막부 측 외교 담당인 나가사키 부교에게 제출했다. 또한 데지마 상관의 책임자인 카피탄(상관장)이 일 년에 한 번씩 에도를 방문하여 쇼군을 알현하고, 무역 허가에 대한 사의로서 예물을 헌상하는 에도산푸(江戶參府)라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를 통해 일본 정부는 유럽과 세계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에서 온 선진학자로부터 과학과 의술과 자연과학에 눈뜬 일본인들이 늘어가게 되었다. 네덜란드 문화가 난학(蘭學, 란가쿠)으로 유행하게 되면서였다.


일본 근대화의 시작, 유럽의 연구자들

데지마 한편에는 흥미로운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른바 <시볼트 귀향식물원>이다.

필립 F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는 27세 때인 1823년 8월, 네덜란드 데지마 상관에 의사 겸 자연 조사관으로 부임하였다. 1824년 시볼트는 나가사키 교외 나루타키에 일본 최초의 외국인 의료 사숙 '나루타키주쿠'를 개설하였다. 이곳에서 안과, 산부인과, 외과 등 여러 분야의 의사들과 천문학자 등 150여 명이 배출되었고 근대적 의료 기술과 과학 지식이 나루타키에서 일본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뿐만 아니라 지적 호기심이 넘쳤던 그는 정력적인 연구를 해 일본의 지리, 역사뿐만 아니라 일본 식물분포, 일본 차(茶) 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일본의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일본 식물학지(植物學誌)를 저술하기도 하였고 데지마에 1,500평 규모의 식물원을 건립하여 일본 식물학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 식물원을 일본인들은 <시볼트(Siebold) 귀향(歸鄕) 식물원>이라고 부른다.

체류 중 그는 조선에 대해서도 ‘조선 반도의 특징’, ‘조선 어휘에 관한 논문’을 남겼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소나무의 학명(Pinus densiflora Siebold & Zuccarini)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생육하는 수목 30여 종 이상에 학명을 붙였다.


IMG_4713.JPG 데지마 내에 세워져 있는 시볼트 기념 부조


시볼트는 자기보다 먼저 네덜란드 상관에 부임해 온 엥게르벨트 캠페와 칼 튠베리크를 기념하는 작은 입석도 데지마 안에 세웠다. 그들은 일본의 역사, 문화 및 동·식물을 그들의 고국에 소개한 전임자들이었다.


IMG_4720.JPG 시볼트가 세운 엥게르벨트 캠페와 칼 튠베리크를 기념하는 입석


특히 독일인 의사 켐페(Engelbert Kaempfer 1651-1716)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에 의사 자격으로 합류하면서 1690년,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그는 2년간 일본에 머물르면서 지역 식물을 광범위하게 연구, 수집하였다. 12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1695년 고향으로 귀국한 그는, 그의 여행과 관련된 2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중 1712년에 출간된 <Amoenitatum exoticarum> 내의 ‘일본 식물들(Flora Japonica)’편에서 그는 일본에서 관찰한 식물들에 관해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은행과 동백을 위시하여 23종의 식물을 유럽에 소개하였는데 여기에는 콩도 포함되어 있었다. 켐페의 일본에 관한 연구는 유럽과 독일 연구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일본에 대한 소개가 유럽의 일본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들이 일본인들의 연구심에 더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들은 켐페나 시볼트 같은 박물학자들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의학뿐만 아니라 식물에 대한 연구에도 깊이를 더했다.

데지마를 통해 입수된 서양서적들은 의학, 천문역학 등의 연구를 촉진시켰다. 난학(蘭學)을 통하여 탄생한 합리적 사고 및 인간평등사상 등은 막부말기의 일본에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중국인 거리 도진야시키와 나가사키 짬뽕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은 일본 3대 차이나타운(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에 들만큼 규모도 크고 이름 높다. 나가사키를 여행할 때면 꼭 이곳에 들러 나가사키 짬뽕을 먹어야 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은 데지마 가까이 있으므로 데지마를 찬찬히 구경하고 차이나타운에 가서 짬뽕을 먹기로 하였다. 나가사키 짬뽕이 언제부터, 왜 유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붉은 짬뽕과 달리 흰 나가사키 짬뽕은 분명 특이하고 맛도 좋았다.


짬뽕을 배불리 먹고 차이나타운을 천천히 걷다가 입간판하나를 발견하였다. <新地藏所>라는 중국인 상인의 창고에 관한 안내판이었다. 이것이 중국인거리와 중국인들과의 무역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IMG_4738.JPG <新地藏所> 안내판(왼쪽)과 중국인거리 풍경(오른쪽)


본래 명나라는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에 대한 적대감으로 중국 배의 일본도항을 금지했지만 중국 배는 몰래 일본을 찾기도 하고, 제3 국에서 일본 주인선과 만나 거래를 하기도 했다.

한편 1644년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청국은, 중국의 연안 지역을 무대로 청국을 공격하고 명 왕조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는 정성공(1624~1662) 일당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연안의 주민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토록 하는 천계령(遷界令)을 발령하였다.

정성공은 일본인 어머니와 밀무역으로 축재한 중국인 아버지 정지룡과의 사이에서 히라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7세 때 아버지의 고향 푸젠으로 건너가 성장하면서 반청복명(反淸復明)에 진력하였다. 1662년 정성공이 병사한 후 청국이 점차적으로 연안 지역의 통제를 완화하고 해외무역을 용인함으로써 중국의 무역선이 대거 나가사키로 내항하게 되었다.


에도막부는 외부 세계와의 교역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중국과는 제한된 범위에서 무역을 허용하였다. 전성기에는 약 1만 명의 중국인이 나가사키에 거주했다고 한다(당시 나가사키의 인구가 7만 명가량이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수인 셈이다).

나가사키 시내의 이곳저곳에 수천 명의 중국인이 체류함으로써 도박, 마약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밀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막부는 나가사키 부교에게 도진(唐人; 중국인)을 일정한 장소에 격리, 수용할 수 있는 도진야시키(唐人屋敷) 즉 중국인 거류지의 건설을 명하였다.

도진야시키는 1689년 4월에 완공되었다. 면적은 약 9,400평으로 데지마의 2배 정도이며 수용 인원은 2천 명 정도였다. 위치는 현재의 나가사키시 간나이 정 지역이었다.


image09.png 도진야시키(唐人屋敷)의 모습을 그린 그림


1698년의 대화재로 미코토 정이나 다이코쿠 정에 있던 중국선의 창고가 소실되자 당인 저택 앞의 바다를 매립하여 중국선 전용의 창고구역을 조성했다. 이 지역을 신치(新地)라고 불렀다. 그 뒤 몇 차례 화재로 인접한 나가사키시 신치 정에 차이나 타운을 건설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의 시작이 되었다.


IMG_4729.JPG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


이처럼 17세기 나가사키에서는 네덜란드와 중국과 활발한 교역 활동이 행해지면서 나가사키는 더 이상 기리시탄의 땅이 아니라 국제무역항으로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구는 증가하였고 상인들 대부분은 무역이나 선박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시가지 전체가 무역 공사와 같은 기능을 발휘하였다. 무역 이익의 일부를 거주권이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므로 마을 전체가 윤택해졌다.


예수회의 본거지로 있었던 산타 마리아 성당의 유적지는 나가사키 봉행소의 서부지소가 되었다. 다른 성당들도 파괴되면서 절이 세워지고 마을 사람들은 사청제도에 편입되면서 가톨릭은 겉으로는 소멸되었다. 나가사키에 몰아친 기리시탄의 유령은 사라진 듯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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