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이 잠복하다.
이렇게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기리시탄들이 신앙을 버렸다. 먼저 다이묘 및 그 휘하의 무사 등 지배층이 신앙을 버렸고 그 뒤를 이어 일반 백성들이 배교했다. 그러나 나가사키 주변부 및 이전부터 기리시탄이 융성했던 지역에서는 민중 차원의 공동체가 은밀히 유지되어 신앙이 이어졌다. 주로 기층민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양반들이 먼저 신앙을 버린 것과 비슷한 양상이 일본에서도 일어난 것이었다. 엔도 슈사크의 소설 <침묵>에서도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들의 존재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이 끊임없이 박해를 당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배교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으로 묘사된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태복음 11:25)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이를 두고 한 말일까?
시마바라의 난 이후에도 일본으로 잠입해 들어오는 신부들이 있었다. 포르투갈인 아버지와 가톨릭 다이묘인 오토모 소린 집안의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마르케스 신부는 1642년 일본에 잠입하였다가 9일 동안 거꾸로 매달려 있는 아나쓰루시 고문을 받은 뒤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1643년에도 일본에 잠입해 활동하던 루비노 신부 등이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고, 센다이에서 신부 4명이 체포되었으며 일본에 왔다가 5년 뒤 마카오로 추방된 마르케스 신부 일행(신부 5명, 종자 5명)이 후쿠오카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체포되었다.
1644년 일본인 마지막 사제 고니시 만쇼가 순교하면서 일본에는 더 이상 사제가 없는 어둠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1644년에는 박해시대 일본인 최후의 사제 고니시 만쇼가 순교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니시 만쇼는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형되고 나자(1600년) 요시토시는 가문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내와 갓난 아들을 쓰시마에서 추방하였다.
마리아의 아들은 외가의 성을 따라 고니시 만쇼로 자랐다. 고니시 마리아의 이혼 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는 나가사키의 수도원의 보호를 받다가 1606년에 병사했다고도 한다.
만쇼는 마카오로 추방되었다가 1614년 인도의 고아와 포르투갈을 거쳐 로마로 건너갔다. 그는 1624년 8월 28일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1627년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된 고니시 만쇼는 1632년 귀국길에 올랐고, 일본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1644년 체포되어 순교했다. 고니시 만쇼 신부가 순교하고 난 후로 일본 내에 일본인 사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이후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인 사제는 탄생하지 않았다.
소 요시토시는 마리아와 이혼한 후 도쿠가와가 혐오하던 가톨릭을 버리고, 불교도로 개종하였다. 이혼 이후 소 씨 가문에 괴변이 발생하자, 이를 쫓겨난 부인 고니시 마리아와 아들 만쇼 모자의 원혼 탓으로 여긴 소 가문에서는 쓰시마에 ‘고니시 마리아 신사’를 세워 그들의 혼을 위로했다(1619년). 이 신사는 겉으로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모시는 ‘하치만구신사(八幡宮神社)’ 로 위장했다고 한다. 만쇼 신부 역시 순교 후 이 신사에 합사 되었다.
더 이상 사제가 없는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숨어서 종교 교리를 따르는 기리시탄들(가쿠레 기리시탄: 숨은 신자)이 있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될 때까지 약 250년 동안 은밀히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을 다음 세대로 전수하며 살았다. 이들 가쿠레 기리시탄의 존속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가 있었다. 바로 전설의 일본인 전도사 바스찬이었다.
바스찬은 스승이었던 성 요한 신부가 선종하고 난 후에도 전교를 이어가다가 최후에는 소토메의 산중에서 체포되어 나가사키에서 처형되었다.
바스찬은 우라카미와 소토메의 기리시탄들을 위해 바스찬의 전례력을 전하였다(1657년). 이 전례력은 1634년의 교회력(그레고리오력)을 태음력으로 개편한 것으로 중요한 종교행사의 일정을 적어놓은 달력이었다. 그리고 바스찬의 예언을 남겼는데 그 예언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희들 7대까지는 우리 자녀로 인정한다. 그 이후로는 콘페소르(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가 흑선(黑船)을 타고 와서 매일이라도 고해성사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어느 곳에서도 성가를 부르며 걸어 다닐 수 있다. 길에서 이교도와 마주칠 때는 상대방이 길을 양보해 줄 것이다.”
30년간의 잔혹한 박해를 지켜본 사람 중에서도 이 예언을 믿고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밀 조직을 만들어 이 전례력을 소중히 관리하였다. 이 조직은 전례력을 관리하는 장방(帳方, 쵸카타)를 리더로 하여 세례를 담당하는 수방(水方, 미즈카타), 일반 신자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문역(聞役, 기키야쿠)으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천주교 교회의 콘프라리아(신심회)에 기원을 둔 것이었다. 그들은 믿음의 도구로서 관음과 난도가미 등을 두고 모여서 오라쇼(라틴어로 기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들은 사청제도(寺廳制度) 하에서 불교 신도로 위장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신부 부재가 길어지면서 교의가 불분명해져 신앙의 토착화와 신도, 불교와 공존 경향도 나타났다.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남아있었던 곳은 주로 오무라나, 아리마, 아마쿠사 지역 등 나가사키 주변지역으로서 과거부터 기리시탄의 믿음이 견고한 지역이었다.
17세기 후반, 오무라 고오리 쿠즈레, 분고 쿠즈레, 노비 쿠즈레로 이어지는 대규모 잠복 기리시탄 적발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이러한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발견될 때마다 일본의 위정자들을 잔혹한 박해를 계속하여 이들의 뿌리를 뽑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고도 잠복 기리시탄의 공동체가 남아있던 지역이 있었다. 그곳은 일찍이 선교의 거점이 되었던 곳과 그 주변 지역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선교사들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았기에 각 취락에 견고한 공동체 기반이 갖추어져 있던 나가사키의 우라카미와 소토메 및 아마쿠사 지방이었다.
오무라의 고오리 쿠즈레(郡崩れ)
오무라는 최초의 기리시탄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의 영지였다. 스미타다 시대 오무라에는 6만 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아들인 요시아키가 도쿠가와막부의 정책을 거스르지 못하고 박해로 돌아서자 많은 신자들이 종교를 버리거나 숨은 신자가 되어 잠복하였다. 그러나 1658년 오무라의 고오리(郡)에서 대규모의 신자들이 적발되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니 이른바 ‘고오리 쿠즈레(郡崩れ)’ 사건이었다. ‘쿠즈레(崩れ)’ 는 엄청난 박해로 단체가 무너지는 것을 뜻하니 즉 대규모 박해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의 발단은 오무라로부터 나가사키에 오게 된 바스찬이 아마쿠사 시로(시마바다의 난 때의 소년 영웅)가 환생한 것 같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이야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통보를 받은 나가사키 봉행소는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의 재현을 염려하여 즉시 오무라 번에 알렸고 조사결과 성 아래에서 가까운 고오리(郡) 마을 일대의 지하교회 신자 608명이 적발되었다. 숫자가 너무 많은 탓에 나가사키와 사가, 히라도, 시마바라의 옥사에 까지 보내져 취조가 이루어졌고 일부 배교한 신자들이 석방되고 결국 411명이 오무라 5군데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부활을 두려워한 당국은 머리와 몸통을 따로따로 묻었다고 전해진다. 일본 기리시탄 탄압 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순교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당국은 철저한 탐색과 불교화를 꾀하였기 때문에 소토메, 히라도, 우라카미, 고토를 제외한 지역에서의 기리시탄들은 대부분 소멸되고 말았다.
분고 쿠즈레
분고 후나이는 지금의 오이타현으로 전국시대 기리시탄 다이묘 오토모 소린이 통치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선교의 거점으로서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던 곳이었다. 전성기인 1590년대에는 약 3만 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1614년 금교령 이후 많은 신자들이 가쿠레 기리시탄으로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660년부터 1682년에 걸쳐 이 지역에서 일천 명이 넘는 신자들이 색출되어 배교를 강요당했고 배교를 거부하는 신자들은 나가사키와 에도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특히 가츠라기에서는 92명이 순교하였다. 이 사건을 ‘분고 쿠즈레’라고 한다.
우라카미 쿠즈레(浦上崩れ)
우라카미는 예전에 오무라 영지였다가 도중에 아리마 영지로 바뀌었고 예수회에 기부되어 천주교가 번성한 곳이었다. 히데요시에게 몰수당한 후에도 천주교는 건재했고 여러 번의 쿠즈레 사건을 겪으면서도 250년간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바스찬의 예언을 믿고 흑선을 타고 올 신부를 기다리며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1790년, 우라카미의 부락민이 절 건립의 희사를 거부하자, 기리시탄이라고 고소되면서 주민 19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그리스도교 신자가 여전히 일본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이를 ‘우라카미의 첫 번째 탄압(浦上一番崩れ)’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마되었다.
50년 뒤인 1839년에는 ‘두 번째 탄압(浦上二番崩れ)’이, 1856년에 ‘세 번째 탄압(浦上三番崩れ)’이 일어나 많은 유력신도가 투옥되고, 고문에 의해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우라카미 쿠즈레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1867년에 일어난 ‘우라카미 네 번째 탄압(浦上四番崩れ)’이었다. 이 사건은 1865년, 나가사키에 와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쁘티장 신부에게 우라카미의 가톨릭 신자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 1867년, 쁘티장 신부를 만난 우라카미 신자들은 사청제도를 거부하고 크리스천 신앙을 표명하면서 68명이 체포되었다. 이 탄압은 더욱 확대되어 메이지 정부는 우라카미 기리시탄 신자 3천394명을 도야마 서쪽 서일본 지역의 스무 곳을 선정해 유배했다(1869년). 이러한 메이지 정부에 대해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일본을 비난하면서 서방과의 국교체결이 어려워지자 1873년 메이지 정부는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풀었다. 신도들도 석방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우라카미 신자 662명이 사망했다.
아마쿠사 쿠즈레
1805년, 아마쿠사의 사키쓰 등 4개의 마을 1만여 명이 가운데 반이 넘는 오천이백여 명이 이불(異佛)을 신앙하는 가톨릭 신자로 판명 나 당국의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적발된 신자 수가 너무나 많자 당국도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방면하여 많은 수가 신앙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소토메의 가쿠레 기리시탄과 고토 쿠즈레
소토메(外海)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무대가 된 곳이다. 니시노소기 반도의 벽지라고 부르던 소토메는 땅이 험한 경사면 밖에 없어 주민들이 몹시 가난하게 살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잠복 기리시탄들이 살고 있었다
1797년 고토 번이 황무지 개간을 위해 오무라 번에 농민 이주를 의뢰하였다. 고토열도(五島列島)는 소토메 건너편에 있는 여러 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전국시대 이곳은 우쿠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쿠가문의 제18대인 스미사다(純定)는 1566년 토레스 신부에게 선교사의 파견을 의뢰했고 알메이다 수사와 함께 비파법사에서 개종한 로렌소 료사이 수사가 후쿠에 섬으로 건너가 열심히 전도사업을 행한 끝에 1603년경, 고토의 신자는 2천 명을 넘었다. 그러나 금교시대를 맞이하면서 고토번이 박해로 돌아서자 신자들이 점차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소토메의 잠복 기리시탄들은 고토의 박해가 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108명이 시모고토(下五島)의 후쿠에 섬 무가타 해변에 상륙하면서 첫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에도 이주가 이어져 가미고토(上五島)와 시모고토(下五島)를 모두 합쳐 3천 명이 넘게 이주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여 보니 좋은 땅은 이미 현지인들이 차지하여 척박한 산이나 해변지역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들은 가난한 더부살이 중에서도 박해의 손길이 덜했으므로 마음의 여유를 얻으며 살 수 있었다. 그들은 더욱 새롭고 좋은 땅을 구하기 위하여 구로시마 섬과 히라도 섬 등으로 재이주를 하는 사람도 많아 고토섬의 가쿠레 기리시탄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런데 1865년, 가미고토의 신자 한 사람이 치료를 받느라고 나가사키에 체류하던 중 프랑스 사제가 일본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을 기화로 1868년 히사카지마 섬의 신자가 신앙을 명확히 밝히면서 200명이 6평의 옥사에 8개월 동안 갇히게 된 것을 시작으로 ‘고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외진 섬에서 2백 년 이상 고립되어 비밀리에 신앙을 지켜오던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신앙형태는 본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게 되었다. 오늘날도 일부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가톨릭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가톨릭과 통합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니 긴 고립의 시간을 원망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