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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un 13. 2024

<신(新) 손주 퇴치법>

퇴치하기에는 너무 사랑스러워


오래된 우스갯소리지만 한때 <손주 퇴치법>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결혼한 자식이 손주를 안고 와 양육을 부탁하면 부모로서는 거절하기가 매우 곤혹스럽다. 이때 손주를 퇴치하는 슬기로운 방법이 있다고 하여 한때 젊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이야기를 즐겨 회자하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식과 척지지 않으면서 손주 양육에서 해방되는 슬기로운 방법의 요지는 이렇다.

첫째, 할머니가 음식을 꼭꼭 씹어 손주에게 먹일 것, 둘째, 아이 입가에 뭔가가 묻어 있으면 곁에 있는 걸레로 아이 입을 쓱 닦아줄 것, 셋째, 아기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아이에게 심한 사투리(또는 콩글리시)를 가르칠 것 등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강심장의 딸, 며느리라도 아이를 데리고 가버린다는 이야기였다.      


남편이 어디서 이 우스갯소리를 듣고 와 내게 전했을 때,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제 겨우 자녀를 출가시키고 자유를 누려보고 싶은 나이의 젊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양육의 덤터기를 쓰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지혜롭게 녹아있어 감탄하였다.

나는 아들, 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여기에다 덧붙여 “만일 나에게 아이 양육을 맡기면, 시골에 아이를 데려가 흙바닥에 뒹굴며 키울 것이야”라고 까지 공언하였다. 딸, 사위와 아들(그때는 아들이 결혼 전이었다)이 이구동성으로 “그러면 뭐 어때요?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지요.” 라며 나보다 더 세게 나와  “어라 애들이 나보다 한 수 위내”라며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손주 퇴치법의 새로운 방법을 습득하였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며느리가 출산하여 일흔이 넘은 우리 부부에게 첫 손자를 보는 기쁨을 안겼다. 미국에서 며느리가 출산하면서 아들 내외가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져 왔다. 며느리는 처음 자연분만을 시도하였으나 진통이 길어지자, 아이 생명을 염려하여 제왕절개로 출산방법을 바꾸었다. 출산 후 며느리가 고열에 시달리고 아이는 황달로 고생할 때 아들은 제 아내와 아이가 잘못되는가 하여 병실 밖에서 울며 내게 기도를 부탁해 왔다(평소 아들은 무신론자임을 내세운다).

며느리의 열이 떨어지지 않자 의사들은 코로나 검사를 하였고 아들과 며느리가 코로나에 걸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자 병원에서는 병원 내 감염을 우려한 탓인지 당장 아이를 데리고 퇴원하라고 종용하여 태어난 지 사흘밖에 안 된 핏덩이를 안고 차가운 집으로 쫓겨났다고 하였다. 본래 산후도우미로 오기로 약속된 아주머니도 코로나 때문에 올 수 없어 며느리는 손수 미역국을 끓이고 아들은 아이 분유를 타서 먹이며 버텼다는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출산하였기 때문에 약국도 슈퍼도 문을 닫고 아들내외만 살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고 하여 더욱 안타까움을 더했다.    

  

한국에 앉아 이 기막힌 소식을 듣고 있으려니 견딜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샌프란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이 있었다. 내일 당장 미국으로 가겠다는 나의 제안을 아들이 거절했다. 지금은 내가 나설 순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들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코로나가 진정되자 산후도우미가 와서 이 가족을 돌봐주었고 그 후로는 장모가 가서 석 달을 딸의 산후조리를 도왔다. 드디어 아들이 예정한 나의 차례가 왔다.


나는 잔뜩 긴장하여 손자를 보러 갔다. 사실 나는 친정부모님께서 우리 아들딸을 키워주셨기 때문에 아이를 내 손으로 키워봤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전적으로 아이들을 친정부모에게 맡기고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었지만 하도 오래전 일이라 아이 돌보는 일은 생각만 해도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아이돌보기가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주변 친구들의 걱정을 잔뜩 들은 데다가 남편이 미국으로 함께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몸이 불편한 남편을 두고 나 혼자 떠나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손자와의 첫 대면이 편치만은 않았다.

작은 아이를 어떻게 안아야 할지, 아이가 울 때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등의 걱정으로 손자가 예쁜 줄도 몰랐다. 나는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가 하고 괴로워하였다.

게다가 아들내외는 장모가 척척 거둔 아이를 내가 쩔쩔매며 어쩔 줄 모르자 나를 불신하여 저희끼리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행히 아이는 내 등을 좋아했다. 장모가 아이를 업어재우는 습관을 들인 탓인지 아이는 잠이 와서 칭얼거릴 때마다 나의 등을 빌었다. 나는 아이를 업고서야 아이와의 일체감을 느끼며 내 등에서 잠든 작은 생명체가 그렇게 감동적으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이의 꼬물거리는 손이 내 등을 간질이고 칭얼거리던 아이가 내 등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들면 나는 끓어오르는 사랑을 느꼈다. 이것이 할머니의 손자 사랑인가 보았다.      


아이를 업고 나는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자장~자장~자장~자장~     


우리 친정 엄마가 우리 아이들 업어 재울 때 부르던 노래였다.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니 나도 내가 신기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내가 중얼중얼 자장가를 부르면 아이는 고요히 잠이 들었다. 아들내외에게도 나의 자장가 주문이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보니 며늘아이가 아기를 재울 때도 나의 중얼거리는 자장가를 따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의 엉성한 육아 인턴 수련이 익어갈 때였다.

하루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아이를 업고 문밖에 나갔다 들어온 나는 평소 한 쌍의 비둘기 같던 아들 내외가 큰 소리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들어보니 ‘어머님이 자기를 무시했다’는 며느리의 불만에 대해 아들이 큰소리로 나무라는 내용이었다.

아들내외의 다툼이 나 때문이라는 것이 명료해지자 나는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며느리에게는 내가 아이를 업고 문밖으로 자주 나가는 것이 불안하게 여겨졌던 모양이었다. 내게 몇 번 걱정을 하였다. 너무 어린아이에게 강한 빛을 쪼이면 시력형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며느리의 지론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 애들은 어릴 때부터 업고 밖으로 돌아다녔건만 시력만 좋다야”

라고 한 말이 신식며느리에게는 참을 수 없는 시어머니의 무식으로 들렸던 모양이었다.

더 며느리를 화나게 만든 것은 그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때 따라나선 내가 의사에게 아이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는 문제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다. 의사는 한낮의 땡볕만 아니라면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게 좋다고 하였다. 며느리는 이 순간 시어머니가 자기를 무시하였다고 격분한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내려놓으며 “야들아, 나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갈란다. 나 때문에 너그가 싸우다니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가 없다.”라고 선언하였다.

아들내외는 다른 곳으로 가서 싸움인지 토론인지를 더 하는 것 같더니 며느리가 내게 왔다.

며느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가지 마세요”하고 흐느꼈다.

순간 나는 며느리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흔들리는 며느리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지금까지 공부만 하던 철 모르던 젊은 여자가 엄마가 되면서 겪은 험난한 과정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래 나도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야. 하지만 아이가 워낙 바깥에 나가면 좋아하니까 집 안에 있는 것보다는 새소리도 들려주고 꽃도 보여주고 하는 게 아이에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단다. 하지만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아. 나도 바보가 아니니까 햇볕 속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지는 않으마. 그리고 내일 한국으로 가지는 않을께. 3개월간 아이를 봐주기로 했으니 그 기간을 채우마.”     


이상하게도 며느리를 안아주고 나니 며느리와 나 사이가 갑자기 확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며느리는 여전히 내가 짬만있으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아이 목 뒷덜미가 까맣게 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나는 웃으며 속으로 말한다. 

“며늘아, 이것이 <신손주퇴치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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