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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버드 미술관에서 만난 고흐

고흐의 진본 자화상에 홀리다.

by 보현


하버드 대학 뮤지엄에서 고흐의 자화상을 만났다. 고흐의 진품그림을, 그것도 진수 중의 진수로 꼽히는 그림을 눈앞에서 볼 수 있어서 꿈인지 생시인지 황홀하였다.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나지만 고흐의 그림을 직접 보자 분명 무언가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하버드 대학 캠퍼스 안에는 세 개의 미술관이 있다. 포그 뮤지엄(Fogg Museum, 1895년 설립), 부시-라이징거 뮤지엄(Busch-Reisinger Museum) 그리고 아서 M 새클러 뮤지엄(Arthur M. Sackler Museum)이 그것이다. 이곳에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진기한 자료 약 25만 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 중 우리가 방문한 곳은 중세에서 현대까지의 서양 미술을 전시하고 있는 포그 뮤지엄이었다. 이곳은 1895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니 하버드 대학은 진작부터 뮤지엄을 만들고 좋은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던 셈이었다.

이곳은 6년의 리노베이션 공사 기간과 무려 3억 5천만 불의 거금을 들여 2014년 재개장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깔끔하고 모던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하버드대학의 포그 뮤지엄


딸의 권유로 하버드 뮤지엄을 가게 되었지만 사실 내 마음에는 대학이 소유한 미술관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포그 뮤지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수집 작품의 퀄리티에 놀라고 말았다. 스탠퍼드 대학이 진품 로댕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어 놀랐다면 하버드대학의 소장품은 나의 대학 미술관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었다(아!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서울대학교 내에도 뮤지엄이 있다). 이곳에는 고흐를 위시하여 서양 미술사를 빛낸 위대한 화가들(보티첼리, 엘 그레코, 렘브란트, 루벤스, 드가, 르누아르, 모네, 마네, 고갱, 크림트, 피카소 등)의 진품 그림이 전시되어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를 위시한 아시아 지역에서 수집한 부처 조각상들, 도자기들도 진귀하고 훌륭한 것들만 모아 두어 그 수집능력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흐의 고갱을 위한 <자화상>

그 모든 것 중에서 나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은 것은 단연 고흐의 자화상 한 점이었다. 1888년, 아를에서 그린 자화상이었다.


고흐의 자화상, 1888년


이 그림은 고흐가 아를로 폴 고갱을 초대하여 함께 살기로 하면서 서로 자화상을 한 점씩 나눠갖기로 하며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당시 고흐는 일본 목판화 그림에 빠져있었던지라 자신의 모습을 일본 승려처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짧게 깎은 머리와 먼 곳을 응시하는 눈동자, 그리고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그의 그런 심정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한다.


나는 고흐의 자화상 앞에 오래 머물렀다. 푸른색 바탕에 노란색을 주조로 한 한 남자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예리한 눈빛과 앙다문 입술로 화난 듯이 보여 수도승으로서의 마음의 평화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그림을 보니 두껍게 여러 겹으로 칠한 고흐의 독특한 붓질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짧은 머리, 튀어나온 광대뼈와 높게 솟은 콧날, 중앙으로 모아진 눈썹과 붉은 수염이 무성한 그의 모습은 무언가 불안정하고 불만스러운 마음을 나타내는 듯도 보였다.



나는 고흐와 고갱과의 치열한 만남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흐에게 있어 고갱과의 만남은 비극이었다.

고흐가 폴 고갱을 처음 만난 것은 1886년 겨울, 파리에서였다. 고갱의 그림을 중개하고 있던 동생 태오가 고갱을 형에게 소개하였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화풍에 매력을 느꼈다.

뒤에 고흐가 아를로 이주하고, 자신이 머무르던 노란 집을 작가들의 공동체로 만들고 싶어 하면서 고흐는 고갱에게 아를로 와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고갱도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참이어서 태오가 지원을 하겠다고 나오자 아를 행을 결심하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함께 그림을 그리러 다니고 사창가에도, 카페에도 함께 다녔고 화가들의 화풍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며 나름 의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외로운 고흐의 인생에서 흠모하던 고갱과의 동거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강한 개성은 곧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림이 팔리고 있던 고갱은 오만하게 고흐를 무시하였고 고흐는 현실적인 욕망덩어리인 고갱에게 환멸을 느꼈다.

시골생활의 지루함과 고집불통인 고흐와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고갱은 고흐를 떠날 결심을 하였고 이에 좌절한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놀란 고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를을 떠나버렸다. 동거 후 두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후 고갱은 고흐의 자화상을 300프랑에 팔아버렸다.


고갱을 맞이하기 위하여 고흐는 고갱의 방의 방바닥에 푸른색, 녹색, 붉은색 무늬가 있는 카펫을 깔고 옅은 녹색의 커튼을 달았다. 벽에는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 그림을 걸었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자화상을 그렸다. 빈약한 생활비를 털어 이 모든 것을 준비하며 고갱에게 새 희망을 걸었던 고흐의 심정을 생각하자 내 마음이 다 아팠다. 고갱은 그런 환대를 받을 인품이 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고갱이 좀 더 너그럽게 고흐를 받아들여 주었더라면 고흐는 권총자살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후 유명해져 안락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러나 역사에 가정은 없다. 고갱이 300프랑에 팔아버린 저 그림은 현재 가치로 수천만 달러대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람의 운명도 알 수없고 예술작품의 운명도 알 수 없다. 다만 고흐의 너무 늦은 명성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버드 미술관은 비교적 한산하여 오랫동안 고흐의 자화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얼굴 모습이 그의 고독하고 불행한 인생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찡했다.


고흐는 자화상을 즐겨 그려 생전에 4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모델을 살 돈이 없어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고도 일컬어지지만, 고흐는 인물화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목표로 삼는 장르라고 생각했다. 고흐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많은 인물화를 그렸다. 고흐의 희망처럼 이 인물화들은 그 나름으로 하나의 장르로 남게 되었다.

고흐의 자화상은 고흐 특유의 독특한 화풍에다가 암울하고 불안정한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많은 이들을 그의 그림 앞으로 끌어모으는 힘이 있다. 그의 강한 색감(고흐는 노란색을 좋아했다)과 붓터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림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 귀한 고흐의 자화상 한 점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 하버드대학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고흐의 자화상에 빠져있다가 다른 소장품들은 그냥 휙 둘러보았다. 그러다 낯익은 도자기 한 점이 눈에 띄었다. 내가 본 것은 우리나라 가야시대의 도자기였다. 이렇게 크고 완벽한 가야시대의 도자기를 딴 곳에서는 못 본 것 같아서 감탄하며 보았다. 어떻게 저 도자기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하버드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기증품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저 도자기를 구입하여 이곳에 기증하였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그런 의문점은 접어두고, 5세기경 저렇게 크고 아름답고 독특한 도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그 당시 장인들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에 더해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하바드 미술관에서 나마 가야시대의 유물을 잘 보관해 주어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았다.


하버드 뮤지엄에 있는 5세기 가야시대의 도자기


한편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는 또 다른 우리나라의 유산인 신라시대의 금동 반가사유상과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보지 못하여 아쉬웠다.


하버드 동상 앞에서

하버드 대학 뮤지엄을 나서는데 길에 칠면조 가족이 산책을 나와 있었다. 우리가 케이프 코드를 다녀올 때도 야생 칠면조들이 다니는 것을 목격하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칠면조의 몸집이 생각보다 컸다. 프리머스에 정착한 이민자들이 첫 추수감사절 파티를 할 때 칠면조를 구운 것이 상당히 수율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딸이 “하버드의 칠면조를 잡아먹으면 머리가 좋아지려나?”하고 농담을 하여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하버드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수재로 여겨진다.


하버드 미술관 앞을 거니는 칠면조 가족


이왕 나선 김에 하버드 대학의 설립자로 알려진 하버드 목사의 동상 앞에서 동상의 발을 만져보기로 하였다. 칠면조를 잡아먹을 수는 없으니 하버드의 발이라도 만져 손자가 커서 하버드로 유학을 올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보았다(ㅎㅎ). 하버드 동상의 발은 하도 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금빛으로 빛났다. 하버드 미술관을 보고 난 뒤라 하버드 대학의 진가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하버드대학의 설립자 하버드 목사의 동상


예일대학 뮤지엄이 소장한 고흐의 <밤의 카페>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예일대학에 고흐의 유명한 그림 <밤의 카페>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카페는 고흐가 노란 집으로 이사한 후 즐겨 찾았고, 고갱이 아를로 온 후에는 둘이서 함께 자주 찾던 곳이라고 했다. 고흐와 고갱은 이 카페의 여주인인 지누 아주머니의 초상(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고흐의 이 그림이 있다)을 각각 남겼다.


고흐의 <밤의 카페>, 1888, 예일대학 미술관 소장

예일대학이 있는 뉴헤이븐에서 피자만 먹고, 고흐의 <밤의 카페> 그림을 보지 못하고 떠나와서 애석하였다.




최근 서울에서 고흐전이 열렸다. 세계에서 고흐 그림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미술관의 하나인 네덜란드의 <크뢸러뮐러 미술관>이 소장한 원화 가운데 76 점이 서울로 왔다고 했다. 이름하여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展)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대량의 진품 고흐 작품을 볼 수 있다는데 고무되어 예술의 전당으로 달려갔다. 지방에 있는 언니들이 일부러 상경해 함께 고흐를 보러 갔다.


전시회장은 평일임에도, 전시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음에도, 엄청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고흐 그림에 대한 대중의 강한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흐의 그림 앞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빽빽이 운집해 가까이 근접하기도 어려웠고 오래 머무르기에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그를 무시하거나 냉대했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사과라도 하듯 21세기의 세계인들은 길게 줄을 서며 고흐에게 열광하고 있다. 그가 살아생전 그토록 원했던 명성을 조금이라도 얻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기획한 고흐 전은 연대기적으로 작가의 작품과 작가의 당시 근황을 소개해 고흐를 한층 더 잘 이해하게 해 주었다. 나는 고흐전을 보고 도록(圖錄) 한 권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고흐의 열렬한 팬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서울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고흐전(2024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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