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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햄프셔의 가을

단풍나라에 빠지다.

by 보현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딸 내외가 뉴햄프셔(New Hampshire)로 단풍 구경을 가야 한다고 서둘렀다. 한숨이라도 돌리고 어디든 갔으면 좋으련만 딸은 단풍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면서 미국에 막 도착한 우리를 재촉하였다. 미국 동부 지역은 단풍이 좋기로 유명하고 그중에서도 단풍이 가장 빨리 오는 곳이 뉴햄프셔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이 가장 좋은 단풍철이라는 것이었다.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딸 내외를 따라나섰다.


남편은 피곤한지 북쪽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꽤 깊이 잠을 잤다. 나 역시 졸리기는 하였지만 우리가 지나가는 곳의 풍광을 보느라고 눈을 부비며 잠을 참았다.


뉴햄프셔 주는 메인 주와 함께 뉴잉글랜드 지방의 가장 북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캐나다의 퀘벡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버몬트 주, 남쪽으로는 매사추세츠 주, 동쪽으로는 메인 주에 접하고 있는 삼각형의 좁은 지역이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면적으로 43번째, 인구로 41번째의 작은 주라고 한다.

이곳으로는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 시작하여 앨라바마와 조지아에 걸쳐 미국 동부를 관통하는 애팔래치아 산맥이 지나가고 있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곳곳에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내어 유명한 관광지들을 형성한다고 한다. 북쪽에 화이트 마운틴 국립공원이 있다면 남부지방에는 미국인들의 방문 1순위인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국립공원이 있다.


구글 지도에서 뉴햄프셔를 따라가다 보니 대서양 해안에 있는 포츠머스(Portsmouth)라는 도시가 눈에 띄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재로 러일전쟁의 당사자가 만나 한반도의 지배권을 일본에게 양도한 소위 포츠머스 조약을 맺은 곳이다. 포츠머스에는 미 해군기지가 있어 이 북쪽 한적한 장소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던 모양이었다. 대한민국 통한의 역사가 결정된 장소가 지척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마음에 울분이 올라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얼마 전,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 간의 백악관 회동이 있었다. 젤렌스키를 거세게 몰아세우던 트럼프의 거친 기세는 현재도 약한 나라의 운명을 강대국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겠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그 포츠머스가 뉴햄프셔의 대서양 쪽 항구 도시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화이트 마운틴 국립공원(White Mountains National Forest)이었다. National Forest를 국립공원으로 해석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국립공원을 National Park 외에도, National Forest니, National Seashore 같이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튼 National이 붙으면 국가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장소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기대가 되었다.


가는 길에 뉴해븐에 들러 점심으로 대야만큼 큰 피자가 나오는 가게(Shally's Apizza Restaurant)에서 피자를 먹었다. 나는 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가게의 피자는 얇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맛있었다. 피자에 대한 나의 선입관을 일시에 허문 식당이었다. 그 후 뉴욕에서 피자를 자주 먹게 되었다.


뉴햄프셔의 유명 피자집 Sally's Apizza


저녁에는 하버드대학이 있는 캐임브릿지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었다. 하버드 대학 앞에서는 이탈리아식 디저트 가게인 Mike's Pastry에서 파는 디저트를 먹어야 된다고 하여 보기만 해도 열량덩어리일 것처럼 보이는 페이스트리를 먹었다. 사위는 캠브리지에서는 명물 조개튀김을 꼭 먹어야 한다면서 기어이 긴 줄을 마다하지 않고 서서 튀김을 사 가지고 왔다. 사위 딸 덕분에 세상 신기한 음식들을 맛보기는 했지만 사위의 뚱뚱한 배가 걱정되었다.


하버드 대학 앞의 유명 Pastry 가계 :Mike's Pastry


그리고는 I-93N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계속 달렸다. 밤이 되어서야 화이트 마운틴 국립공원 범주 내에 속하는 손턴(Thornton)이라는 곳의 한 캐빈에 도착하였다. 곰이 자주 출몰하므로 음식 냄새를 피우지 말라는 주인장의 당부가 있었으므로 곰과의 조우가 염려되기도 했으나 아무 일 없이 밤을 보냈다. 피곤이 몰려와 어떻게 잤는지도 몰랐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가 묵은 작은 캐빈의 조촐한 전모가 드러났다. 눈이 많은 지역임을 나타내는 A 프레임의 캐빈이었다. 키 큰 나무들이 보초를 서듯 집을 지키고 섰고, 집 뒤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는지 물소리가 졸졸 들렸다. 공기 속에 인공적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은 듯한 이곳에서 이틀을 편안하게 지냈다.


캐빈 앞에서


이날은 오전에는 플룸 고지(Flume Gorge)를 걷고 오후에는 화이트 마운틴 주변 길을 드라이브하며 보냈다.

플룸 고지는 뉴햄프셔 주의 화이트 마운틴 지역에 위치한 천연 협곡으로 Franconia Notch State Park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Franconia Notch 지역을 기념하는 주립공원인 셈이다. 화이트 마운틴 내셔날 포리스트는 국립이라는 글자가 붙은 지역이다. 국립과 주립의 경쟁이 기대를 갖게 하였다.


플룸 고지(Flume Gorge) Trail 걷기

숙소에서 플룸 고지로 향하는 대니엘-웹스터 하이웨이(Daniel Webster Highway)의 주변으로 단풍이 물든 멋진 풍광들이 지나갔다. 나는 감탄을 연발하며 사위에게 천천히 가자고 졸랐다. 차들도 많지 않아 느긋하게 만산홍엽의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이제야 말로 단풍나라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우리가 아침 일찍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플룸 고지의 주차장은 차들로 만원이었다. 뉴햄프셔의 단풍은 미국에서도 유명하다고 하더니 미국인들도 단풍구경에 열심인 모양이었다. 이번 주와 다음 주가 단풍시즌의 절정이라고 하였다. 제 철에 불타는 단풍을 보고 싶은 것은 만국공통의 인지상정인 것 같았다.


공원 입구에 선 maple 나무가 붉게 단장하고 우리를 맞았다. 푸른 하늘 아래 단풍나무의 붉은색이 고혹적인 매력을 품고 있었다. 내가 너무나 보고 싶어 했던 메이플 단풍나무의 붉은 단풍을 보니 마음이 흡족하였다.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단풍나무 앞에서 활짝 웃었다. 나는 남편이 소년 같은 웃음을 지으면 지금도 마음이 설렌다. 대자연이 주는 선물로 인해 남편의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기쁨으로 차는 것이 느껴졌다. 힘든 여정이지만 남편을 모시고 여행에 나서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후한 평가를 주었다.


플룸 고지의 입구: 메이플 단풍나무의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플룸 고지의 입구를 지나면 급격한 경사길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서게 된다. 계곡 위에 붉은 지붕이 있는 다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두 이 다리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긴 줄로 늘어서 있었다.

이곳이 유명한 Covered Bridge라고 하였다.

뚜껑이 있는 다리를 보니 예전에 열광하며 읽었던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크린튼 이스터우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동명의 영화도 보았었다. 원작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다 버렸다고 툴툴대며 보았던 영화였다. 그만큼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는 소설이 너무 아름다웠었다. 그런 다리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반가웠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길에 늘어선 저 사람들도 가슴 속에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품고 있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던 길에 일본어로 된 그 책을 읽고 있었다(우리나라에 번역본이 들어오기 전이었다). 뚱뚱한 스튜어디스가 지나가다가 “I love this book” 하며 반가움을 표하였던 기억도 따라나선다.


Permigewasset 강 위에 세워진 뚜껑 있는 다리


붉은 지붕의 다리를 지나면 Table Rock이라고 이름 지어진 넓은 화강암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다. 우리나라의 산과 계곡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화강암 너럭바위가 플룸 패스(Plume path) 곁에 펼쳐져 있었다.


화강암의 Table Rock


Franconia Notch State Park의 하이라이트는 ‘The Flume Gorge’이다. 플럼 고지는 약 2억 년 전(중생대 쥐라기 시대)에 형성된 화강암층을 기반으로 하여 약 1만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빙하 작용과 물의 침식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단단한 화강암의 암반을 깎아내 협곡(gorge)을 만들 정도로 빙하에 따라 흘러내려온 바위괴의 힘이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긴 현무암 다이크(Basalt Dike)가 화강암 사이를 가로질러 밝은 화강암에 대비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Flume Gorge: 화강암 벽 사이로 협곡이 만들어졌다.


나도 인지한 바와 같이 뉴햄프셔에는 화강암이 매우 유명하다고 한다. 화강암의 암반이 넓은 구역에 걸쳐 있을 뿐만 아니라 재질도 단단하여 건축자재로 용도가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뉴햄프셔의 별명이 ‘화강암 주’ 즉 ‘The Granite State’라는 것이다.

그런데 뉴햄프셔뿐만 아니라 인근의 메인 주도 화강암 지대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뉴잉글랜드 지역을 탐험한 모험가들은 해안가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얀 바위너럭들을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지역에서 엄청난 대구를 잡은 유럽의 어부들은 이 너럭바위 위에서 대구를 널어 말렸다는 기록도 남겼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를 지을 때 교각에 사용된 화강암도 주로 메인 주에서 채석되어 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 지역의 화강암은 고생대 데본기에 형성되었다는데 당시 애팔래치아 산맥이 만들어지던 과정에서 지하 깊은 곳의 마그마가 굳어 형성되었다고 하니 애팔래치아 산맥과 이 지역의 화강암 생성이 관련이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기묘한 암석 지형을 만나면 돌의 종류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옛날 대학시절 산악부 활동을 할 때 울릉도의 암석 채집을 갔던 경험 때문이다. 화강암, 이암, 사암, 현무암 등 그때는 제법 돌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시 공부해야 할 듯하다.

왜 돌 공부가 필요하냐고?

다윈이 비글 호를 타고 낯선 대륙의 탐방에 나섰을 때 그의 주요 역할이 지질학 탐사와 과학 표본 수집이었다. 이때 다윈이 소중하게 가지고 간 책이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e)이 쓴 <지질학 원리 Principles of Geology)>였다. 다윈은 이 책을 탐독하고 갈라파고스 제도와 남아메리카에서 지층과 화석을 조사하면서 지질학적 시간과 생물 진화의 개념을 연결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만큼 46억 년 동안 형성된 지구의 지질학적 풍경은 인류에게 중요한 생존의 백그라운드가 된다. 그러니 알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 트레일의 끝지점에도 지붕이 있는 다리가 하나 더 있다. Sentinel Pine Covered Bridge라고 하는 나무다리이다. 소나무 널판으로 만든 이 지붕은 우리나라 강원도의 너와집을 연상시킨다.


Sentinel Pine Covered Bridge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계곡 모습이 완전 비원에 들어선 느낌을 주었다.

멀리 Mt. Liberty와 Mt. Flume의 모습이 병풍을 두른 듯 보이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만산홍엽이 가을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뒤에 Franconia Range가 보인다: 왼쪽이 Mt.Liberty, 중간이 Mt.Flume, 오른쪽이 Mt. Whaleback이다.


단풍길 드라이브

오후에는 화이트 마운틴의 전경을 돌아보는 The Kancamagus Highway로 드라이브를 하였다. 34.5마일(55.5km)의 이 드라이브 길은 화이트 마운틴 내셔날 포리스트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뉴잉글랜드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길로 유명하다. 그래서 National Scenic Byway로도 불린다.

곳곳에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어 차를 세우고 화이트 마운틴의 장관과 뉴햄프셔에 내려온 단풍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어 이곳이 단풍왕국임을 실감 나게 하였다.


National Scenic Byway인 The Kancamagus Highway


왕복 2차선의 좁은 길 양쪽으로 단풍나무의 숲이 이어져 있어 왜 이곳을 National Scenic Byway로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이 길을 달려보고 싶어 사위로부터 운전대를 물려받았다. 창문을 열자 화이트 마운틴 숲의 나뭇잎 냄새가 차 안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것은 뉴햄프셔의 무공해의 가을 냄새였다. 나는 행복했다. 내가 행복해했으므로 남편과 딸과 사위도 행복해하였다. 행복은 전염성이 강하다.


The Kancamagus Highway 드라이브 길


곳곳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사진도 찍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Hancock Overlook에서


화이트 마운틴 내셔날 포리스트의 비지터 센터에서 나눠준 팸플릿에는 화이트 마운틴의 단풍을 구성하는 나뭇잎 모양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 팸플렛을 통해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단풍이 곱게 드는 수종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풍나무(maple), 참나무(oak:루브라 참나무, 핀 오크), 너도밤나무(American beech), 자작나무(birch), 사시나무(aspen), 물푸레나무(ash), 참피나무(basswood) 등이 다양하게 섞여 고운 색의 향연을 이룸을 알았다. 붉은색만이 찬양받는 단풍 색이 아님을 깨달았고 한 수종만으로 대자연의 합창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거기다 메이플 단풍나무가 세 종류나 있고 각각의 단풍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캐나다의 상징인 슈가 메이플은 황금색, 주황색, 붉은색이 섞여 있고, 레드 메이플은 그야말로 붉은색이며 줄무늬 메이플(실버 메이플이라고도 한다)은 황금빛을 띤다는 것이다. 메이플 단풍나무의 단풍을 그냥 불타는 붉은색으로 묘사한 내가 틀린 것을 알았다.

미국 동부 지역의 식물 공부에 이 팸플렛이 도움이 되었다.


IMG_0026[1].JPG



다음날 I-93S 도로를 타고 보스턴으로 내려왔다. 고속도로 주변의 키 큰 나무들이 처음 올라올 때보다 약간 더 단풍이 든 듯 보였다.

이제 며칠 후 캐나다 단풍 여행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아메리카 동부의 단풍이 더욱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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